광고

납량 칼럼3(마지막회)그리운 금강산, 사방에 암자가 즐비했던 명산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6/08/27 [12:12]
백두산은 민족정신의 상징, 금강산은 미의 상징

납량 칼럼3(마지막회)그리운 금강산, 사방에 암자가 즐비했던 명산

백두산은 민족정신의 상징, 금강산은 미의 상징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6/08/27 [12:12]
▲ 중국인들도 보고 싶어 했던 단풍든 금강산 모습.    

백두산은 민족정신의 상징, 금강산은 미의 상징
 
백두산이 우리민족에게 영산으로서 민족정신의 상징이라면, 금강산은 우리민족에게 아름답다는 미의 상징으로 통하는 산이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산이지만, 남북분단이전만 해도 가본다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명산 가운데 명산이었다. 지금은 마음 놓고 이야기하기도 거북한 산이 되어버렸다. 금강산이 북한 땅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5년 ‘만해축전 세계평화 시인대회 준비 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금강산을 가 본적이 한번 있다. 물론 외금강 신계사 주변이었지만,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웠고, 필설로는 다 표현키 어려운 절경이었다. ‘2005년 ‘만해축전 세계평화 시인대회’는 서울 인제 금강산 등지에서 개최됐는데, 주제가 ‘평화, 그것은’이었다. 한국에서는 많은 시인들이 주로 참여했고, 세계 각 나라에서 많은 시인들도 참석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시인도 참석할 정도로 무게감 있는 세계시인의 축제였다. 고은은 장시, ‘시인이여 이제 평화를 노래하자’라는 장시를 읊었고, 월레 소잉카 시인은 ‘평화의 비전’을 낭독했다. 이 때 발표된 모든 시들은 인제 만해마을 시벽에 걸려 있다.
 
▲ 인제 만해마을 시벽(詩壁).    

2005년 만해도 남.북 간에 어느 정도 해빙무드가 조성되던 때였고, 현대에서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시절이었다. 육로로 갈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금강산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옛날 금강산 불교는 찾기가 어려웠고, 다만 남북 불교계가 공동으로 복원한 신계사가 막 공사를 끝내는 때였다. 시인 고은의 은사 효봉 대선사가 이곳 신계사에서 중이 되었기에 인상 깊었고, 고은 시인 또한 감개무량한 모습이었다.
 
▲ 새로 복원된 금강산 신계사.    
▲ 강원도(북한)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에 있던 유점사로 6.25전의 모습.    
▲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있는 금강산 건봉사 일주문.    


이때 함께 갔던 국내외 시인들은 우선 금강산 절경(絶景)에 넋이 나간 분위기였고, 현대 금강산호텔에서 들쭉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름대로 통일과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던 때가 엊그제 같다.
 
금강산(金剛山)은 1638m로 금강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유래했는데 불퇴전(不退轉)의 뜻을 갖고 있다. 속초에서 불과 50km 떨어져 있는 반나절권 여행지이다. 옛날 금강산 신계사에서 아침을 먹고 걸어서 고성 건봉사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금강산 팔만구암자란 말은 사방에 암자가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절들이 수도 없이 많았었는데, 6.25를 경계로 거의가 불타버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월남한 금강산 출신 승려들이 많았고, 서울 사간동에는 유점사 포교당이 지금도 있다.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속한다.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나뉘고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도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부르는데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다고 하며,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 금강산의 주봉은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에서 이름을 따온 비로봉이며, 금강산에는 폭포가 여러 개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 구역이 있고,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고 한다. 내금강의 대표적인 사찰은 표훈사(表訓寺)이며,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이 있는데,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이다.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가보고 싶은 금강산 명승지가 아닌가 한다.
 
▲ 신계사 위 계곡에 있는 높이 74m의 구룡폭포.    

외금강은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상등봉(1,227m),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 구룡폭포는 높이가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에는 총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 개나 되며, 신라 하대 때부터 많이 건립되고 고려 때 절정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유점사로 전해져 있으며, 금강산의 대표사찰로서는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같은 금강산 4대 사찰이다. 유점사의 마하연 암자는 선원이 유명해서, 모든 참선 수행자들에게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절이었고, 근현대 한국 유명한 선사들은 거의가 이곳 마하연 선원에서 정진했다.
 
예로부터 금강산을 보고 여행기를 남겼는데, 근현대에 와서는 조선 말기의 문신 조성하(趙成夏)가 《금강산기(金剛山記)》를,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을, 춘원 이광수가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의 기행수필을 1922년 3월∼8월까지 ≪신생활 新生活≫에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광수 전집에 실려 있다. 필자는 육당과 춘원의 두 기행문을 읽어보면서 더더욱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간접경험으로 감동 깊게 감상했던 적이 있었다.
 
한동안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리더니 이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어느 듯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듯, 기후가 금방 하룻밤 사이에 변하고 있다. 이제 납량칼럼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이치란(객원논설위원·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