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전체기사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기획특집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이상훈 박사의 ‘바둑으로 배우는 성경공부’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19.07.16 [16:55]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 보호정책
기사제보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의 조선에서의종교체험
‘종교와 교리는 없으나 많은 사찰과 암자, 종파 있는 불교’에 주목
기사입력: 2019/06/18 [07:4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종교와 교리는 없으나 많은 사찰과 암자, 종파 있는 불교에 주목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 받은 표류자들

 

1653816일 스페르베르버(Sperwer)호의 제주도 부근 난파와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일행의 표류 기록은 하멜일지, 하멜표류기, 하멜보고서,난파 경위 진술서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전체 승무원 64명 중에서 36명이 살아남았으며, 하멜은 그 배의 경리업무는 물론 행해일지를 작성하며 장부를 정리하는 배의 항해사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하멜을 포함한 8명이 탈출에 성공한 것은 1666914. 당시 생존했던 사람은 16명 잔류인원 가운데 외교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거쳐 덴마크로 떠난 사람은 8명 중 7. 한 명은 잔류하게 된다.

 

잔류에 관한 기록이 없는 상태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설과 배를 탈 수 없는 정도의 건강상 문제로 보기도 한다.

 

책의 저자는 거의 14년 동안 군역·감금·태형(笞刑유형(流刑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다.

 

표류하던 그들의 조선의 첫 인상은 호의적이며 친절한 모습이다. 부상당한 자신들을 치료해주던 조선 사람들은 향연을 베풀어 그들의 시름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 매일 국왕으로부터 답신만 오면 우릴 일본으로 보낼 것이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 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6686월 일본에 인도됨으로 긴 항해의 돛을 내리게 된다.

 

이 같은 세 번의 탈출 시도와 성공 그리고 송환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 가능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불교, 민간신앙, 하멜일행의 신앙생활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 우상 섬기지만 우상보다는 권세가들 더 숭상유교국가 위상 요약

 

먼저 종교와 사상을 살펴보면 백성들은 여러 우상을 섬기는 이교를 신봉한다고 전제하지만 실제로는 우상보다는 그들의 권세가들을 더 숭상하고, 고관과 양반은 우상숭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 우상 위에 존재하는 양 자만심이 강했다고 조선왕국의 유교국가로서의 위상을 요약하고 있다.

 

이는 또 성리학을 숭상하던 고위층에서는 다른 사상과 종교를 이단이나 사교로 천시 여겨 종교 활동은 일반적으로 민간 차원에서만 전승되었음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서 중국과 동일한 유교의 특징을 기독교와 비교하였는데, 권선징악적인 도덕관이 바탕을 이루고 설교 혹은 교리문답 같은 것이 없고, 또 종파간 포교사업 대신에 개인들의 자의에 맡기고 있다고 했다. 또 종파 간에는 논쟁을 벌이는 법이 없어 구·신교간의 그리고 종파간의 싸움이 치열한 유럽 종교계의 실정과 대조됨을 지적하고 있다.

 

무격신앙에 대해서는 서너 대목에서 거론되는데 무당이 길흉화복의 주제자로 신앙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점쟁이혹은 마술쟁이는 지방관들에게 부임할 길일을 예언해 주고, “고인들의 편히 눈감았는지 그리고 명당자리에 묻혔는지공물과 기도로써 신의 뜻을 탐지해주고, 그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는 등의 직능이 있다고 했다. 특히 질병을 고쳐주는 기능이 강조되어 민중들은 흔히 대신 장인과 점쟁이들을 찾아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실행한다고 했다.

 

하멜의 신앙생황에 대해 박기현은 하멜표류기를 통해 알려진 벨테브레(박연)과 하멜을 한반도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란 가설을 전개하게 된다.

 

1630822일 핸드릭 하멜이 세례를 받았을 때 후르쿤 시장이 증인이 되었다. 하멜은 분명히 개신교인이다. 하멜이 성경책을 들고 조선에 내려 이를 나누어 주거나 돌렸다면 이를 공식 선교활동으로 보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연이 운명적으로 한반도에 표착해 왔으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면서 개신교의 진리를 몸으로 전파하고 조선에 정착했으며 그가 죽기 전 만난 하멜이 그의 상황과 자신들의 난파 이야기를 책으로 옮겨 놓은 책이 하멜표류기라는 주장이다. 하멜은 단순히 난판선의 선원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처럼 번역, 저술한 학술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서양지식을 전파하지도 않았고, 또 일본에서 거주하던 네덜란드 상인처럼 유럽문화와의 교량역할을 하여 근대화 과정에 기여한 것도 아니다.

 

하멜과 박연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 증거보다 주변의 정황을 통한 개연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만 하멜 일행은 자신들의 행동 가운데 늘 기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 의한 복음화보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위안으로 박연은 개인적 신앙행위와 하멜의 공동기도 형식으로 국한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난파란 극한 상황에 놓인 선원들에게 당시 제주목사는 인정을 베풀고 있다. 이것은 종교와 무관한 동양적 인정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이런 행위조차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멜일행은 짧지 않은 시간을 조선에 머물면서 지낸 개인 사생활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란 추측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한 배경과 관련해서도 아무리 노력해도 이민국가에 동화될 수 없고,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미국 이민세대의 조사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사회동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외형적 문제와 함께 이들이 체류하던 기간 1600-1800년 사이 조선은 전염병이 280건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 조선 군에 붙들린 하멜 일행을 그린 삽화. 1608년 암스테르담서 간행된 판본

 

탈출 시도 계속되는 하멜일행의 기도생활

 

조선에서 생활하면서 늘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 16594월 효종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이 현종에 즉위했다.

 

우리는 스님들과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 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1666년 후임 좌수사가 부임하여 자신들에게 힘든 일은 물론 병사들이 쏜 화살을 주어오게 하는 등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기독교인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죗값을 받게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1664년 신임 좌수사가 전임자와 다른 대우를 하는 모습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잔인한 사람에게서 놓여나고 대신 이렇게 선량한 사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1665년 조선을 탈출하려는 시도 가운데도 기도는 계속되고 있다.

 

배를 구하려 노력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하지만 우린 작은 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 배로 부식감을 구하거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구해 주실 가능성을 찾아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다른 두 고장에 사는 우리 동료들도 좌수사에 따라 편히 살기도 했다가 고생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좌수사도 우리가 겪은 좌수사처럼 좋은 사람도 있고 고약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이교도들의 국가에 잡혀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걸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

 

1666년 해안지대는 사령관(수군좌수사)에 반드시 있어야 하므로 전임자는 신임 수군좌수사가 사흘 후 부임해 올 때까지 떠나지 못했다. 점쟁이의 말에 의하면 그날이 그의 임기를 시작할 좋은 날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이 날을 잡아 부임한 수군좌수파는 부하 병사들이 부주의로 5명의 병사가 죽고 이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로) 90대의 태형과 함께 종신유배를 떠나게 된다.”

 

1666년 하멜 일행은 탈출을 시도한다. 그 첫 시도로 배를 구한 이후 출항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

 

음력 초순쯤 떠나기로 했다. 마침 계절이 바뀌고 있어 이때가 적기였다. 우린 하나님께 안내자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일본에 도착한 하멜일행은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행운과 오랜 기간 동안 건강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1328일 동안 슬픔과 위험 속에 감금 생활을 했던 우리들은 구해주신 하나님에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아직 그땅에 남아있는 8명의 동포들도 구조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길 기도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처럼 2년 후 네덜란드 정부 측의 요구로 남아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멜 일행이 경험한 불교와 유교·무속의 모습

 

하멜 일행은 당시 조선의 종교는 없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교에는 암자와 사찰,수많은 종파가 있다며 승려와 사찰의 모습을 묘사해 놓았다.

 

빈민들은 아무런 경외심도 없이 자신들의 우상 앞에서 얼굴을 찌푸린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보답을 받을 것이며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설파되는 교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암자와 사찰이 많았으며 수많은 종파가 있다. 어떤 사찰에는 5-6백 명 이상의 수도승이 있다. 승려들은 스스로 원한다면 기꺼이 자신들의 직업을 그만 둘 수 있으며 누구든지 승려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노비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승려들은 군역을 면제받지 않으며 대다수가 번갈아 가며 성이나 요새를 경계하는 일에 복무한다. 만약 그가 깨달음을 얻으면 고승으로 추앙된다. 승려들은 말을 타고 방문을 한다.

 

승려들은 평생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기도 한다. 승려들은 머리와 수염을 깎으며 여인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은 금지된다. 승려로서 처음 출가하면 팔에 지울 수 없는 표지를 새긴다. 이 표지로 인해서 그가 종단에 있었던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승려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이나 장사 또는 탁발(托鉢)을 한다. 승려들은 어린이들에게 읽기나 쓰기를 가르친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종파도 있다. 전통적으로 승려들은 속세의 모든 사람들이 이전에는 한 가지 언어를 사용했는데 천국에 오르는 계단을 만들려는 계획이 언어의 혼란을 야기했다고 믿는다. 부자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기생들과 여러 암자에 자주 들렀다. 대부분의 암자는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암자는 사찰이라기보다 유흥의 장소라 불려야 한다.”

 

탈출 성공 하멜 일행의 나가사키 총독 조사 내용

 

탈출에 성공한 하멜일행은 일본에 도착하여 나가사키 총독으로부터 직접 조사를 받게 된다. 여기서 주로 조선에 문화는 물론 군사실성, 종교 등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에 남겨진다.

 

다음은 나가사키 총독의 신문 내용과 대답을 정리했다.

 

*10번 질문: 너희 배에 네덜란드 사람 외의 기독교인이나 다른 국적의 사람을 태웠는가?

- 화사사람들 뿐 이었다.

 

*17번 질문: 기독교인이나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을 거기서 본 적이 있는가?

-네덜란드 사람인 얀 얀스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23번 질문: 그들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너희를 개종改宗하려 든 적이 있었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중국인과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24번 질문: 절과 불상은 많은가? 예불은 어떻게 보는가?

-산에는 많은 사찰과 수도원이 있으며 그 안에 불상이 많이 있다. 우리 생각으로는 중국식으로 예불을 이루어지는 것 같다.

 

*25번 질문: 승려는 많은가? 또 그들은 어떻게 머리를 깎으며 어떤 옷을 입는가?

-승려는 많다. 그들은 일도 하고 구걸(탁발)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들은 옷 입는 양식과 머리는 일본의 승려와 같다. 하멜 일행은 당시 승려들이 독경하는 소리와 보는 경전들이 한자로 쓰여 있어 그렇게 본 것 같다. 그러면서 복색은 일본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승려들의 승복은 한복의 한 형태로 일본식이라는 표현은 정확했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승려들의 복색은 조선시대 한복의 변형이다.

 

성리학자들의 장례모습으로 사대부가 죽으면 고인의 자식들은 3일간 곡을 해야 한다. 3일 동안 유자녀는 승려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 부인과 동침을 해서도 안 된다. 장례(葬禮) 기간 동안에 유자녀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적출(嫡出)이 되지 못한다. 유가족들은 장례 기간 동안 싸워서도 안 되며, 화를 내어서도 안 되며, 술에 취해서도 안 된다. 유족들은 장례 기간 동안 죽장(竹杖)을 짚고, 거친 삼베옷을 입으며 씻지도 않아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 그래서 유족들은 마치 혼혈아처럼 검다. 장례식은 장엄하며 고인에게는 제물을 바친다. 누군가 죽게 되면 그의 유족들은 울부짖으며 장례 행렬을 따른다.

 

일반인들은 장님이나 무당을 의사로 삼으며 그들의 충고를 따르고 있다. 제물을 산이나 강가, 절벽과 바위에 놓고 제사 지내거나 악마의 신상을 둔 집에서 자문을 구하기도 함, 악마의 신상을 섬기는 곳은 1662년 철거하라는 명령 때문에 더 이상 이용되지 않았다. 무속인들의 성품에 대해서는 성품이 온순하며 신앙심이 매우 두텁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다. 낯선 사람들 특히 승려들에게 호의적임이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편안히 저승에 갔는지 좋은 곳에 묻혔는지 말해준다. 사람들은 그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 시신은 항상 조심스럽게 매장하고, 지관들이 물이 흘러들어올 수 없는 산에 장지를 정하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와의 공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확연-탑 건축과 바벨탑 사건 비교  

 

하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죽으면 점쟁이나 무당을 청해서 좋은 곳으로 보낼 것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후 시신은 지관을 통해 장지가 정해지고 49제는 절에서 치른다.

 

당시 사람들은 일부 극성스러운 성리학자들을 제외하고는 폭넓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분량과 내용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불교인데, 이는 일행이 평소 승려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 만큼 불교에 대한 친화력도 높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우상즉 불상을 모셔 놓은 신당은 근래에는사용되지 않거나, ‘1662년 현종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간 왕궁에서 후원해 오던 수도원도 폐쇄되는등 사찰의 수효를 줄이고 사원 경제를 약화시킨 조선 왕조의 배불주의 정책을 재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신중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사원과 사찰들이 도처에 자리했고 승려의 수 또한 무수했음에 역점을 두었다. 나아가서 교리와 의식을 비롯하여 법도, 불교의 실태가 다각적인 측면에서 조명되었다. 또 특기할 점은 불교와 기독교와의 공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확연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승려들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원래 만인이 다 한 가지 언어로 통했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탑을 세워 그걸 타고 천국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기를 쓴 나머지 온 천지가 이처럼 변해 버렸노라고 했다.

 

이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 시켜 멀리 흩어지게 함으로써 탑 건축이 중단되게 했다는 구약성서 창세기 바벨탑 사건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각주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고 한 그 지명은 신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라는 뜻이다(창세기 11;19)는 결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연재소개 전체목록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의 조선에서의종교체험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명심보감』 속 효행 편 내용 연구
미륵신앙의 역사와 특징
殿-堂-閤-閣 …건물의 8품계로 본 한국 사찰과 민간신앙과의 관계
부모은중경에 나타나는 불교 효사상의 의미와 실천 방향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③중국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②자손의 부귀영달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①풍수는 땅의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④김계주의 무을교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③서백일의 용화교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②김형렬의 미륵불교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①종교적 혼합의 의미와 역사
해방이후 최초로 결성된 무속인 단체 대한승공경신연합회의 조직과 변천
증산의 기독교관
증산의 유교관
증산(甑山)의 미륵신앙관(彌勒信仰觀)
삼국유사에 나타난 ‘국제결혼 통한 다민족·다문화’ 이야기
男女有別 유교의 가치로 남녀공간 분할된 조선시대 가옥·토지정책
성리학과 민간 신앙
대표적인 집성촌 양동마을을 통해 본 전통 마을의 형성과 입지 특성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 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광열 / 청소년보호책임자 강은나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