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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태고보우 스님의 사상형성과 시대적 배경 下. 활동기 사회적 배경
원·명 교체기를 맞아 소용돌이 속 국내외 정치·사회적 상황
기사입력: 2019/07/29 [06:53]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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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 태고의 생애와 불교계 위상

.태고 활동기 사회적 배경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보우의 사리탑은 보물 제749호로 지정돼 있다.    


종파불교를 지양하는 정책으로 원융부설치, 종단을 하나로 묶는 일 추진

 

태고가 살던 시대는 무신집권의 종료와 왕정의 회복, 그리고 거의 1세기에 달하는 원나라의 지배 및 다시 원·명 교체기를 맞아 추진된 반원정책 등으로 국내외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소용돌이쳤다. 원의 간섭기에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등 여러 왕이 재위하여 왕권의 교체가 잦았다. 이 기간 원나라 권력에 편승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의 방해로 고려는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자가 들어간 왕명은 모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이다.

 

왕비 역시 원에서 정해진 사람과 결합만 허용되었다. 이들이 재위하는 동안 왕실의 권위는 점차 무너지고 권문세족의 힘이 커져 그들 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공민왕은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공민왕은 이전의 왕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정책을 폈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과다성 있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을 왕이 중국 연경에 머물고 있는 동안 원에서 명으로 국가체계가 넘어가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민왕의 반원개혁 정책은 권문세족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들은 신돈을 제거하고 공민왕을 시해하였다. 그 결과 개혁정책은 좌절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공민왕은 충숙왕 17(1330)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충혜왕 복위 2(1341) 12세가 되었을 때부터 원 순제의 명을 받아 원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원나라 입국 시부터 대원자로 불릴 만큼 왕위 계승에 유력한 후보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러나 충혜왕이 원으로 소환되어 유배 중에 죽은 후 충목왕이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충목왕 3(1347) 태고와 만났던 당시 계속 질자로 연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민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몽복; 몽골의 옷차림)을 입고 전상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이연종이) 말하기를 임금 앞에 나아가 직접 대면해서 말씀드리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하였다. 이미 들어와서는 좌우(왕의 측근)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기대는 세력을 혁파하고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강하게 내세웠다. 원나라 지배를 거치면서 불교계에는 점차 승풍(僧風) 문란 현상이 나타났다. 태고는 이러한 시대적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이의 지양에 나섰다. 종파불교를 지양하는 정책으로 원융부를 설치하고 산재되어 있는 종파()을 하나로 묶는 일을 추진한다.

 

태고의 원융부 설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첫째는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성 둘째는 시대적 요청에 순응한 처사이며 또한 한국불교사에서 이미 여러 선각자들이 제창했던 것을 태고가 다시 시기에 맞추어 제고 시켰다.

 

태고의 입장에서 원융부 설치를 추진하게 된 동기는 태고는 모든 만물이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여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여 종파간의 반목과 질시(嫉視)를 일치와 화합으로 하는 것이 그의 신앙철학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했다. 이는 그의 원융사상 즉 모든 만물이 하나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선과 교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융화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보우의 원융부를 통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에 대한 평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구산선문의 통합은 원융회통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보우의 구 산선문의 통합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이다.

 

둘째 구산선문의 통합은 정치적인 방법을 통한 임제종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통합에 불과하며, 기존의 선·교 회통적인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단절 내지 후퇴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이다.

 

셋째 구산선문의 통합과 임제의 간화선의 수입은 육조혜능과 임제의 정맥을 이은 보우의 특징으로 이는 전통적인 선교혼합주의(會通主義)와의 단절을 꾀하고 진정한 선문의 정로를 연 것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이다.

 

수학과정에서부터 선과 교를 겸수해 온 보우에게 있어 교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교학, 즉 언어와 문자를 미묘한 심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의선인(宜禪人)에게 주는 글에서는 문자와 언어적 표현은 중하기를 위한 것으로 이 방편을 빌려서 바로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언어문자의 방편은 최상의 진실법이 아니므로 방편에 얽매이지 말 것 또한 아울러 강조하고 있음을 물론이다. 여기서 선을 우위에 두는 태고의 입장은 분명해진다. 원융부 설치와 그 관속(官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전하고 있다.

 

태고를 봉하여 왕사로 삼고 부()를 세워 원융이라 하였다. 관속으로는 좌우사,윤승,사인, 주부,좌우보마배,지유,행수를 두었다.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설치한 원융부는 단순히 불교계 종파적 통합이 아니라 사상적 통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원융부 설치는 신라 원효의 통불교 사상을 계승한 태고의 원융불교 사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원융부가 설치되는 고려 말 특히 공민왕대의 시대적 배경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신흥사대부 집단과 갈등 둘째 선종을 비롯한 불교계의 타락이 노골적으로 비판대상이 되는 사상적 측면이다. 전자의 경우 불교계 대응은 무력하였다면 후자는 공민왕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기반성의 기회는 놓친 것이다. 고려 중기까지는 불··유 삼교가 상호 이해하고 보조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특히 불교의 영향을 매우 깊은 것으로 고려의 유학자라도 불교에 대해 좋아하고 숭상하는데, 충렬왕 이후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신유학인 주자학이 사람들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욕구를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불교를 현실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비판하기에 이른다.

 

불교계 타락과 모순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도첩제 도입이다. 승려 수 증가를 억제하고 무단으로 출가하는 자들에 대한 통제를 건의하고 있다. 공민왕 즉위 이후 4차례에 걸쳐 고려사에는 도첩제 관련 규정이 시행되었다.

 

공민왕 때 실시한 4번의 도첩제 관련 교시

 

승려가 된 자는 반드시 도첩을 가져야 하며 속가에 있을 수 없다.

교서를 내리기를 , 역의 아전들과 공사 노예들이 부역을 회피하고 제 마음대로 승려가 되는 까닭에 호구가 날로 줄어드니 이제부터는 도첩이 없는 자는 자의로 삭발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승려나 여승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12월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모든 사람은 도첩을 받기 전에 승려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일찍이 명령으로 정해져 있는데 주관하는 기관에서 이것을 이행하지 못한 까닭으로 장정이 노역을 회피하고도 도를 닦거나 계율을 행하지 않아 불교를 훼손시키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앞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서원하는 자는 먼저 소재지의 기관에 가서 병역 면제 비용으로 베 50필을 바친 뒤에야 비로소 삭발하게 하되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그의 스승과 부모에게 죄를 줄 것이다. 그리고 지방 아전이나 진, 역 등 공사관에 노역의 의무를 가진 자는 일체 통제하라, 공민왕 원년,5,8,204번에 걸쳐 도첩제 실시를 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두 번 강력한 어조로 하교하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태고가 국가로 임명된 지 얼만 안 된 시점이다.

 

백문보(1303-1374)신라 때에 처음으로 불법을 숭앙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은 출가하기를 좋아하며 향역의 아전들은 모두 요부(徭賦)를 피하고 사부로 아들이 하나여도 또한 머리를 깎습니다. 지금부터는 관에서 도첩을 받아야만 출가를 하게 하되 삼정이 되지 않는 집에는 모두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건의했다. 그의 건의는 승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내세운 조선정부가 불교교세의 인적 기반을 제약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국가통치에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 개혁을 꿈꾸던 군주 공민왕과 그의 아내 노국대장공주. 신돈을 제거하고 공민왕을 시해한 결과 개혁정책은 좌절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고려시대 말 불교계는 성리학자들과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공민왕 원년 여름 4월 이색이 복중에 상서하여 시사를 말하였다.

 

이단을 억제할 것입니다.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와서 왕공(王公)과 사서(士庶)가 존경하고 섬겨 한나라()때부터 오늘날까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해졌습니다. 이리하여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자 절과 민가가 뒤섞여 있게 되었고, 중세이후에는 그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오교·양종이 이익을 도모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냇가와 산골짜기는 절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다만 승도들이 비루(卑陋)한 짓에 젖을 뿐 아니라, 또한 백성들이 놀고먹는 자가 많아져서 생각 있는 사람은 늘 마음 아파합니다.……공자가 말하기를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부처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태조께서 화가위국(化家爲國)하시매 사찰과 민가가 삼오로 섞이고 얽히게 되었습니다. 중세 이후로 그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오교양종이 이익을 위하여 소굴이 되어 냇가와 산굽이가 절이 아닌 곳이 없게 되니 다만 부도의 무리가 점점 비루해질 뿐 아니라 또한 이 국가의 백성들이 놀고먹는 자가 많으므로 식자가 매양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신이 엎드려 빌건대 조금(條禁)을 밝게 내리사 이미 중이 된 자는 도첩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오(軍伍)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한 절은 모두 철거케 하되 철거치 않는 자는 수령을 죄주어 양민으로 하여금 모두 머리를 깍지 않게 하기를 원하나이다.”

 

백문보와 이색이 건의하고 있는 도첩제의 실시는 날로 증가하는 승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깨달음이 목적이 아니라 각종 역의 부담을 피하거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하여 승려가 된 자들을 가려내고자하는 것으로 도첩이 없는 자를 군오에 충당하자는 건의에서 그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 폐단에 대해 성리학자들은 두 가지 해소책을 제시

 

첫째는 신축된 사찰의 철거를 통한 고려 사회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려 한 것이고,

둘째는 도첩제의 시행을 통하여 승려들의 수준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개선책은 모두 국가 차원에서의 불교 통제 책으로 정책상의 건의하였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같은 건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신진 유학자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비롯하여 역대 왕들은 기성 정치인, 불교계의 방해 등으로 실시되지 않았다. 유가의 입장에서 비합리적이지만 고래로부터 믿어왔음을 상기하며 그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부처는 대성인이라 전제하고

 

첫째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대에 충당할 것이며,

둘째 새로 지은 절은 모조리 철저하되 철거하지 않은 승려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며,

셋째 양민들에게 머리를 깎거나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이색의 불교 비판에 대해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았다. 이색의 주장처럼 이능화의 조선불교사는 그 시대 승려들의 비행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공민왕 4년 을미에 왕이 대관(臺官)을 불러 중 선근이 범한 일을 깊이 캐지 말라.”고 하였다. 선근은 내원당의 승려로 전부터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士人의 아내를 간통하여 헌부의 문초를 받고 있었으므로 왕이 석방을 명한 것이었다. 이 무렵 승도들의 음행이 많아. 자은종 영욱(英旭)이 사음의 죄를 범하여 대관이 잡아다가 죄주려 하니, 영욱은 만약 나를 죄주려거든 종문을 없애 버리시오, 지금 이 종문의 승려가 나를 그르다고 합니까.”하였다.

 

태고가 왕사로 책봉되었을 때 왕의 자문에 응해 왕기가 쇠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묘청을 등용하게 된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들은 서경(평양)천도를 주장하며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의 문벌세력과 갈등을 보이게 된다. 천도계획이 실패이후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천도를 추진한 개혁세력들은 난을 일으킨다. 이들을 진압한 김부식 세력은 천도를 주장하는 태고를 묘청과 같은 부류의 승려로 인식하고 있게 된다.

 

공민왕 6년 정유에 이제현에게 명하여 한양에 자리를 잡아 대궐을 짓게 하였다. 보우가 참설을 들어, “한양에 도읍하면 36 나라가 내조(來朝)할 것입니다.”하여 왕이 그의 말에 혹해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개성 윤치사 윤택이 아뢰었다. “묘청이 인묘(仁廟)를 미혹시켜서 거의 나라가 뒤집혀질 뻔한 전감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사방의 국경에 근심이 있어 군사를 훈련하고 길러도 오히려 모자랄까 두려운데, 토목 일들을 시켜 백성을 수고롭게 한다면 근본을 상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보우가 강력히 한양천도를 주장한 이유는 당시의 국내정세를 이용해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한양으로 천도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정치적 경쟁자 관계에 있던 신돈이 추진하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의 유학파에 의해 좌절된 정책을 계속 추진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공민왕 105월에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었다.

 

불교는 본래 청정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가 죄복의 설로 과부와 외로운 여인을 속여 꾀어서 머리를 깎아 여승을 만들어서 섞여 거처하며 음욕을 제멋대로 하고, 심지어 사대부 종실의 집에 불사를 권하여 산중에 머무르게 하여 가끔 추문이 들려 풍속을 더럽히고 물들게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일체 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엄히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지방의 아전과 공사의 노비들이 법을 어기고 부역을 회피하여, 상문에 몸을 의탁해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입으로는 범패를 부르며 마을로 횡행하여 백성의 자산을 소모해서 그 해가 가볍지 아니합니다. 다 잡아서 모두 본 역으로 돌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흥 성리학자 비판에 적절 대응 못한 불교계, 결국 오랜 탄압의 시대로

 

유학자들은 일부 승려들에 의해 종종 발생하고 있는 성적추문과 노비들의 무단출가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유학자들의 불교계 비판에는 두 가지로 큰 특징이 있다. 불교 자체에 비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정싱적인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판의 주체가 되는 유학자들 스스로 불교를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성리학자들의 불교비판을 비판이 아닌 개선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최서해는 그의 졸고천백(拙稿千百)두타산 간장암 중영기에서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마다 탑과 사경이 서로 바라보게 되었고, 권세에 붙어서 부를 제 멋대로 하여 백성에게 독을 끼치고 사부를 종처럼 본다. 이것이 어찌 부처의 허물인가.(丹車所至 塔廟相望 其徒皆坼權擅當蟲靑斯民而奴而祖士夫是豈佛之遇與次) 대표적인 유학자 최서해의 비판 어디에도 불교를 창교한 붓다에 대한 비판은 없다. 당시 승려들의 세속화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자체에 대한 비판은 자제하고 있다.

 

이처럼 태고가 살았던 14세기 고려 말은 국가적으로 원·명의 교체기다. 외교정책의 불확실성은 승단내 승풍의 문란과 유교의 도전 등 불신풍조가 만연하였다. 사찰은 세속의 도피장 이면서 또 정쟁의 진원지가 되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 해졌다. 불교의 상구보제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보살도는 망각되고 왕실의 기복불교로 퇴락하고 있었다. 국고와 민생을 무시한 사원의 지나친 불사와 도를 넘는 반승으로 인해 국고는 탕진되고 민심이 이반하였다. 태고가 실행에 옮긴 불교 개혁 책은 구산선문의 통합을 통한 산문의 정비와 선원청규, 치문경훈의 유표와 간행으로 나타난다.

 

이중 구선선문의 통합은 종파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선원청규, 치문경훈의 유표와 간행은 승려의 질적 향상을 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신돈과 갈등으로 연고가 없는 속리산으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문란한 승단을 올바로 잡기위한 수행방법으로 간화선 수행을 주장하고 있다.

 

승단의 타락은 고려 말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 신흥 성리학자들에 의해 거센 비판이 시작되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정점으로 종교, 철학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 배격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신진학자들의 비판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불교계는 결국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오랜 탄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지도급 승려들의 무신경이 자기 개혁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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