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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바벨론을 채찍으로 사용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3/10 [07:16]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② -역사 그분 이야기7

하나님은 바벨론을 채찍으로 사용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② -역사 그분 이야기7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3/10 [07:16]

 
▲ 앗수르 성,     ©

앗수르(앗시리아)제국

티그리스 강 유역의 중간쯤에 위치한 셈족계통의 나라, 앗수르란 태양신 앗수르에서 유래한 말을 제국의 이름으로 썼다. 앗수르제국의 최전성기는 타굴티니누르타1세(BC 1242~1206)때였으며, BC 1200년 아랍인의 침공으로 그 기세가 꺾이고 분열과 세력 재편성의 결과 메소포타미아 북부 여러 민족이 발흥하여 앗수르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아다드타리 2세(BC 911~891)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나아갔고, 나시르아플리 2세(BC883~859) 때는 유프라데스강 유역의 도시 갈그미쉬를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를 정복하여 조공받기도 했다. 그의 아들 살만에셀 3세 (BC 859~824)는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바벨론을 점령하였다. 그 후 살만에셀 4세(BC781~772) 통치 때는 제국의 내분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디글랏빌레셀 3세(BC 746~727)는 주변국을 다시 정벌하고 바벨론의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살만에셀 5세(BC 727~722)의 통치 때는 북방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한 후 3년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민간인 2만7천290명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들 포로는 앗수르제국 동쪽 삼바티온강 건너편에 분산 이주시켰다. 살만에셀 5세가 사망한 후 사르곤 2세(BC 722~705)는 계속 주변국가를 정벌한다. 720년에 엘람, 717년에는 갈그미스, 717년에는 아스돗과 가드를 정복한 후 아들 산헤립(BC705~681)에게 통치권을 넘긴다. 산혜립의 앗수르군은 BC 701년 예루살렘 침공에서 패배를 맛본다. 한편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바벨론(베벨로니아)을 엘람인들의 협력으로 통일한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이 북쪽 앗수르(앗시리아)를 침공하여 큰 성 라기스를 포위하고 유대왕 히스기야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 무렵 앗수르 산혜립의 군대진영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여 산혜립의 군사 18만5천000명을 죽인다. 산혜립은 이 때문에 니느웨이로 돌아가 그의 신 니스록의 묘에 참배하던 중 그의 아들의 부하 아드람 멜렉과 살레셀에 의해 피살되고, 그의 아들 엣살하돈(BC 681~669)이 왕위를 계승하여 통치한다(열왕기하 19:35~37절). 그 후 반아플리(BC 669~626) 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가 반란을 일으키자 리디아도 가세하여 BC 612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신 바벨론)의 침공으로 수도 니느웨이 성이 함락되어 앗수르제국은 멸망하였다.
 
블랙 오벨리스크
 
앗수르제국 나시르아플리 2세(BC 883~859)와 살만에셀 3세(BC 859/858~824/823)는 앗수르제국을 정치적, 군사적 강국으로 이끈 왕들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메소포타미아 황금시대 중 하나로 꼽는다. BC 9세기 앗수르제국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위협의 대상이 되어 왔다. 당시 이스라엘왕 아합은 살만에셀 3세의 서쪽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2개의 작은 동맹국을 결성하였다. 기원전 853년 아합왕은 보병의 중요부대와 병거를 가지고 앗수르군대와 싸웠다. 그 때 예후가 아합을 몰아내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블랙 오벨리스크에 남아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로 예후 또는 그의 대리자가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 숙여 항복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마리아인
BC 721년 앗수르가 북방이스라엘인을 포로로 잡아 갈 때 최하층의 천민만 남겨놓고 이 땅에 앗수르제국의 주민을 이주시켜 이들과의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른다. 이들의 호칭 속에는 신분과 혈통을 하찮게 여겨 멸시하고 천대받는 사람의 대명사가 들어있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신들
태양신 바알, 엘(EL)신과 그 신의 처, 처첩인 아세라, 아낫, 아스다롯 등 여신으로 가나안의 만신전(萬神殿 : pantheon)의 선두에는 엘(EL)이 있었다. 이 신은 “세월의 아버지(father of years)” 또는 “사람들”(후대의 베니게 학자들에 의하면 엘에게는 세 명의 처 아스타르테(아스다롯), 아세라, 바알티스(아나트)가 있었다.) 이들은 그의 누이들이었다.
 
바다의 후견인인 아세라는 ‘바다의 아세라’로 불리지만 가나안과 애굽에서 “신들의 여 창조자(creatress of the gods)와 성하(聖下 : Holiness)로 불린다. 그녀는 그림이나 부조(浮彫)에서 보통 사자의 등 위에 서서 한손에는 백합, 다른 손에는 뱀을 잡고 있는 아름다운 나체의 창녀로 나타나 있다. 그녀는(왕하 17:10) 작은 숲들로 상징되어 숭배되었다.
 
ㆍ아스타르테(아쉬토레트)는 임신은 하지만 출산은 하지 않는 위대한 여신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방패와 창을 휘두르며 질주하는 말에 나체로 걸터앉아 있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베니게인들은 그녀에게 포쏘스 즉, 성욕과 에로스 곧 성애(性愛)라는 이름을 가진 두 아들이 있었다고 믿었다).
 
ㆍ아나트: 모든 신들 중 가장 부도덕하고 피에 굶주린 신.
 
ㆍ바알: 주신인 엘(EL)의 아들이요 아나트의 오빠로 그는 천둥, 번개, 비를 책임지는 농사를 풍요롭게 하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이 바알숭배로 돌아섰을 때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함으로써 바알의 무기력함이 백일하에 증명되었다. 하나님께선 백성들이 바알숭배 도입은 농사를 풍년이 되게 하지 않는 사실상 기근을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배우도록 계획하셨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이 비의 신으로 무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바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가나안 종교란 단지 그 백성의 도덕적 반영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된다. 축제일에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부도덕한 주신제(酒神祭, orgies)가 신전과 산당들에서 행해졌다. 또한 화가 난 신을 달래기 위해 영아들이 제단에서 희생되거나 산 채로 매장되었고, 뱀 숭배가 널리 퍼졌다. 가나안인들이 비탄과 애통할 때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자신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등의 풍습은 참으로 기가 막힐 뿐이다.1)
 
남방 유다의 멸망과 민족의 포로
 
이스라엘 12지파들 중 북방 10지파를 제외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한 후 396년간 존속하였고, 20명의 왕들 중 절반이 이방신을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수도는 예루살렘으로 초대왕 르호보암은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라 왕국의 정통성은 인정받았지만 무능과 오만으로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제18대 여호야김왕은 무능과 학정을 펼친 우상숭배자로 특히 주변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그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을 3년간 섬기다가 배반하여 멸망을 자초했고, 그의 뒤를 이은 제19대 여호야긴왕도 18세에 왕위에 올라 3개월간 통치를 하다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성이 포위되자 이에 저항을 하다 결국 항복하였다. 예루살렘성을 점령한 바벨론군사들은 왕과 왕비, 왕자와 귀족, 장정 1만명과 용사 7천명, 대장장이 1천명과 군인, 그리고 백성들까지 거의 모두 잡아끌고 갔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들도 이때 포로가 되어 간다. 바벨론은 이때 하나님의 성소의 기구와 기명과 진귀한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갔다. 그러나 유대왕국의 명맥은 유지시켜 주었다. 바벨론은 여호야긴왕을 잡아가면서 대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시드기야는 21세로 미숙한 통치자였다. 그는 어리석게도 애굽이 바벨론 보다 더 강대국으로 착각했다. BC 597년 애굽은 시드기야에게 자기들이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어리석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신하고 저항을 했지만 애굽은 끝내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성안에 식량은 바닥나고, 1년7개월의 저항의 보람도 없이 그의 통치 11년째인 BC 586년 유대력 아브월 9일 밤. 아들과 몇몇의 군사와 함께 성을 빠져나가다 바벨론군사들에게 붙잡혀 느브갓네살왕 앞으로 끌려가게 된다.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을 빼앗긴 시드기야는 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성을 점령한 바벨론군사들은 성을 파괴하고, 성전을 불지르고, 성전의 각종 보물과 기명 기구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백성들 중 포로가 되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었고, 또한 이들도 노예로 팔려가 포도밭 농사에 동원하였다.
 
성경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하고 패역한 유대백성들을 위해 바벨론을 채찍으로 사용했다.”(렘 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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