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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길 '역사 그분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초인 철학의 공격받은 합리․ 계몽주의적 전통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12/16 [17:08]

심재길 '역사 그분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초인 철학의 공격받은 합리․ 계몽주의적 전통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12/16 [17:08]
 심재길 '역사 그분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超人철학의 공격받은 합리․ 계몽주의적 전통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가브리엘로 프린치프

반 유대주의자 아돌프 히틀러와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

 

유럽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생활수준의 향상, 사회개혁,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확대, 교육기회의 일반화 등으로 한껏 자부심과 낙관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또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거의 100년간 평화의 시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겉모양과 달리 서구사회는 내면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19세기 초 민족국가의 수립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으나, 1914년에 이르러 정반대의 현상이 유럽사회를 뒤엎고 있었다. 민족주의는 유럽 국가들의 핵심 이념이 되어 다른 민족국가를 공존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의 대상,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사회적다원주의라는 발열제를 훌륭하게 사용했다.

유럽이 근대화와 더불어 유지했던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적 전통은 비합리주의 본능과 의지를 내세우는 초인철학들의 공격을 받고 그 왕좌를 빼앗기게 되었다. 행동하는 젊음이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되는 시기에 부르주아가 함양하였던 전통의 가치관은 연약해지고 열등한 사람들의 가치로 전락한 듯 생각되었다. 영광스런 삶을 위하여 영웅적인 행동을 상찬하는 풍조는 전쟁을 동경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독일 장군들은 “설령 우리가 패배한다고 하여도 전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까지 하는 지경이 된다. 감정이 이성을 제압하고 본능의 충동이 행위의 기초를 이루는 위험한 시기가 1914년 이전에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하자, 일요일인 이날 오전 11시 세르비아인 20대 대학생 프란시즈가 황태자 부부를 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서로 대립관계에 있던 양국이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① 동맹국 : 독일, 이태리, 오스트리아

② 협상국 :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23개국

③ 성  격 : 당시 유럽 각국은 영토분쟁으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차제에 전쟁이 발발하자, 너도나도 명분과 실리를 앞세워 전쟁에 참전한다.

④ 양  상 : 초기에는 동맹국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참전으로 협상국이 승리한다.

⑤ 결  과 : 유럽을 주전장으로 한 전쟁에서 군인전사자 900만  명, 민간인 사망 1100만  명의 인명손실을 초래한 4년간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패전국 독일의 실정


전쟁에서 패한 독일 국민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경제는 파탄상태가 되었다. 독일 거주 유대인들은 차별대우를 받고 살았지만 상업, 중개업, 금전 대여업에 종사하고, 특히 현금이나 자본가가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 자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심리적인 보상을 유대인들에게서 찾으려고 국민들에게 반유대주의를 선동, 선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자본과 현금을 강탈하여 국가경제 재건에 사용코자 독일 국내는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선동, 선전하여 영국과 스페인 등에선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여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보냈다.


히틀러와 유대인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했을까? 그 배경은 1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은 1차 대전 때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싸우는 독일 편을 들었다. 이것은 자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러시아가 공적 1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1917년 짜르왕정을 전복시킨 볼세비키 공산혁명에 대거 가담했다. 공산주의 군대인 붉은 군대를 조직하여 1925년까지 군을 직접 통솔하여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레닌 다음의 2인자 레온 트로츠키가 유대인이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화풀이를 유대인을 속죄 양으로 삼는다. 이는 러시아가 공산주의에 의해 체제가 전복된 이후 독일로 피난 온 독일인들과 망명 온 왕당파들이 볼세비키 혁명과 유대인의 역할에 대한 폭로에서 혁명세력에 유대인들이 대거 참가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의 가장 위협적인 적국이었다. 독일인들은 볼세비키 혁명세력과 유대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아돌프 히틀러(1889~1945. 4. 30)가 1933년 1월 30일 총통에 즉위하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말단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과 주위의 유대인에 대한 편향된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으로 후일 군에 입대하여 군인의 신분으로 노동당에 입당하여 극단적 민족주의자로서 대중선동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1차 대전의 패배에 사로잡혀 있던 독일사회에 히틀러의 이런 정치성향은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학생들은 나치의 행동대원으로 자원하기도 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위협을 가하고 공직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9년 세계 공황은 독일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더욱 고조시킨다. 독일 마르크화의 폭락으로 경제 질서가 무너진 독일기업들은 공산주의자의 체제전복 가능성을 무서워했다.

중 하류층은 사회적 지위 불안에 떨고 있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의 반유대주의 선동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3년 3월 30일 독일 총통에 즉위하자마자 반유대주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해 4월부터 유대인들은 공직, 전문직에서 추방되었다. 가족 중 어느 한 명이 유대인이면 “비 아리안”이라는 그룹으로 분류하여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용이하게 되었다. “비 아리안”은 일자리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사회적 불이익과 냉대와 차별을 당하며 살게 되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세균에 비유하면서 독일인과 결혼을 통하여 우수한 “아리안” 족 혈통을 파괴한다고 했다.


레닌-볼세비키당-공산당:

레닌(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870년~1924년)은 교사인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중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이론적 기초를 쌓았다. 혁명을 수행할 조직을 만들고 측근에 레온 트로츠키(1879년~1940년)와 아이오시프 스탈린(1879년~1953년)을 두었다. 트로츠키는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문학에 출중한 재능의 소유자였으며, 스탈린은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혁명적 이력의 소유자로 학업을 포기하고 볼세비키 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다. 1903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온건파 멘세비키파와 과격파인 볼세비키파로 양분되었고, 이 두 파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레닌은 이들 세력의 중심은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했다. 1918년 레닌은 당 이름을 볼셰비키 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꾸고 슬로건을 착취 없는 세계 건설이 인간이 고취할 수 있는 이념이라고 선언했다.

나치주의 : 개인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개념을 없애고, 한 핏줄의 유대와 조국 흙에 기초한 민족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하는 주의.

에큐메니칼운동 :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화해와 일치운동.

시오니즘 : 과거 이스라엘 땅에 유대민족의 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운동.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 이스라엘로 가려는 이유 : ①약속이 땅이기 때문, ②메시아의 강림이 예루살렘이기 때문, ③조상이 살았던 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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