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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9

眞鏡 | 기사입력 2018/03/26 [07:13]
真の主権はどのようなことを意味するのでしょうか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9

真の主権はどのようなことを意味するのでしょうか

眞鏡 | 입력 : 2018/03/26 [07:13]
(질문9) 구도의 여정 중에 ‘신’과의 조우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質問9:求道の旅の途中に神との遭遇があったとおっしゃいました。具体的に説明をお願いします。
    

구도의 여정에 계신 분들과 많은 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수행자들은 누구나 한 번쯤 ‘신’과의 조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영적인 체험일 수가 있겠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앞으로 해서도 안 되는 경험이며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언을 해서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이 일어났음을 증언하려면 먼저 감각기관에 의존하는 인식작용과 지각작용이 가능하여야만 하며, 경험되어지는 대상적 구분을 지을 수 있는 경험의 주체, 즉 ‘지금의 나’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求道の旅にいらっしゃる方々と、たくさんの方々にこの話をお聞かせしたいと思います。修行者は誰でも一度くらい「神」との遭遇に対する話を聞いたことがあると思いますが、誰もが一度くらいは経験してみたいという霊的な体験で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むしろ「私」には、今後もしてはならない経験であり、経験することもできないことです。また、証言をしてもならないことです。なぜなら、ある経験があったことを証言するには、まず、感覚器官に依存する認識作用と知覚作用が可能であってこそであり、経験される対象的に区分することができる経験の主体、即ち、「今の私」がいてこそできることです。    

그러므로 드러날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할 ‘나’는, 경험의 주체가 될 수가 없으며, 비존재적인 측면과 더 사실적인 측면으로서의 ‘나’는 어떤 것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경험적 주체로서 ‘지금의 나’가 경험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したがって、現れるすべてのことを可能にする「私」は、経験の主体になることができず、非存在的な側面と、より実質的な側面としての「私」は、何も経験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つまり「今の私」は「私」の影に過ぎず、経験的な主体として「今の私」が経験して体験するすべてのことは、結局、夢のようであり、幻影のようであるといえます。    

찰나지간에 일어난 경험 아닌 경험을, ‘지금의 나’와 더 사실적인 ‘나’ 사이를 넘나들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열망하던 신과의 조우가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났으며, 이 조우를 증언한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증언을 해 보겠습니다.    

刹那の間に起こった経験ではない経験を、「今の私」とより本質的な「私」との間を行き来して説明をします。そのように熱望した神との遭遇が極めて瞬間的に起こって、この遭遇を証言するということは矛盾しますが、理解を助けるために証言をしてみましょう。    

진짜 ‘신’과의 조우이며 ‘진리’와의 대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의 빛의 번쩍임보다 더 순간적이었으며 진리와 대면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의 주체로서 ‘나’라고 여기고 있던 ‘지금의 나’는 의식적으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비동일시상태, 즉 더 사실적인 ‘나’로 깨어났으며, 아주 찰나적 순간의 일이었지만 그렇게 깨어나고 보니, 모든 것이 ‘나’의 뜻이자 의지이며 ‘내 마음먹기’가 모든 이치와 모든 원리의 근본 중의 근본이더라는 겁니다.    

本当に「神」との遭遇であり、「真理」との対面としか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一度の光のきらめきよりも瞬間的であり、真理と対面する瞬間、今までの経験の主体として「私」であると考えていた「今の私」は、意識的に死と同時に消滅してしまいました。

そして、ふと非同一視の状態、即ち、より本質的な「私」として目を覚まし、極めて刹那的瞬間のことでしたが、そのように目覚めてみると、すべてが「私」の志であり、意志であり、私の心持ちがすべての理致とすべての原理の根本中の根本だったのです。    

따라서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 즉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가 의식적으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렸으며, 그와 동시에 더 사실적인, 즉 비동일시의 ‘나’가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나’는 독립적 주체로서, ‘진리’이자 ‘생명’이자 ‘빛’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이며 ‘진리’와 ‘생명’과 ‘빛’의 전제로서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したがって、同一視による「今の私」、即ち、「私は誰であり、何である」が意識的に死と同時に消滅してしまって、それと同時に、より本質的な、即ち、非同一視の「私」が目を覚ました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に目を覚ました「私」は、独立的な主体として、「真理」であり「生命」であり、「光」であるといえます。なぜなら、「私」は「真理」と「生命」と「光」の前提としての「私」であるためです。    

그러므로 ‘나’의 입장에서는 ‘신’과 ‘진리’와의 조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조우에 대한 경험을 증언할 ‘지금의 나’는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신과의 조우’, ‘진리와 대면’에 대한 바른 증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したがって、「私」の立場では、「神」と「真理」との遭遇はあり得ません。なぜなら、「私」がまさに「それ」であるからであり、そして、遭遇の経験を証言する「今の私」は消滅してしまったからです。    

(질문) ‘지금의 나’가 하고 있는 인식과 지각작용이 제한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質問)「今の私」が持っている認識と知覚作用が限定的な理由は何ですか。
    

왜냐하면 ‘나’는 비존재적인 측면으로 인한 더 사실적인 측면으로서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형태 없음으로 인해서 또한 어떤 감각기능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서 ‘나’는 분리와 나눔의 인식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형적 제한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감각에 의존하여 지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なぜなら、「私」は、非存在的な側面による、より本質的な側面として、どんな形態も持っておらず、形態がないことによっても、どんな感覚機能に依存しないため、「私」は分離と分けあうことの認識作用をしないためです。つまり感覚は実在するのではなく、有形的な制限により生じて、感覚に依存して知覚して認識するすべてのことは、制限的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질문) 진경님이 이야기하는 ‘의식적인 죽음’은 영적 체험과 경험이 아닙니까?    

(質問)眞鏡さんがおっしゃる「意識的な死」は、精神的な体験と経験ではありませんか。
    

경험의 주체인,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금의 나’가 의식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순간, ‘지금의 나’는 사라지고 소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경험과 체험의 주체가 소멸되어 버리는데 어떻게 체험되어질 수가 있으며, 어떻게 경험되어질 수가 있습니까? 누가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증언을 할 수 있는 ‘지금의 나’는 소멸되었습니다.    

経験の主体である、感覚器官を基盤としている「今の私」が意識的に死ぬことです。つまり死ぬ瞬間、「今の私」は消えて消滅してしまうのです。だから経験と体験の主体が消滅してしまうのに、どうやって体験することになり得、どうやって経験することになり得ますか。誰が証言することができますか。証言をすることができる「今の私」は消滅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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