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전체기사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기획특집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이상훈 박사의 ‘바둑으로 배우는 성경공부’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18.10.22 [00:04]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기사제보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성리학과 민간 신앙
한국 전통 문화의 기반으로서 성리학
기사입력: 2018/08/08 [08:03]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불교 영향 받고 그 불교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흥한 성리학    

성리학은 송학(宋學), 명학(明學), 정주학(程朱學), 육왕학(陸王學), 성리학(性理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심학(心學),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불린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원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성리학은 심성(心性)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 법칙 및 자연 법칙으로서 이(理)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의리의 의미를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유학 중의 하나이다. 사상적으로는 도(道)⦁불(佛) 특히 불교의 영향을 받고 그 불교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흥하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사상 경향과 체제를 닮은 유학이라 하여 과언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중국 송에서 발흥할 무렵, 즉 고려 인종 대를 전후한 시기(11-12세기)부터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빈번하게 수집해 들였고, 외교 경로를 통해 윤언이 같은 대학자가 송에 가는 한편 중국 사신들이 고려에 빈번히 왕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 중 성명(誠明), 솔성(率性) 등 성리학자들이 심성의 수양을 위해 지극히 중요시하는 『중용』의 용어가 이용되고 있다. 고려 예종 때 대신들과 경전 강론의 분위기를 가리켜 ‘三綱五常之敎와 性命道德之理’가 만당에 가득한 것이라는 글을 통해 전래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은 형이상학이 이(理)와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기(氣)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성리학의 인간관은 주돈이의 ‘천일합일사상(天一合一思想)’을 계승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에 근원한다고 본다. 성리학에서 이기론은 우주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는 논리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다. 송대 신유학의 학풍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제시된 우주론을 통해 유교 본래의 합리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만들었다. 주돈이의 이(理)에서 우주론이 마련된 성리학은 장재(1020-1077)와 정이를 거치며 이기론의 논리를 마련하였다. 장재는 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현상 세계를, 정이는 이에 대한 해석으로 주돈이의 ‘천일합일사상’을 계승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에 근원한다는 성리학적 인간관의 골격을 만들었다.    
▲ 성리학은 북송 시대의 유학사상을 종합하여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학문 체계이다.  

노장사상, 선불교, 문학을 섭렵한 주희가 집대성한 신유학-성리학    

성리학은 ‘새로운 유학’, 즉 신유학이라는 의미로서 북송 시대의 유학사상을 종합하여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학문 체계이다. 북송 때에 시작되어 명대까지 이어진 새로운 유학은 신유학 외에도 성리학(性理學), 이학(理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도학(道學), 송학(宋學)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신유학’이란 송대 이후의 유학이 그 이전의 한당(漢黨)이나 선진 시대의 유학과는 학문 경향을 달리하는 새로운 유학이라는 의미에서 종래의 유학과 구별하여 쓰인 것이다. 신유학은 양명학까지 포함하는 보다 범위가 넓은 말이다. 신유학의 주요 학파로는 정주학파와 육왕학파가 있으며, 이들의 사상적 특징은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으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리학은 염학(溓學), 낙학(洛學), 관학(關學), 민학(閩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각각 염계[호남성]에서 태어난 주돈이, 낙양[하남성]에서 활약한 정호와 정이 두 형제, 관중[섬서성]에서 태어난 장재, 민중[복건성]에서 태어난 주희의 학문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주희를 제외한 네 사람은 모두 북송 때의 인물인데, 훗날 주희가 여조겸과 함께 편집한 『근사록(近思錄)』에 그들의 글이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네 사람 외에 소옹(邵雍)도 주자학의 한 연원으로 간주된다.

성리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는 남송(南宋) 시대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별호[晦翁, 雲谷山人, 滄洲病叟, 遯翁 등]가 있다. 그의 부친 위재(韋齋) 주송(朱松, 1097-1143)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 재상이던 진회(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퇴직하고 복건성의 우계현(尤溪縣)에 은거하였다. 주희는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축씨이다. ‘주송’은 27, 8세경에, 후일 주희의 스승이 된 연평(延平) 이동(李侗)과 함께 나종언(羅從彥, 자는 仲素로 南劍人)에게 사사하여 도학(道學)을 배웠다. 나종언의 스승은 정자(程子, 程顥, 程頤의 二程子) 문하의 양시(楊時, 호는 龜山先生)였다. 따라서 주희는 부친으로부터 도학을 전수받은 셈이다. 그러나 주희는 청소년기에는 노장사상, 선불교,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유명(遺命)에 따라 부친의 친구인 호적계(胡籍溪, 籍溪 胡憲), 유백수(劉白水, 白水 劉勉之), 유병산(劉屛山, 屛山 劉子翬) 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스승들이 선불교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주희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24세가 되던 해 여름에는 부친의 동문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섬겼다. (이후에도 29세 정월과 31세 겨울, 그리고 33세 봄에 이동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주희는 이를 계기로 노장과 불교에서 벗어나 유학에 정진하게 되었다.

주희는 북송 시대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주자학(朱子學)'적 학설 체계를 수립하였다. 주자학은 인간과 자연을 통합하여 해석하는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학문 체계인데, 이는 전근대에 있어서의 ‘자연법사상’ 체계의 하나로, 자연의 이법에 토대하여 절대적인 인간의 도덕적 규범을 정초하려던 작업이었다. 고대 중국 사회에는 다른 문화권에서와 같은 종교적 인격신적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우주론적 도덕 사상이 윤리 규범의 원천으로 요청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주론적 도덕 사상은 중세 서양의 종교 윤리와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 사회에 있어서 절대적 도덕규범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우주론적 도덕 사상을 철학적으로 정서화하고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주희의 성리학(性理學, 朱子學)이다. 주희가 진정한 스승을 만난 것은 24세 때이다. 과거에 낮은 성적으로 급제한 주희는 부임지로 떠나는 길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동(1093-1161)선생을 만나 배움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주희와 이동선생과의 서신 교류는 이동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7년간 이어진다. 이동은 나종언한테서 배우고, 나종언은 양시(楊時)한테서 배운다. 양시는 이정형제의 제자이다. 이렇게 주희는 이동을 통해 양시계열의 도남학 학풍을 접할 수 있게 된다.

주요한 저술로는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시집전(詩集傳)』, 『초사집주(楚辭集注)』,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등이 있다. 이밖에 문인이 정리 편찬한 『주자어류』, 『주문공문집』 등도 있다.

주희는 생전에 정치적으로는 높은 권력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강학에 따르는 학생들이 많았고 많은 저술로 영향력이 대단했다. 특히 중국 4대 서원의 하나인 백록동 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내서 북방에 대비되는 남방 ‘민학(閩學)’ 학파의 형성에 주춧돌을 놓았다.     
▲ 조선의 유교 정치는 세종 때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된다. 집현전을 통해 성리학을 학습하게 하고 유교적인 의례도 정비되었다.  

집현전 통해 성리학 학습, 유교적인 의례도 정비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의 태동시기를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 초에 사대부 계층에는 두 가지 노선에 대립이 있었다. 인격 수양론과 제도 개혁론이 그것이다. 정도전의 제도 개혁론으로 조선이 건국된다. 훈구파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하고 나온 것이 사람파이다. 사림파의 인격 수양론은 이황 조식 등의 인격 수양론으로 꽃을 피우고, 선조 때 드디어 사림이 집권하게 된다. 조선 전체로 보자면,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집권하던 시기는 선조, 광해군 시기일 것이다. 그때 동인, 북인이 집권했으며, 그들은 이황, 조식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다. 조선 전체로 보자면 결국 성리학자들이 집권했던 시절은 정말 짧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유교 정치를 추구하였다. 유교 정치는 덕치(德治)와 인본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민본정치(民本政治)를 표방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는 불교, 도교,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 그것들이 유교적 질서와 대립되기도 하였으나 전통적인 사상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강화라는 필요에 따라 유교적인 기조위에 종교 신앙적인 전통을 결합하여 일부 흡수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유교 정치는 세종 때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된다. 집현전을 통해 성리학을 학습하게 하고 유교적인 의례도 정비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왕도정치와 민본정치를 필 수 있었다.

16세기 중엽 중종과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의해서 주도된 개혁정치의 이상이 훈구파에 의해 좌절된 후 예치주의 온건 노선을 표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예치를 위한 이론적 근거인 예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논하면서 심성론적인 논쟁의 양상은 한국 성리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조선 중엽에 지배층의 분화, 분열현상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철학 논쟁들 즉 이언적과 손숙돈의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사단칠정 논쟁 및 서경덕과 조식 등의 철학적 주장 등을 통하여 음양오행설이 이미 세계관의 기본원리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논쟁의 사단칠정론과 인성물성론이다. 18세기 초두에 발생한 인성(人性), 물성(物性), 동성(同性) 문제에 대한 논쟁이 20세기 초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는데 이것은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의 이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 되었다. 이와 같이 음양오행의 작용을 세계의 원리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은 이후 전쟁과 논공상의 발달, 소여(所與)로서의 자아중심 세계관을 가진 실학자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말엽까지 발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성리학은 조선시대를 지배한 이념으로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주변의 자연을 대우주까지 확장시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자연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천인합일(天人合一)’로 표현되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뿐만 아니라 유교 사상과 도교 사상도 삼국시대 이전에 도입    

한국인은 상고 시대로부터 동일한 문화 공간에서 같은 세력을 형성해가며 거주해 왔다. ‘단군신화’에서 살필 수 있듯이 우주와 만물에 대한 인식과 신앙을 공유했고, 고유의 풍습과 습속을 이어오며 성장, 발전했다. 동시에 일찍부터 인접한 중국의 선진 문화와 교류하고 이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불교적 세계관뿐만이 아니라 유교 사상과 도교 사상도 삼국시대 이전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 유학 사상이 들어온 것은 거의 한자의 도입기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극성기의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도여치(以道與治)’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때 ‘도’는 유가의 도(道)를 뜻한다. 또한 고구려 재상 창조리(創助利)가 폭군을 쫓아내고 새 임금을 모시는 혁명의 이념도 유가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도가 사상의 유입도 마찬가지로 추정된다. 최치원은 이와 같은 유(儒), 불(佛), 도(道) 3교의 외래 사상이 한국적 고유의 세계관으로 용해되어 토착화되었음을 말해 준다.

유학이 사회 통합의 이념으로 정착한 것은 조선 시대 신유가[성리학] 사상가들에 의해서지만 유가 사상은 훨씬 이전부터 전통 문화의 일부분으로 기여해 왔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사회 전반에 있어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형성하였다. 건축에서도 민간 신앙적 요소를 배척하기보다 받아들이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민간 신앙은 ‘특정한 교조, 교리 체계, 교단 조직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일반 민중의 생활 속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전(前) 종교적 또는 주술적인 신앙 형태’ 또는 ‘민족의 종교 체험사 중에서, 특히 전 종교적, 미분화된 분야로서 혼융⦁복합적인 주술 종교영역(Magic-Religions)에 드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흔히는 원시 종교를 민간 신앙 또는 토속 신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모든 사물에 정령 혹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 내지는 사물 그 자체에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고 이것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프리애니미즘(pre-animism) 신앙의 원시 사회에 공통적인 사상 경향으로서, 한국인은 고대(古代)로부터 일상의 삶에 불가사의한 영향력을 미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두터웠다.

또한 한국인의 원초적 의식 속에는 세상 만물에 생명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 유생관(有生觀, animatism)과, 모든 사물에는 영적이고 생명적인 정령이 두루 펴져있다고 믿는 정령관(精靈觀, animism)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피할 수 없는 난관과 좌절들을 초월적인 힘에 의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소망의 의식화라 할 것이다. 이는 한국인에게 독특한 신앙 의식으로 논자에 따라 원력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연 환경과 물질에 대해 해악을 피하고 이익을 찾으려는 욕구에서, 사물이나 현상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 신앙은 그것이 자연적인 범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방적인 색채가 짙다. 제도화된 종교와는 달리 개인 신앙보다 한층 더 공동체적이고 서민적인 민간 신앙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경험의 반복에서 오는 판단에 그 신앙 구조의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에는 자연 숭배, 정령 숭배, 주력 숭배, 신당 숭배, 외래 종교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여러 숭배 등이 있다. 자연 숭배는 인간의 생득적인 신앙심이 민간 사회에 저변에 가라앉아서 마을 생활의 밑바닥에 퇴적되어 생기는 것이다. 그 중에서 뚜렷한 것은 산과 바위와 나무와 물이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간 신앙은 신앙 형태에 따라 개인 신앙과 공동 신앙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개인 신앙은 가신신앙⦁무속⦁점복⦁풍수⦁예조⦁민간의료등 개인이나 가정을 단위로 해서 전승되는 신앙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중목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