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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결실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11> 正道 걸으면 재물은 따라오게 돼있어…不正하면 敗家亡身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1/26 [15:08]

후천결실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11> 正道 걸으면 재물은 따라오게 돼있어…不正하면 敗家亡身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1/26 [15:08]
후천결실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11>

正道 걸으면 재물은 따라오게 돼있어…不正하면 敗家亡身


백산은 해인사로 성철스님은 만나러 갔으나,

만나 주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발길을 돌렸다.

사진은 해인사 일주문 전경.

 

 

 

 

 

 

 

 

 

백산의 제자들은 스승이 도의 세계에 입문한 이후 영체(靈體)를 바꿨다고 했다. 인간 손중환에서 인왕(人王)으로 영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산에게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인왕 작위를 부여해서 황복(皇服)을 입고 인왕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어디든지 백산과 함께 다니면 날씨도 좋고, 안 좋은 일도 좋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마치 백산이 기상변화라든지, 세상만사를 쥐고 흔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백산의 언행을 보면 세상에 나타나는 기상이변들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산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어마어마하게 바뀔 것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지금은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지만, 똑바로 서게 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이야기였다. 예컨대 지구의 자전축이 갑자기 0도가 된다거나,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지구의 관성력에 의해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들이 절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백산의 신통력이 예사롭지 않아 스승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 여성 제자는 장거리 운전을 지치지 않고 차분하게 잘 했다. 백산은 그녀를 높이 칭찬하며, 하늘나라에서 신장들이 다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 여 제자는 운전하면서 노래에도 심취하고, 딴 일을 해도 전혀 운전에 방해 받지 않는 것을 체험했다. 그녀는 백산이 타계한 후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운전을 참 편안하게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녀는 지금도 백산이 하늘나라에서 운전을 잘 할 수 있게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고 확신했다.

백산은 도 공부하러 전국을 유랑할 때 항상 동해 쪽에서 큰 어른이 나온다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도인들을 많이 찾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기성 종교지도자에 실망한 백산은 이 땅에 진정한 도인이 없는 것에 대해서 적이 안타까워했다. 그는 태백산까지 가보았지만 도인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도인은커녕 전부 사이비만 있더라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백산은 해인사로 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을 만나러 간 일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나보고 싶다는 청을 넣었으나 성철 스님 상좌로부터 시간이 없다는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애석한 일이었다. 백산을 수행했던 한 측근의 말을 미루어 백산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백산은 성철 스님이 열반 후 3천국에도 못 간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천국은 몇 개로 나뉘어 있는데, 보통 인간들은 3천국밖에 못 들어갔다. 천국에 들어가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성철 스님 같은 큰 인물에게 3천국에도 못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의 답답했던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백산은 충남 태안의 백화산이며 경북 경주 선도산 등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오면 어느 절 주지라며 스님 한 분을 데려와 2~3일씩 함께 머물기도 했다.

백산은 제자들은 물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돈은 깨끗하게 벌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돈을 탐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람들이 돈 벌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을 보면 쓴 웃음을 지었다. 정도를 걸으면 누구에게나 재물과 돈이 따라오게 돼 있는데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사기를 쳐서 돈을 벌려고 한다고 몹시 나무랐다. 솔직하면 하늘에서 다 알고 도와주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부정한 짓을 하니까 돈 벌려다 패가망신(敗家亡身) 당한다고 질책했다. 그는 겉도 속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맑고 밝고 선하고 후덕하게 살면 하늘이 다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맑고 선하게 살면 하늘이 도와

성철스님이 안 만나주자 ‘실망’

부친은 죽음 예견하고도 超然


백산이 중생 제도(濟度)의 뜻을 접고 방황하던 어느 날이었다. 백산의 부친이 아파서 몸져누웠다. 가족들이 병원으로 모시고 갔더니, 의사는 도로 집으로 모시고 가라며 받아주지 않았다. 집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많이 드시게 하라고 권유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더니 노환이라고 했다. 고칠 수 없느냐고 하니,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잘라 말했다. 의사는 몸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저하되어 오는 병이라고 했다. 어느 하나만 고장 나면 고칠 수 있는데 모든 기능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가끔 통증이 심하면 병원에 와서 진통제나 맞게 해드리라고 했다. 백산과 두 동생들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백산의 부친은 71세였다. 주변에 80세가 넘도록 사는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삼형제는 부친의 기능이 다 되었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10년 전 부친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도 단 5일 만에 깨어나지 않았던가. 그 놀라운 기운은 다 어디 갔다는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기능이 바닥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니 참으로 가슴 찢어지는 일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의사는 치료를 위해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링거만 꽂아놓는 것이었다. 삼형제는 가족회의 끝에 부친을 집으로 모셔가기로 했다. 병원에 갇혀 지내게 하기 보다는 집으로 모셔가 맑은 공기도 호흡하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드리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주일 동안은 매일 병원을 왔다 갔다 하였다. 

부친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백산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징용으로 남태평양 서쪽 끝 파푸아뉴기니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생사를 오가는 전투도 여러 차례 겪었다. 한번은 길이 500m나 되는 방파제에서 미군 전투기 5대가 편대를 이루어 공습을 하는데 방공호까지 죽을힘을 다하여 뛰어가 목숨을 건졌다. 기관총이 난사되자 앞과 옆의 동료들은 퍽퍽 쓰려져 나둥그러졌다. 부친은 해방이 되고도 귀국할 배가 없어 집에 오지 못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초에야 겨우 귀국하였다. 태평양전쟁은 끝났지만, 조국의 산하는 좌우익이 낮과 밤을 바꾸어 지배하던 뒤숭숭한 시절이었다. 좌익에 가담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 촌사람을 전선에 묶어 동해 앞바다에 수장하던 야만의 시대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 부친은 이러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왔던 것이다. 백산의 부친은 학자처럼 곧고 단아하게 생겼다고 한다. 작은 체구에 조그마한 얼굴을 하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백산의 모친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 수도 적은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가족들은 한 가장의 일생이 이렇게 속절없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백산의 부친은 노환으로 누워있었지만, 정신력은 대단하였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였다. 가족들이 부리나케 병원과 집을 왕복하는 것을 보고 대강은 눈치 챘겠지만 생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통이 심할 때는 병원에서 가져온 진통제로 아픔을 달래었다. 부친은 세상을 뜨기 3개월쯤 전에 본인의 갈 곳을 걱정하였다. 백산은 동생들과 의논 끝에 부친을 고향 뒷산의 공원묘지에 모시기로 하고, 모친의 묏자리도 함께 봐 두었다. 백산의 형제자매들은 평소 자주 연락도 하고, 작은 것이지만 서로 나눌 줄 아는 동기간 정이 두터웠기에 부친을 대하는 자세가 여간 극진하지 않았다.

임종의 시간이 다가오자 부친은 자식들을 불러 모은 뒤 오늘저녁에 세상을 뜰 것 같으니 장례 치를 준비를 하라고 당부했다. 백산의 여동생이 “누가 모시려 왔어요?”라고 물으니, 부친은 “푸른 옷을 입은 선녀 4명이 방안에 오셨는데 보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딸이 “아무도 없는데요.”고 하니 “며칠 전부터 나를 데려가려고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하늘나라로 가자.”고 하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난 뒤 부친은 “우선 향물에 목욕을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집에는 제사 때 사용하던 목향과 백산이 제단에 사용하던 고급 향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백산은 나무 향 하나를 골라 깎아서 세숫대야에 풀은 뒤 물수건으로 부친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드렸다. 몸을 깨끗이 다 닦고 나니 부친은 “저승 갈 때 입을 옷을 입혀 달라.”고 했다. 부친의 수의는 부인이 남편 회갑 때 미리 장만해 두었었다. 백산은 모친에게 수의를 내어달라고 하여 그 옷을 아버지께 입혀드렸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부친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에 갈려고 했으나 저승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 못가니 새날을 받아 새벽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에게도 “한 많은 이 세상 나와 살면서 참 고생 많이 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부친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부인을 향해 “같이 가면 안 돼. 저 어린 손자들이 있는데 저 애들 뒤처리 다하고 10년 뒤에 오라.”고 하였다. 이어 아들 삼형제에게는 “저녁에 안 떠날거니 좀 쉬어라.”고 했다. 부친은 죽음 앞에서 참으로 초연했다. 임종을 앞두고 태연히 향물에 목욕을 하고 수의를 입고 죽음에 대비하다니. 더더욱 저승과 이승의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부친은 운명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족들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가 1989년 음력 7월1일 오전 5시경이었다. 새벽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노환은 백약이 무효였다. 6개월간 백산과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건만, 부친은 끝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백산의 부친이 타계한 날은 비가 몹시도 내렸다. 삼형제는 집에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장례도 치렀다. 백산이 장례 일체를 손수 주관했다. 특별히 보고 배운 적은 없었으나, 입관식과 하관식 등 모든 장례 절차를 집전했고, 운구에도 참여했다. 다행히 발인하는 날은 화창하게 개었다. 이틀 동안 비가 와서인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백산은 믿고 있었다. 생전에 효도는 못했지만, 부친은 틀림없이 하늘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셨을 것이라고. <정성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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