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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⑫ 스리랑카 적통 상좌부 3대 부파 형성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3/21 [08:19]
마하위하라(대사파) 아바야기리(무외산사파), 제따와나(지다림파)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⑫ 스리랑카 적통 상좌부 3대 부파 형성

마하위하라(대사파) 아바야기리(무외산사파), 제따와나(지다림파)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3/21 [08:19]

마하위하라(대사파) 아바야기리(무외산사파), 제따와나(지다림파)

 

오늘날 세계불교는 3대 패밀리라는 대가족으로 발달하였고, 지역적으로도 남.북방 할 것 없이 동서 지역으로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인도 아 대륙에만 존재했던 불교는 아소카라는 불교 대 후원 왕을 만나서 불교가 인도 밖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였다. 남방으로 진출했던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그대로 유지, 발전시켜서 스리랑카가 확고한 상좌부의 종주국이 된 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적통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북방으로 전해진 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나라들인 서역을 거쳐서 중국에 입성하게 되었다.

 

중국에 전파된 불교는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 전파되어 이른바 동아시아 불교라는 전통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티베트로 전해진 금강승(밀교) 불교는 티베트-몽골로 이어져서 그 교세가 막강한 3대 불교 패밀리의 하나로서 달라이 라마라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법왕을 배출시켜서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동등한 위상과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아바야기리(무외산사파)의 다고바(스투파).  

  

남방 상좌부의 적통성을 계승한 스리랑카 불교는 상좌부의 3대 부파가 존속하면서 발전해 왔다. 마하위하라(大寺), 아바야기리(無畏山寺)와 제따와나(지타림,給孤獨)가 정립하여 서로 경쟁하면서 인도 불교의 적통성을 견지해 왔는데, 각 파는 각기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활발하게 성장해온 것이다.

 

초기 부파 불교의 온상이 되어온 아누라다뿌라 왕국은 기원전 437년부터 기원후 1017년까지 1400여년을 지탱한 나라였다. 아누라다뿌라 왕국은 그야말로 불교 왕국과 다름없는 왕국으로서 불교와 함께한 역사였다. 불교가 스리랑카 섬에 전파되면서 12백 여 년 이상을 뿌리박아서 꽃피워 온 상좌부불교의 본산(本山) 역할을 해왔다. 인도에서 이미 불교가 쇠퇴한 상황에서는 인도 불교의 적통 종가로서 센터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인도구법 승려였던 5세기 초의 법현 법사는 물론 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승려들이 찾아와서 상좌부 전통의 불교를 학습하였다. 스리랑카 방문 내용이 그의 구법여행기인 불국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7세기 현장 법사도 스리랑카에는 직접 방문은 안했지만, 그의 대당서역기에서 아누라다뿌라의 상좌부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큰 절이라는 뜻이다. 스리랑카에 최초로 세워진 사원인데 인도 초기 불교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상좌부의 적통종가(嫡統宗家) 역할을 해 온 곳이다. 다른 파인 아바야기리(무외산사파)와 제따와나(급고독파)는 마하위하라 파에서 분파하였다. 아바야기리파와 제따와나파의 분립은 교리 사상적 노선 차이에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도 아 대륙에서 발흥한 마하야나(大乘) 물결에 보다 더 개방성을 갖고 한 때 대승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인도 아 대륙 본토에서 세력을 얻고 있었던 마히사사카(化地部)의 지파가 아누라다뿌라에 설립되었지만, 뿌리가 같은 상좌부였기 때문에 마하위하라파에 흡수되었다.

▲ 인도 모디 수상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가장 오래된 보리수에 의례를 행하고 있다. 이 보리수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보드가야에서 아소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따 비구니가 이식해 온 보리수로서 수령이 2300년이다. 현재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는 이 나무에서 가지를 다시 이식해 간 것이다.    

 

마하위하라(大寺)는 스리랑카 불교의 본산(本山)이지만, 스리랑카를 넘어서서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간직한 상징성으로서의 위상은 가히 절대적이라 하겠다. 데바남삐야 띠싸 왕(재위 기원전 247207) 치세 때 설립됐다. 마하위하라가 상좌부의 적통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기원후 5세기 남인도에서 온 대주석가(大註釋家)인 붓다고사(Buddhaghoṣa,覺音)가 쓴 띠삐따까(三藏)의 주석서와 상좌부 교리서인 위숟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좌부 교리와 사상에 가장 정통했고, 체계적인 학술적 위업을 정립했다고 평가 받기 때문이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마하위하라는 상좌부파의 적통성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구들이 몰려와서 학문을 배워 간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바야기리파와 제따와나파를 능가하여 마하위하라파만이 존속 할 수 있는 근거로서 붓다고사의 저술들이 큰 몫을 했으며 오늘날의 상좌부 교리나 사상에 대한 주석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인도에서의 부파 불교가 18부파로 분열했지만, 상좌부의 적통성을 계승할만한 부파가 중앙아시아나 중국으로 이동하여서 인도 아 대륙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는 곳이 바로 스리랑카이며 스리랑카에서도 마하위하라파이다.

 

오늘날의 미얀마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 상좌부도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의 대사파(마하위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 아 대륙은 물론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비구들이 스리랑카를 찾았던 것은 마하위하라파가 간직한 상좌부의 적통성에 의한 수계제도와 학문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이제 라이벌 격인 아바야기리파(무외산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아바야기리파는 마하위하라파 사원보다는 늦은 기원전 2세기경에 건립됐다. 아누라다뿌라 도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웃따라 위하라(北寺)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왕실사원일 뿐 아니라 금동 청동으로 지붕을 얹은 장엄한 수도원이었으며 화려한 색상으로 유약을 칠한 사원이었다. 도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교한 목욕용 연못, 조각된 난간 및 월장석이 있었는데 아바야기리 사원은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의 5개 큰 사원 가운데 하나였으며 인도 아 대륙에서 이운해 온 부처님의 치아사리도 이곳 아바야기리 사원에 모셔져 있었다.

 

아누라다뿌라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원은 제따와나 사원이다. 이사원은 마하세나 왕(재위 기원후 277304)때 건립된 상좌부 계통의 사원이다.

▲ 122m 높이의 제따와나 스투파.  

  

제따와나 사원의 스투파의 구조는 불교의 대승불교사상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섬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또한 당시로서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 중 하나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당대에는 가장 높은 건물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였다. 사리탑의 높이는 122미터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리탑이 되었다. 11세기에 아루라다뿌라가 남인도의 공격을 받으면서 왕국이 무너짐과 동시에 이 스투파는 정글로 뒤덮이는 운명을 당하고 말았다. 12세기에 이르러서 이 사리탑은 보수되었고 원래 높이에서 낮아진 현재 높이인 71m로 낮아졌다.

 

대승보살의 하나인 성관세음(聖觀世音āryā-avalokiteśvara)에 대한 숭배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스리랑카에서 있어왔으며, 7세기와 8세기에 이르러 대승 수행의 중심은 아바야기리(무외산사)와 제따와나였다. 아바야기리 사원 터에서 8세기의 돌 비문이 발견됐으며 이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져 있었는데 당시 아바야기리 사원 비구들이 산스크리트어를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현재도 스리랑카가 비록 상좌부의 정통 종가이지만, 사원의 승가강원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하고 있음을 볼 때, 빨리어는 물론 산스크리트어도 학습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의 왕들은 종종 보살로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시리 상가보디 1세 왕(재위:247249) 때부터이며 마하삿뜨바(위대한 존재)로 호칭되기도 했다. 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다른 많은 스리랑카 왕들도 보살로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왕의 의무는 때때로 분명히 10바라밀의 수행과 관련이 있다.

▲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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