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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⑱ 남인도불교, 한때 인도불교학 센터 역할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5/02 [08:51]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龍樹), 디그나가(陳那), 다르마키리티(法稱), 보리달마(菩提達磨)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⑱ 남인도불교, 한때 인도불교학 센터 역할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龍樹), 디그나가(陳那), 다르마키리티(法稱), 보리달마(菩提達磨)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5/02 [08:51]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龍樹), 디그나가(陳那), 다르마키리티(法稱), 보리달마(菩提達磨)

상좌부의 붓다고사(覺音), 붓다다타(佛授),담마팔라(護法)등 대소승의 대학승들 활약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불교는 11세기부터 전해진 스리랑카 불교에 기원하지만, 훨씬 이전 세기인 기원전 3세기와 기원후 45세기에 이미 남인도에서 지금의 하() 버마와 태국 남부 지역에 남인도의 상좌부 불교가 전파되었다. 

 

아소카 대왕의 인도 아대륙 통일로 인도 전역은 물론 인도 아 대륙 외 지역에도 불교 전도승을 보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런 전도 프로젝트가 실시되면서 인도 아 대륙 거의 전역에는 불교가 전파되었었다.

▲ 인도 아대륙과 동남아시아와의 지정학적 관계 지도. 

 

인도 동북부에서 출현한 불교는 북서부로 향하면서는 그리스계 왕국들과 물리적 사상적으로 충돌하면서 결국에는 대승불교가 형성되어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거쳐서 중국에 전파되었다. 반면 남쪽으로 남진하던 불교는 인도 본토의 동남부인 지금의 안드라프라데시 주, 타밀나두 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로써 인도의 상좌부 부파는 이들 지역과 스리랑카 섬에서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유지했다.

▲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걸쳐 건립된 사원과 스투파 유적, 현재의 아마라와티의 모습.   

 

남인도는 일찍부터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했으며 힌두교와 불교가 동시에 전파되었다. 남인도에도 석가 부처님이 직접 내왕했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힌두교가 인도 북부의 아리아인의 종교이지만, 남쪽 지역에 전파되면서 비 아리아인들인 드라비다인의 종교가 되었듯이 불교도 인도 남부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남인도에서 불교가 융성했었고 문화예술이 꽃피웠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비구들은 구도적 수행에 몰두했으며 대중을 향한 부처님의 법을 전파하는데 노력한 것은 현저한 일이었다. 불교사원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배움의 장소이자 정신적 힐링의 귀의처로서 역할을 했다. 불교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료함을 달래는 고도의 문화 활동이었다.

▲ 고대 남인도에서 한 때 대승불교가 유행했던 나가르주나콘다 불교사원 유적으로서 본래 있던 나가르주나 사가르 댐 위치에 있던 유적을 이동했다.  

 

▲ 나가르주나콘다 불교 사원이 있던 곳은 댐을 건설했다. 큰 인공호수가 되어 배로 이동해야 나가르주나콘다에 갈 수 있다.    

 

고대 남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은 아마라와티, 나가르주나콘다, 바티포롤루, 자꺄페타 사원 등이었다. 왕실과 일반 불자 대중의 후원으로 아마라와티와 나가르주나콘다 불교사원 유적에 있는 비문들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남인도의 모든 비문들은 브라흐미 비문들이며 불교도와 관련되어 있다. 

 

나가르주나콘다 불교사원은 한 때 대승불교가 수용되었으며,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가르주나(용수)라고 하는 중론학파의 창시자가 주석했던 곳이다. 디그나가, 다르마키리티, 보디달마가 다 이곳 출신들이다. 붓다고사, 붓다다타, 담마팔라 등이다. 

 

한때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불교는 대중들의 마음에 와 닿아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때문에 브라만들은 불안해했으며 불교 흥성의 흐름을 막기 위해서 힌두교의 의례를 개혁해야 할 정도로 대중 영합의 개혁을 단행할 정도였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불교는 결국 브라만교에 주류 종교의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불교사원은 힌두교도들에 의해 힌두사원으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현재 카르나타가 주에 있는 남드롤링 티베트 사원대학에는 1만여 명의 티베트 라마들이 공부하고 있다.  

 

남인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교사원은 이런 비극적인 일을 당하고 말았는데, 지금도 한때 불교 성전이었던 사원과 불교관습과 전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불교사원 기둥은 힌두교도들에 의해서 링가의 대용이 되었으며 심지어 불교사원 기념물이 힌두사원 건축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라와티의 아메레사와라 힌두사원은 본래 불교사원이었다.

▲ 불교사원에서 힌두사원으로 바뀐 아마레샤라. 

 

불교사원에서 힌두사원으로 바뀐 아마레샤라 사원은 불교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으며, 한 때는 불교학 중심 센터로서 인도 아 대륙은 물론 스리랑카 동남아시아에서 유학승들이 와서 머물렀다. 남인도 불교학 연구의 역사는 인도불교학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사타바하나(안드라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후 225년까지)제국에서 활동했던 학승이었다. 

 

나가르주나는 사타바하나 제국의 야즈나 스리 사타카르니 왕의 왕사였으며, 나가르주나는 대.소승(大小乘)을 함께 닦는 사원에 주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이곳의 대중부 불교(마하상기카)의 분파 사원에서 거주했으며, 대중부는 차차로 대승불교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구마라습의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에 의하면 용수는 인도 남부의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용수는 당시 불경 기록의 주된 언어였던 빨리어 대신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용수는 불교의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중관(中觀·Madhyamaka)을 주창하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중론(中論)을 통해서 주장했다. 용수는 중론에서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공()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그는 절대적인 무(·없음)라는 관점에서 공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는 연기론의 관계에서 공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공·연기·중도는 모두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가르주나의 학통을 계승한 디그나가(진나480년경~540년경)는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인명학(因明学)이라는 새로운 불교논리학을 확립한 유상유식파(有相唯識派)의 불교사상가이다. 불교인식론에서 무상유식파(인식의 주관·객관은 찰나적 존재)와 유상유식파(외부세계 지식의 유사성에 의해 존재)의 논쟁은 유식연구의 흐름에서 큰 획을 긋는 사상적 대립이다.

▲ 사타바하나 제국은 로마제국과도 무역을 교류했다.    

 

대승불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사상 흐름 중에는 모든 존재의 실상을 관찰할 때에 이들의 양쪽의 극단을 지양하거나 그 자체를 떠나서 진실한 모습을 설하는 이른바 중관론과 함께 모든 현상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마음속으로 인식하거나 추측한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유식론의 전개가 그 대의를 이루고 있다. 

 

마음에 나타나는 형상에 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서, 그 형상이 주관과 객관으로 통합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감각된 그대로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두 학파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 타밀나두의 칸치뿌람에 있는 현대차 공장.

 

디그나가는 남인도의 브라만 출신으로 처음에는 부파 불교(상좌부 불교)의 독자부(犢子部)로 출가하였다가 후에 대승불교로 전향, 세친(世親) 아래서 유식학과 논리학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 전통은 인도 논리학 최고봉이었다고 평가받는 법칭(法称, 다르마키르티)에게로 이어졌다. 

 

다르마키르티는 6, 7세기경의 인도의 불교 사상가이다. 오늘날의 인도 데칸 지방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 유학하러 온 중국 당의 승려 현장이나 의정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는 디그나가(진나)의 저서인 집량론(集量論)을 주석하였다. 

 

상좌부의 붓다고사, 붓다다타 담마팔라는 상좌부의 대 주석가로 활동한 학승들이다. 중국에 선을 전한 보리달마 또한 남인도 칸치뿌람 출신이다. 이처럼 남인도 불교는 사실상 인도 불교학을 대표하는 대학승들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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