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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⑲ 남인도 불교 상감문학에 영향 받아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5/09 [07:53]
드라비다인의 정신과 철학, 문학은 아리아인의 베다문학과 상이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⑲ 남인도 불교 상감문학에 영향 받아

드라비다인의 정신과 철학, 문학은 아리아인의 베다문학과 상이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5/09 [07:53]

드라비다인의 정신과 철학, 문학은 아리아인의 베다문학과 상이  

남인도 불교 동남아시아에 전파, 지금은 11세기 스리랑카 상좌부전통에서

 

모든 종교사가 다 그렇지만, 그 한 종교의 역사를 고구하려면 사상 정치 사회 등 여러 층의 다각적인 연구에 의하여 종합적인 판단이 내려져야 그 한 종교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남인도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불교가 상좌부 불교 전통일색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11세기 스리랑카 상좌부가 전해지기 전 까지는 남인도에서 전해진 상좌부 불교부파나 대승불교 등이 하 버마 타이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에 전파되었다.

▲ 인도불교는 북쪽으로 육상 실크로드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전해졌으며, 남방 쪽으로는 인도 남부지역과 스리랑카로 전파되었고, 해상 실크로드 시대에는 남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지금 담론을 하는 것은 남인도에서 불교가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본격적인 담론에 앞서서 지난 회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남인도 불교가 한때 불교 센터 역할을 했는데, 불교 이전의 남인도 정신사를 먼저 한번 일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인도는 인도 북부의 아리안 족과 그 뿌리가 다르다. 현재도 인도를 가보면 북부와 남부는 전연 다른 나라처럼 서로가 언어도 다르고 문화 습관 등 모든 것이 다르다. 인종 언어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정치.경제적으로는 하나의 인도이지만, 인종 문화 언어적으로는 전연 다른 풍토로 받아들여진다.

 

남인도의 정신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상감 문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일별할 필요가 있다. 상감(sangam)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상가(sangha)인데, 불교의 공동체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원래는 쿳탕이라고 해서 함께 모임을 뜻했는데, 상감으로 부르고 있다. 상감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타밀의 학자 시인들의 집회(集會)를 말하는데, 마두라이가 그 중심이었다.  

▲ 타밀왕국 빤댜국의 수도로 상감문학의 본거지였던 마두라이는 힌두교의 성지로 변모하였다. 스리 미낙시 암만 힌두 사원의 위용.  

 

마두라이는 옛 타밀 왕국인 빤댜국의 수도였으며 그 역사는 2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5백년 경부터는 중요한 상업 중심이 되었다. 타밀 전설에 따르면, 상감 시대는 초기, 중기, 후기로 분리되는데,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초기와 중기는 역사성이 희박한 신화시대로서 분리하고 후기부터를 역사시대로써 분리하고 있다. 후기 상감 시대 때 타밀라캄 지역은 빤댜, 체라, 촐라가 다스리는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타밀라캄은 타밀족이 거주하는 지역인 타밀나두, 케랄라 등을 통틀어 일컫는 역사적 지명이다. 스리랑카 타밀족이 거주하는 타밀엘람 지역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때문에 한 때 스리랑카 섬에는 타밀족의 분리 독립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바 있다.

▲ 타밀일람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스리랑카 북동부의 타밀인들이 스스로의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소탕되었으나 잠재된 상황이다.  

 

상감 문학은 초기 타밀 문학의 형태로, 통상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고대 타밀어 문학이다. 상감 시대에는 톨카피얌등의 언어학과 시학을 아우르는 서적과 실라파티카람을 비롯한 타밀 5대 서사시 등이 탄생하여 문학이 크게 융성하였다. 상감 문학 시대 이후의 타밀어 문학사는 교훈서, 종교서, 서사시 등이 발달한 후, 상감 시대부터 촐라 제국의 번성에 힘입은 중세 시대,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 시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과의 접촉으로 시작된 근현대 시대로 나뉜다. 이런 문학적 전통을 지니고 있었던 남인도의 정신사적 풍토에서 불교는 학술적으로 꽃을 피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는 도교나 유교와 사상적으로 충돌하면서 중국불교라는 인도불교와도 다른 성향의 불교전통을 확립했다. 마찬가지로 남인도 불교는 기존의 상감문학과 충돌하면서 정착했던 것이다. 전회에서 이미 인도불교의 대() 이론가들을 열거했지만, 이런 상감문학 전통이 없었다면 남인도 불교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를 추리해볼 수 있다.

▲ 인도 신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신통을 지닌 아가스탸 시다 투산선인(投山仙人).  

 

인도 종교에서 시디는 성취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성취자란 육체적 정신적 성자를 말한다. 불교용어로서도 실지(悉地)란 말이 있는데 명상과 요가를 통해서 신통을 얻은 완성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남인도 문화에서의 시디는 신선이면서 최초로 자연의학을 다루는 중국의 화타나 한국의 허준 같은 인물이다. 상감문학에서 시디는 시조(始祖)와 같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불교가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상감문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시디(선인)를 수용한 것이다. 이처럼 남인도는 북부 인도와는 다르게 독자적인 문화를 오래전에 이미 형성해서 갖고 있었으며, 이런 문화적 바탕 위에서 불교가 성숙되어 갔다.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서 남인도는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팔라바국(275년부터 897년까지) 시기에 불교는 융성하게 발전 했다. 팦라바국은 남인도 지역을 지배했던 고전기 인도의 왕국으로서 마헨드라바르만 1세와 나라심하바르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강국이 되었으며, 9세기 초까지 텔랑가나와 타밀나두의 북쪽 지역을 약 600년간 지배하였다.

▲ 그림으로 표현하는 붓다고사(상좌부 대학승), 디그나가(대승 이론가) 파드마삼바바(금강승), 보디다르마(중국 선종 초조)는 남인도 칸치푸람과 관련이 있다.    

     

팔라바국은 타밀나두 주의 칸치푸람에 수도를 두었으며 불교는 물론 힌두교의 흥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인도아리아 문화를 남부에 전파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인도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힌두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인도 구법승 현장법사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현장법사는 칸치푸람을 직접 방문하여 힌두교와 불교의 건재함을 목격했다. 힌두교도들의 말 () 희생제 의식과 베다종교의 다른 여러 가지 희생제의를 목격했다. 또한 그는 관용의 종교인 불교도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는데 이 지역에 100여개 사찰이 있고, 칸치푸람에만 80개의 불교사원이 있었으며 1천여 승려가 있음을 확인했다.

 

컨치푸람에는 상좌부, 대승, 바즈라야(금강승, 밀교)가 다 수용된 불교학 연구의 센터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현장법사는 "그곳 사람들은 용감하다. 그들은 정직과 진실의 원칙을 깊이 간직하고 학문을 매우 존중한다. 그곳의 승려들은 대승에 속했고 스타비라(상좌부) 율법을 수행했다.” 라고 했으며 현장법사는 또한 약 80개의 데바(힌두) 사원과 많은 니르그란타(자이나교)가 있다고 보고했다. 대승불교는 14세기 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 달마대사의 고향인 남인도 칸치푸람 경찰서에 보관중인 불상. 

  

나는 그동안 중국에 여러 차례 다니고 이곳저곳 사찰도 제법 많이 방문해 봤다. 광동성 지역과 광주시 방문에서 인도(실론) 불교의 중국 전파인 해상실크로드 불교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몇 개월의 남인도를 중심으로 여행을 끝내고 광동성 방문을 하게 되어서 더욱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인도여행에서 타밀나두의 칸치푸람을 직접 방문, 달마대사에 대한 기록이나 행적을 추적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달마대사의 고향으로 알려진 칸치푸람은 타밀나두 주도(州都)의 첸나이에서 3시간 정도 가는 거리였다. 지금은 힌두교 일색이었고, 불교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힌두교의 성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성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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