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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05/17 [08:41]
하나님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 아닌 오직 세미한 소리로 역사하신다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 아닌 오직 세미한 소리로 역사하신다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05/17 [08:41]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인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1:1-4)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있어왔고 늘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은 늘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절의 말씀은 우리가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

 

듣는 일은 지키는 일보다 우선합니다. 지키는 것은 듣는 자들에게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듣는 일에 너무 무감각합니다. 듣고 이해는 하지만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듣고 깨달아야 삶에 변화가 나타나고 실천이 되는데 허공에 외쳐지고 소리처럼 사라져 버리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1)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브두엘이 누구이며 요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요엘이라는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이름이 이렇듯 영적이라면 그의 가정은 깊은 신앙의 가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사용한 신앙고백적 이름이기에 우리는 그 가문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의 분위기를 우리는 이름하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왜 이름을 거명해 두고 있을까요? 그 이름을 나타내 그를 드러내고 싶은 의도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요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아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꼭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이라면, 혹 거짓 선지자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오직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는 점입니다.

 

그 말씀이 누구의 말씀이며 어떤 말씀인가 보다 누가 말씀을 전하느냐에 집중합니다. 그가 어떤 배경의 사람인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이 우리의 눈에 아무리 중요하고 커보여도 우리는 사람을 중시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중시해야만 합니다.

 

영어 성경은 원어적인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word of the Lord that come to Joel son of Pethwel." 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요엘에게로 와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스스로 만들어 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하고 그 은혜에 잠겨 그가 주시는 말씀만을 전달하는 진정한 기별자인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시기에 하나님은 요엘의 모든 배경도 감추어 버리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마음이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로 집중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보고 듣는 노력을 키워가셔야만 합니다.

 

모든 백성이여 들으라 (2)

 

2절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 대상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들음의 요청은 모든 백성들인데 일반 백성들보다 먼저 늙은 자들, 즉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찌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엘서가 기록된 시기는 정확한 연도를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전인가 이후인가에 대한 주장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 두 시대가 공히 지도층의 영적 리더쉽 부재를 나타내고 있고, 이에 대한 지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엘서 전체에서는 지도층에 대한 지적을 하면서도 왕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볼 때 포로기 이후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멸망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완전한 영적 회복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도 문제가 가득해서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도 백성들을 되돌려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분위기 속에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라는 촉구를 직역하면 귀를 달라는 표현으로 설명될 만큼 깊은 탄식과 회개를 요청하는 열망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공동체에서 영적으로 심각했던 상황에서는 항상 이런 모습이 있어왔고, 이런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이 주실 기별은 이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너의 귀를 내게 달라는 부탁입니다. 모두가 악의 길을 간다할지라도 듣는 자만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자는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와 비교하여 디지털 시대는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시대의 영적 비극은 내가 듣고 싶은 하나님의 소리를 골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귀에 거슬리면 얼마든지 채널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계도 단절할 수 있고 교회도 옮길 수 있습니다. 강단에서 책망의 소리가 습관적으로 선포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예 그런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귀는 내 마음대로 열고 닫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귀는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비극 중의 하나는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마리아나 해구인데 가장 깊은 곳이 11,034m 11km 깊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나 해구 주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혼여행 많이 가는 사이판, 괌 같은 섬들이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나 해구 위를 배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바다의 빛깔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입니다. 에베레스트 산(8,850m)도 여기에 빠지면 못 건진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마리아나 해구의 깊이를 잴 수 있는 물건은 사실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압으로 인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납작하게 짜그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아닌 전파로 깊이를 측정하지요.

 

수심가측(水深可測)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으나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뼘도 안 되는 사람 속은 모르겠다는 속담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에도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이만큼 입니다. 마음이 깊을수록 그 존재가 크고, 마음이 얕을수록 그 존재가 미미합니다.

 

내 마음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침묵입니다. 침묵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일수도 있고, 말씀일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더 바빠진 그리스도인일수록 이런 삶의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재앙의 소리를 들으라(3,4)

 

2절 후반부부터 시작하여 4절까지 하나님은 재앙의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재앙의 소리를 그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재앙이 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재앙에 대한 예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의 소리를 재앙과 동시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재앙은 늘 미루며 연기되었고, 예고는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재앙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그래도 이행되었습니다. 영적 타락과 재앙은 결코 무관한 적이 없습니다. 지도층의 부패와 일반 백성들의 무기력함은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정화 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게 합니다.

 

재앙은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마지막 도구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만의 사건일 수 없으며 대대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1:3,4)

 

여기에 나오는 재앙에는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앙의 긴박성입니다.

둘째는, 재앙의 확실성입니다.

셋째는, 재앙의 완벽한 파괴성입니다.

 

깨닫고 뉘우치며 돌아서지 않으면 재앙은 긴박하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찾아올 것이며, 그 재앙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하게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대의 거울로서 지금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어느 시대 어떤 공동체라 할지라도 동일한 모습으로 역사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식한 것도 죄고, 아무 생각 없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을 학살할 때 독일인들 대부분은 그냥 그게 맞나보다하고 구경만 했습니다. 그리고 학살에 관여한 나찌의 지도급 인물들, 중간관리자들, 일반 병사들 모두 단지 총통의 명령이니까 별 생각없이 임했습니다. 학살의 총책임자중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결국 잡혀서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독일계 유태인 학자 한나 아렌트가 저 악당의 정신상태는 도대체 어땠을까 궁금해서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해봤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천하의 악당 아이히만이 의외로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더란 것입니다. 그 역시 그냥 히틀러 치하의 다른 보통 독일인처럼 별 생각 없이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었습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핵심 인물의 정신상태가 그토록 평범했다는 사실은 아렌트를 놀라게 합니다. 그녀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라는 용어로 정의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자기도 모르게 큰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사회적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의 예고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요엘서 전체를 보자면 메뚜기 재앙은 후에 닥칠 국가적 위기의 전조와 같습니다. 6절 이하에서는 이민족의 침략을 4절이 말하는 메뚜기 재앙의 모습과 흡사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팟종이와 메뚜기와 늣과 황충은 똑같은 메뚜기 종류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남은 것이 없이 다 사라져 없어질 재앙의 결과입니다. 아직 이 재앙이 백성들 앞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예고되어야 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말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훈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왜 이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우리에게 지금 이런 재앙이 왔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재앙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앙의 위험이 너무도 많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대의 마지막은 영적 타락에서 결정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임할지,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쓰라린 경험이 또 한번의 경험이 될 수 있음을 우리의 자녀에게 고하며 영적 각성을 해야 합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어 치우는 이런 심각한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음을 심각하게 염려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뿌리에 우리의 영적 현실이 자리잡고 있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눈의 종교이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 귀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은 보는 신앙이 아니고 듣는 신앙임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12:38) 무엇인가를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12:39)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12:41). 듣고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듣고 회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기독교는 듣고 믿는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보고 믿는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자꾸 뭔가를 눈앞에 보여 달라고 한다는 것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처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자 갑자기 온 산을 뒤집을 듯 엄청난 태풍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큰 지진이 나서 산을 쪼개버릴 것 같더니, 또 이어 맹렬한 불이 일어나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태풍, 지진, 화산폭발 가운데에 하나님이 안 계셨습니다.

 

그런 일이 다 지나간 후에 세상이 잠잠해지자 세미한 소리가 엘리야에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현상 속에서 역사하지 않고 오직 세미한 소리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표적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미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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