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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사상과 오도송지(上)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7/13 [07:45]
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6세기의 자화상이며 축소판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사상과 오도송지(上)

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6세기의 자화상이며 축소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7/13 [07:45]

<연재순서>

()원효의 생애와 사상-불교 토착화시킨 종교 다원주의자

()원효 화쟁사상의 특징-정토 신앙과 유불선 삼교의 회통

 

원효의 화쟁주의는 세계사상에 도전하는 동양 정신의 종합된 표현

 

원효의 화쟁사상은 붓다가 활동하던 인도 사회에서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한(Aryans)의 종교는 자기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한 참된 종교라는 배타적 광신은 없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사유 경향이 붓다에게 이어져 불교에서 의 사상을 있게 하였다. 붓다에서 싹이 나타났으며 붓다 이후 1200여 년 만의 신라 통일기에 나타난 원효가 실천을 중시하면서 화쟁사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붓다 이후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이다.

 

원효는 화합과 통일의 사상, 조화와 평등의 원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주장으로 갈려 있는 불교 이론을 화쟁하며 왜곡된 불교 풍토를 쟁화(諍化)하려 하였다. 이처럼 간절한 염원이 담긴 화쟁적 논리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 상황 속에서 마치 불난 집처럼 온갖 갈등과 대립과 모순과 아집으로 가득 찬 현실사회를 구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기(和氣)를 불어넣고 조화회통(調和會通)의 대도를 열어 이 동녘 해돋이 땅에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무애한 원력을 발하였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까지도 화쟁하려 하였던 원효불교의 이상은 실로 심물일원(心物一元)에 있고 개전불이(個全不二)에 있으며 나아가 심주물종(心主物從)의 세계를 추구하고 심체물용(心體物用)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도 원효의 화쟁주의는 세계사상에 도전하는 동양 정신의 종합된 표현이며 따라서 그것은 유현한 동양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이론이 아니고 실천행이었던 화쟁론이야 말로 매우 진보적인 사상인 까닭에 그것이 이 시대에 충만할 때 물질 우위, 인간비하의 정신풍토는 치유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인류사회의 영원한 평화는 성취될 수 있다.

 

화쟁사상은 단순히 화해이론이 아니라 견해들의 차이를 모아놓음으로써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소통이론이라는 관점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효가 화쟁이라는 말로써 풀어보려고 했던 문제 상황은, 단지 교설에 대한 다른 견해들의 존재라기보다 다른 견해들의 배타적 대립과 불통이라는 이견(異見)들의 비생산적, 소모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6세기의 자화상이며 축소판 

 

사람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무오류성이다.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신만이 옳다는 주장을 자기 확증 편향성이 강하다. 이와 같은 개인적 성향이 집단을 형성하면 자신들과 다른 견해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원효에게 있어 화쟁은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융합하되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양성의 조화가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이나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극혐주의가 화쟁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원효의 화쟁을 통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성향은 원효가 아닌 자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원효는 이와 같은 극단적 성향을 보이는 개인과 집단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권하고 있다. 그것이 화쟁의 출발이다. 논쟁에서 논쟁으로 가는 것을 막고,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원효가 주장하고 있는 화쟁은 단순히 화해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서로 다르다고 해도 모두 가치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교설로 인해 다툼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던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모든 사상적인 문제 간의 갈등에 대한 화쟁의 해답에서부터 출발한다.

 

원효의 화쟁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에 치우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함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원효가 생존했던 6세기는 한반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 모든 전쟁의 끝은 승자와 패자였다. 그 사회를 살았던 원효의 화두는 화합이며 평화다. 그것은 다툼이 아닌 화쟁을 통해 주장했다. 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축소판이다.

 

원효의 1차 대당 유학 길을 육로를 통해 시도한 것과 관련 고구려의 고승 보덕과 학문적 교류를 주장하고 있다. 당시 육로는 신라 승려 원효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선택지였다. 그러나 10여년 후 6612차 대당유학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바다길이 확보되었다.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으로 혼란스러운 육로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로를 택하게 된다. 그의 깨달음은 예상치 못한 비바람이라는 자연환경에 의해 잠시 멈추게 된다. 그리고 몸을 의탁했던 주변환경에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식이다.”는 원효의 오도송은 수행 가운데 이룬 성취가 아니리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에 나온 것이다. 오도송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한 순간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현상에 대한 자기 만족이라면 원효에게 오도송은 이 땅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통해 사회 속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효의 생애와 사상...한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불교 토착화시킨 종교 다원주의자

 

원효는 한국불교 사상사 뿐 아니라 한국 사상사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남긴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승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있다. 원효의 생애와 관련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그가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경산시는 그가 출가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집을 사찰로 변경했다. 법사가 이미 출가하고 그 집을 희사하여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사라사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기록과 달리 원효의 부인 요석 공주가 몸을 풀고 아들 설총을 낳은 탄생설화가 존재하고 있다.

 

의상과 함께 떠난 유학길에서 그가 포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깨달음의 오도송지 역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와 관련 최근에는 경기도 화성, 평택 등 원효 당시 대당 무역선의 뱃길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연구방법은 자신들의 지역이라는 전제 이후 장소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지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줄 논지가 필요하다. 원효가 꼭 이곳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끼워 맞추어져야 하는 불행한 접근이다. 이런 지역주의, 관 주도 연구 방법론의 제시는 일부 학문 장사꾼들과 애향심이 많은 이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들의 대전제는 원효와 의상이 <> 자신들의 지역에서 비를 피해 며칠을 머물렀고 그사이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남겨야 한다. 학자는 그 주장에 온갖 이론적 배경을 제시해야 한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 오래 살았다는 촌로가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혹은 동네 어른들에게서 어렸을 적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그 근거이다. 그들이 이곳에 정착 시기를 따져보아야 한다. 단순히 2~3대 혹은 당대 어린 시절 이주민이라면 지역의 변화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물론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았던 인물에 대한 기록에서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인 확증이나 논증 자료 없이 구전되는 내용과 정황적 근거로 자신들의 논지를 주장은 방법이다.

 

원효는 우리 민족이 불교를 받아들인 지 1백 년에 만난 가장 뛰어난 불교 사상가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불교 토착화시킨 종교 다원주의자다. 불교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 정신을 신라통일의 대업에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 경주박물관의 고선사 서당화상탑비. 경주 고선사에 머물던 원효스님이 마당의 못에 있던 물을 퍼 서쪽으로 부었더니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이야기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한다고 고선사(高仙寺)의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에 기록되어 있다.   

 

원효(617-686, 진평왕 39-신문왕 6)는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스님이 세상을 떠난(686) 1백 년 후에 세워진 경주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처음 전하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스님의 자료는 삼국사기46 설총 전, 삼국유사4 원효불기조, 그 외 낭지승운보현수, 사복불언, 의상전교, 이혜동진, 낙산이 대성 관음 정취 조신, 광덕 엄정조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중국 측 자료로는 송고승전이 있다. 그의 저서로 대략 100여 종, 240여 권(또는 85170여 권)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가 있다.

 

원효(元曉)에서 원()은 첫 새벽, ()에는 깨닫는다라는 불교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고유의 순수한 이두식 발음인 새 발(始旦, 새벽)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으로 부처를 빛나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蓋初輝佛日之意爾) 하였다. 그의 아명은 서당(誓幢)인데 당()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서동은 새털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에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는 구세(救世)에 참뜻이 있었다면 원효의 출가는 이를 현실사회에서 실천하고 활용함으로써 부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숭고한 뜻을 지니는 큰 걸음이었다.

 

스님의 나이 70이 되던 해 330일 서라벌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혈사(穴寺)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고 입적(入寂)할 때까지 줄곧 만행의 길을 밟으며 유연 무연의 중생을 찾아 나서되 바른길을 벗어나는 등 많은 기행을 연출한 만큼 다양한 일화가 있다. 기연(奇緣)도 적지가 않았다. 이런 신묘한 설화도 그러한 그것 중의 한 사례일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원효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먼저 그가 세상을 떠난(686) 뒤 약 1백 년 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나타나 있는 글귀를 들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뒤늦게 발견(1914)되기는 했지만, 원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화쟁 사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어놓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의미가 있다.

 

일연은 그를 평하기를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이 없이 혼자 공부했다. 그의 유방(遊方 스님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함)의 시말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자취들은 당 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올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쓰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 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우리나라 고대사 더 나아가 우리 역사 원형의 다양한 존재가 모두 모여 하나로 엮어내는 장엄한 것이며, 유교와 불교, 국가와 사회 지배층과 민중이 계급과 분파를 달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닌 전통적 공동체적 생활에 토대를 둔 것으로 인식한 편집 의도와 무관치 않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19세에 출가하였으며 그는 특별히 스승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효의 학문 범위는 불교학을 넘어 유가의 경전인 논어는 물론 노장사상의 도덕경, 장자등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고려 시대 생존한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는 고구려 고승으로 백제 땅인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간 보덕 화상을 찾아 열반경, 유마경을 배운 것을 열반종 계 승려로 분류되기도 한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낭지, 혜공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나눈 것으로 되어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붓다가 활동하던 인도 사회에서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한(Aryans)의 종교는 자기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만나는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유일하고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한 참된 종교라는 배타적 광신은 없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사유 경향이 붓다에게 이어져 불교에서 의 사상을 있게 하였다. 붓다에서 싹이 나타났으며 붓다 이후 1200여 년 만의 신라 통일기에 나타난 원효가 실천을 중시하면서 화쟁사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붓다 이후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이다.

 

원효의 화쟁은 붓다 사상의 완성이다. 다시 3백 년이 흐른 고려 시대에 이르러 일연에 의해 엮어진 <삼국유사>의 기록이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한 사료로 꼽아왔다. 이와같은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에는 화쟁론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고려 숙종 6(1101) 8월 의천의 병이 위독함에 왕이 친히 위문했다. 그 자리에서 의천은 왕에게 원하는 것은 정도의 중흥이온데,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 가서,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외호하여 유교에 부응토록 하시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숙종이 의천을 위문했던 바로 그달에 원효에게 <화쟁국사> 호를 추종했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평하기를 백 가지의 소나무에 나투었다.고 표현했다. 화엄경의 수행단계는 52위가 있다. 그 가운데 10가지의 초지가 환희지이며 이 환희지에 이르면 몸을 자유자재로 하고 이것을 성위지라 한다. 팔방미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지 보살의 경지는 우리를 보통 사람 중생에게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 며느리, , 아내 등 한 사람에게 이름 붙여지는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우리는 초지 보살이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1075-1151, 문종 29-의종 5)은 화쟁국사영찬을 지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넓고도 넓게 이룩한 도

막힘 없이 활달한 그 말씀

듣는 이 근기 따라 각각 다르니

크고 작으며 얕고 깊다네

세 배에 비친 달과 같고,

일만 구멍의 바람과 같네

지인은 크나큰 거울이라

다른 것으로 일치가 되네

유가의 명상이며

방광의 원융이로다

나 스스로 도를 봄에

통하지 않는 법이 없도다.

온갖 냇물이 넓은 바다 이루고

만 가지 모습은 하나의 법일세

넓고도 큼이여

이름 지을 수 없구나

 

이규보(1168-1241)는 종령수좌(宗聆首座)가 소장하고 있던 소성 거사 진영을 보고

 

머리를 깎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두고 건을 쓰면 소성 거사로다

온갖 몸으로 헌신해도 알아보기 쉬우니

두 모습 가졌으나 한바탕 연극인 것을

동문선,50권 소성거사 찬

 

조선 시대 김시습(1435-1493, 세종 17-성종 24)은 분황사의 화쟁국사비를 보고 무쟁비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신라 이승 원욱씨가

머리 깎고 신라의 저자에서도 행한 것을

당에서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승려와 세속인 구분 없이 여염에 행하였네

거리의 아이와 여인들 쉽게 얻게 되니

누구 집 누구 아이라 손짓으로 가리켰네

그러나 몰래 크나큰 무상을 행하여

소 타고 법을 연설에 종지를 해석했네

여러 경의 소초들 책궤에 가득하니

후인들 그를 보고 따르기를 다투었네

국사로 추봉하니 그 이름 무쟁이라

저 비석에 새긴 것 퍽이나 칭찬하였네

비석 위의 금자는 번쩍번쩍 빛나는데

법화와 좋은 말도 역시 기뻐할 만하여라

우리 역시 잘 변하는 도당이라

환어에 대하여도 대강은 알았다네

다만 내 옛것 좋아해 뒷짐 지고 읽지만

이 서쪽에서 오는 조사 보지 못했어라.

 

대체로 원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이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료와 함께 현존 되는 약 20여 종에 이르는 그 자신의 저술이 원효사상 내지는 화쟁주의를 조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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