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㊼ 실론에서 배운 불교, 다시 돌려줘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11/21 [08:50]
태국 비구 25명 스리랑카에 파견, 태국승가 시암 니카야 설립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㊼ 실론에서 배운 불교, 다시 돌려줘

태국 비구 25명 스리랑카에 파견, 태국승가 시암 니카야 설립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11/21 [08:50]

태국 비구 25명 스리랑카에 파견, 태국승가 시암 니카야 설립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불교사를 관통해 보면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빈번하다. 종교는 신앙을 근본으로 한다.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일들이 이루어진다. 맨정신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신앙이 집단화되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됐지만, 불교의 본고향인 인도에서는 불교가 한 때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인도 밖으로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아소카라는 불교도 왕이 불교를 전파하는 원력을 세우고 여러 지역으로 법음(法音)을 전파하였기에 오늘날 불교는 돌고 돌아서 다시 인도로 원점 회귀하고 있다.

▲ 공중에서 바라본 아유타야의 왓 차이왓차나람 사원 전경.

 

지금 담론을 하고 있는 실론(스리랑카)와 태국의 불교 주고받기의 전말도 이런 종교적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실론이 인도 불교의 원형성을 태국에 전파해 주었고, 태국은 불교의 맥이 사라져 가는 실론에 불교를 다시 전파해 줬다. 그러므로 현재 실론의 불교는 자신들이 전해주었던 불교를 동남아시아에서 다시 전해 받은 것이다. 인도 원형불교의 전통과 맥이 현재는 동남아시아의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태국 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불교 왕국이었던 수코타이가 무너지고 우통 왕(재위:13491369)에 의해 아유타야 왕국이 건설되면서 권력 중심축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수도인 아유타야는 많은 사원과 삼림수도원이 있는 불교의 주요 중심지였다. 아유타야 왕국은 권력 교체를 했지만, 불교문화는 수코타이와 크메르에서 그대로 수용하여 채택했다. 우통 왕은 라마티보디 1(1314~1369, 재위 13491369)로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의 창건자이다.

 

1347년경 수코타이 왕조의 속주(屬州) 우통을 영유하고 있다가 그 땅을 버리고 남쪽 메남강() 중의 한 섬에 아유타야 왕조의 새 도읍을 건설했다. 그는 1349년에 즉위하여 라마 티보디라 칭하였다. 왕은 수코타이 왕조의 쇠퇴를 틈타 그 영토를 잠식하고, 1352년에는 캄보디아의 쇠퇴를 틈타서 그 국도를 함락시켰다. 또한 탁월한 입법자로서 타이국() 최초의 법률 편찬자이기도 하다.

 

태국불교역사는 한번 전해진 불교가 탄압을 받지 않고 그대로 지속된다는 점이다. 수코타이에서 아유타야로 왕조는 바뀌었지만, 불교는 그대로 왕실의 신앙이 되었다. 왕과 왕실은 불교를 후원했다. 그런데 옛 왕조에서 후원했던 승단보다는 새로운 승가를 원했다. 그것은 태국의 승려들이 실론에 가서 불교를 배워 와서 승단을 새롭게 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인드라라자 1(1422년경)의 통치 기간 동안에 스리랑카에서 수계를 받은 태국 승려 그룹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말하자면 실론 유학파 비구들에게 호응해서 보다 개혁되고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유지한 승려 그룹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승가 그룹을 와나랏트나봉이라 하여 신파(新派)의 의미를 갖는다. 이 신파는 기존의 승가보다도 더 엄격하고 혁신적이었다. 그전의 부파를 랑카봉(실론종)이라고 했다면, 이제 새로운 신 유학파 비구들에 의한 승가를 와나랏트나봉(신실론파)이라고 호칭하면서 실론불교의 당대 최근 전통을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불교 문화는 수코타이와 크메르 요소를 모두 채택했다.

▲ 아유타야 시대의 왓 마하탓 사원.

 

아유타야 시기에 불교가 주류 종교였다고는 하지만,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의 많은 요소는 힌두교 전통에서 통합되었으며 수많은 의식이 브라만에 의해 수행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또한 대승불교, 이슬람교, 천주교를 신봉하는 소수 종교의 고향이기도 했다.

 

아유타야 시대에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전통은 삼림 불교수행이다. 말하자면 이런 삼림 수행 전통이 바로 실론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이다.

▲ 아잔 문 비구가 아나함(Anāgāmin,불환과)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알려진 태국 나콘나욕 지방의 사리카 동굴.  

 

물론 실론에는 지금 이런 삼림수행 전통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한 때는 태국이나 미얀마에 이 전통을 전해주었다가 미얀마에서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현재 라만나 니카야()에서 이 삼림수행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태국에서 아유타야 시대에 이 삼림수행 전통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실론에서는 요가와차라 명상 지침서가 있었으며, 이 지침서를 통해서 대강의 명상전통 윤곽을 파악할 수가 있다. 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삼림수행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삼림 명상 수행이 고대에는 다소 밀교적 요소가 있었으며, 이 난해한 상좌부 전통은 현대에도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에서 주류 불교 전통으로 남아 있었다. 밀교적인 요소가 있는 태국 북부의 비문은 16세기 수코타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은 현대 상좌부의 명상 전통과는 좀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현대 명상에 가미되었다고도 보는 것이다.

 

태국 불교사에서 씻을 수 없는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는 버마와의 전쟁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태국과 버마 사이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아유타야는 버마의 공격으로 1767년에 파괴되어 수많은 역사 기록, 문학 및 종교 문헌이 소실되었으며, 아유타야 왕국의 몰락을 알렸다.

 

아유타야가 멸망한 후, 태국은 톤부리 왕국의 탁신 왕에 의해 재통일되었지만 1782년 라마 1세에 의해 타도되었다. 현대 태국을 통치한 왕조인 차크리 왕조의 10명의 왕은 모두 불교도이자 태국 상좌부 불교의 후원자였다.

▲ 태국 비구들이 모여서 우포사타(포살) 법회를 개최하여 파티목카(戒目)을 암송하고 있다.

 

불교는 태국 생활과 문화의 많은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태국의 생활 방식, 전통, 관습, 예술, 건축 및 언어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측면 중 하나이다. 불교는 태국 문학과 많은 태국 예술 형식, 특히 대부분의 사원의 내부 벽을 덮는 벽화에 영감을 주었다. 언어적 차원에서 불교 찬가에 사용되는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는 불교를 공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태국에서는 고전어로 인정받고 있다. 많은 태국어, 특히 왕족을 향한 언어와 문자 언어로 사용되는 단어는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승가의 고참자들은 빨리어를 독송을 통해서 집들이, 생일 축하, 결혼식, 장례 의식, 추도식과 같은 가정 및 가족 행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 및 공공 행사를 축복하는데 의식을 집전한다.

 

태국인들은 가정에 다양한 크기의 불상을 작은 제단 테이블에 봉안한다. 여행을 할 때 많은 태국인들은 작은 불상을 목에 걸거나 차에 작은 불상이나 존경받는 승려의 사진을 부착한다. 존경과 기억의 대상으로, 또는 장식과 보호를 위한 일종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콕의 에메랄드 왕실 법당(왓프라캐오)과 같은 신성한 장소를 지나갈 때 독실한 불교도들은 독특한 몸짓과 합장을 하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을 최고의 예의로 표한다.

▲ 태국 관광의 상징인 에메랄드(왓프라캐오)사원.

 

아유타야가 무너지고 차크리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지만, 불교 전통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버마와 아유타야의 전쟁은 아유타야 불교를 황폐화시켰다. 태국 불교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미얀마(버마)와 태국은 남방 상좌부의 양대산맥이다. 그런데 같은 불교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어딘지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데, 이것은 버마-아유타야 전쟁 때문이다. 양국 불교간에 진지한 교류가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전쟁 기간에 양국의 비구들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국 비구들은 머리털만 삭발하는 것이 아니라, 눈썹까지 깎도록 했다. 지금도 미얀마 비구와 태국 비구의 눈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국 비구는 눈썹을 깎았고 미얀마 비구는 그대로이다.

 

아유타야 불교 전통이 수코타이 크메르에서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실론에서 보다 엄격한 실론 불교 신파가 전해졌고, 한동안 아유타야 불교를 석권했다. 그런데 버마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기는 했지만, 아유타야 불교가 계맥을 다시 실론에 되돌려 주었다는 사실이다.

 

스리랑카의 주류종단이 시암(태국) 니카야()이다. 태국 비구 우빨리는 1753년 스리랑카 캔디 왕국을 방문하여 계맥을 이어 준 것이다. 스리랑카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면서 계맥이 세 번 소멸되었지만, 결국 재건되어서 오늘의 스리랑카 불교 모습이 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불교총회에 참석, 인도 스리랑카 비구들과 조식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