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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종교강연/양화진 근대선교 운동과 내한 선교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6/30 [09:33]

명사종교강연/양화진 근대선교 운동과 내한 선교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6/30 [09:33]
 

명사종교강연/양화진 근대선교 운동과 내한 선교사-이상규 고신대 교수


한국에 기독교가 뿌리 내린 이유 있었네


 

17세기 이전까지만해도 서양에는 선교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에 공인받게 된다. 공인받았다는 뜻은 여러 종교시장에 기독교도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392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됐다. 이때부터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고 자동적으로 크리스천이 되다 보니까, 선교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 구교와 신교로 분할됐다. 17세기 종교전쟁기가 지나고, 새로운 대륙이 발견되기 전까지 개신교는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천주교는 종교개혁 이후 자기 우산아래 있던 많은 지역을 개신교에 내주게 되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3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첫째, 개신교가 우세하고 천주교가 약한 지역에는 학교를 설립해 천주교 세력을 넓힌다. 둘째, 천주교 세력이 강하고 개신교가 약한 지역은 종교재판을 통해 개신교 세력을 탄압한다. 셋째, 천주교도 약하고 개신교도 약한 지역은 선교사를 파송해 천주교 세력을 확산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말 천주교의 세계선교 운동이 막이 올랐으며, 제일 먼저 자리 잡았던 지역은 인도였다.

개신교는 18세기 말에 와서 세계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선교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3가지다. 첫째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의 지상명령을 사도들에게만 준 제한된 명령으로 이해했다. 둘째는,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오해였다.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된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게 돼 있었기에 굳이 예정된 사람을 전도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 것이다. 사실, 누가 구원받을 자로 선택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예정론의 강조점인데도,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는 해상권을 천주교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느꼈다할지라도 해외로 나갈 길이 없었다.

스페인은 영국을 다시 천주교 우산 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1588년 영국을 침공했다. 그런데 무적의 아르마다 함대가 최초로 영국에게 패한 것이다. 이후 해상권을 영국이 장악하게 되면서 영국은 국가적 흥기를 맞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고, 세계선교의 주도권도 잡을 수 있게 됐다.

영국에서 선교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1694년이었다. 교회기구가 아니라 영국 의회가 만든 것이다. 이 단체의 존 엘리어트는 북미 인디언 지역에 파송돼 약 3000명의 인디언을 개종시켰다. 경건주의 운동도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요한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도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 선교운동은 18세기 말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케리(1761~1834)로부터 출발한다. 구두수선공이었던 그는 침례교 목사가 돼 일생동안 37개국의 언어를 공부했다. 케리의 마음속에는 언어를 모르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언어를 숙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인도에서 23개 국어로 신약성경을 완역하고, 10개 국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다.

헨리 벤은 토착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최초 입안자였다. 벤의 선교방법은 한마디로 현지인 중심의 교회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이 현지에 가서 계속해서 리더십을 행사하지 말고,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교회건물과 재정을 모두 현지인에게 물려주고 소리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상한 말로 ‘선교후의 안락사’라고 표현한다. 이 방식으로 미국선교사 존 네비우스는 중국에서 성공을 거뒀고, 조선선교에까지 영향을 줬다. 지금 와서 보면 탁견이었다.


선교, 복음전파에서 의료와 교육으로 방향 전환

일정기간 지나면 교회건물, 재정 현지인에 이양

선교사들은 교량역 하며 외교관 등으로 물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 CIM을 만든 인물이다. 테일러는 중국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차이나 인랜드 미션’을 만들었다. 이 선교단체의 슬로건은 ‘믿음선교’였다. 본국의 후원 없이 오직 믿음으로 선교하러 가는 방식이었다. 조지 뮬러는 고아원을 경영했다.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워주시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그려준 인물이다. 그는 중국을 세계지도의 중앙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지도로 굳어졌다. 중국선교사들에게는 중국복장을 하고, 중국음식을 먹게 했다. 기독교의 복음이 서양인의 것이 아니라, 동양인의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CIM은 창립 20년도 안 되는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두프는 인도에 가서 영어학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션스쿨의 효시가 된다.

영국이 세계선교운동을 주도하다가, 19세기로 넘어가면서 미국이 세계선교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만큼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커넷 라토렛은 ‘19세기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에서 선교운동이 일어난 동기는 사무엘 밀즈 등 대학생들이 일으킨 헤이스틱운동이 발단이었다. 기성세대는 재고, 따지고 하느라 추진력이 없는데 반해, 젊은 학생들은 세계선교의 중요한 고비마다 주도자로 나섰던 것이다. 1810년 밀즈의 요청으로 미국 최초의 선교단체인 ABCFM(미국해외선교회)이 만들어졌다. 2년 후 1812년 미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골든 홀 등 5명의 선교사를 인도로 파송하게 된다. 미국에서 인도까지 선편으로 4개월 걸리는 여정이었다. 이들은 인도에 있던 케리 등과 합류해 동역하게 된다. 이중 1명은 다시 미얀마로 간다. 12년 후에 미얀마 말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실론(스리랑카), 근동, 중국, 마두라 등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기독교 선교운동은 1830년대를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3가지다. 첫째는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의료와 교육이 선교의 중요한 방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둘째는 목사중심 선교에서 평신도 중심 선교로 확산됐다. 셋째는 남자만을 선교사로 간주하다가 여성도 선교파트너로 인식하게 됐던 것이다.

미국 최초의 의료선교사는 1819년 스리랑카에 파송됐던 존 스커드였다. 초기에는 의사들이 모두 목사였다. 스커드는 스리랑카에서 36년동안 활동하며 명성을 날렸다. 피터 파커는 1834년부터 중국 광동에서 활동했다. 파커는 처음에 안과병원을 개업하고, 백내장 수술을 했다. 예수의 복음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인체를 통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600g의 혹을 머리에 달고 다닌 여자아이를 수술로 고쳐주기도 했다. 클라라 스웨인은 1869년 미국 감리교가 인도로 파송한 최초의 여의사였다. 그는 인도 의학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이 이끄는 세계선교의 큰 흐름 속에 드디어 한국에도 1880년대 선교사가 파송된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한 호러스 알렌은 피터 파커의 선교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다. 알렌은 조선에 와서 병원 설립 허가를 신청할 때, 광동 안과병원을 사례로 제시했다. 파커가 1845년에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됐듯이 알렌도 조선에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선교사들이 타지에서 가서 끊임없이 리더십을 행사하려고 하면 마찰이 일어나는 법이다. 사실 현지 국가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6%로 늘어나면 선교사의 역할이 줄어들게 된다. 이때는 선교사들이 양국의 교량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 선교사들은 현지인을 교육시켜 의사로 만드는 일에도 주력했다. 알렌이 세운 제중원의 경우 1927년에 한국인에게 완전히 양도했다. 평양에는 감리교가 경영하는 선교병원이 있었는데, 나중에 장로교가 세운 병원과 합쳐서 평양기독병원이 된다. 이때 최초의 한국인 병원장이 장기려 박사였으며, 장 원장 때 리더십은 완전히 한국으로 이양됐다.

평신도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되면서 교사 선교사, 간호사 선교사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선교에 동참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선교사의 아내’로 따라갔지만, 이제는 ‘선교하는 아내’로 따라가게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미국의 선교도 구라파에서처럼 학생자원운동(SVM)이 선교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886년 여름에 헬몬산 무디수양원에서 학생 120여 명이 모여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작정한다’고 서약했다. 이 운동이 선교운동을 확산시키게 된다. SVM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알렌, 언더우드, 헤론, 베드 등 초기 선교사들이 속속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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