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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이희돈 워싱턴 성광교회 장로(세계무역센터협회 총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6/11 [16:00]

간증-이희돈 워싱턴 성광교회 장로(세계무역센터협회 총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6/11 [16:00]

“하나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버리지 않아”


이희돈(48)장로는 서울 출신으로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HMC 종신교수와 세계무역센터협회(WTC) 총재로 재임 중이다. 9·11 테러 발생 당일 이 총재는 세계무역센터 110층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잘못돼 모임에 30분 늦게 도착해 화를 면했다. 비행기 동체가 꽂힌 무역센터 77층이 이 총재의 방이었다. 이 간증은 무역센터 부총재 시절인 지난 2006년 2월 11일 영국 런던의 한 교회에서 가진 것으로 본지가 발췌 정리한다. <편집자주>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92개국 320개의 무역센터를 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무역센터 이사를 역임했고,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60살 이상이 돼야 이사가 될 수 있는데 나는 38세에 세계이사가 됐다. 아무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런던에는 세계무역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왔다. 유럽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내가 미국의 주류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믿음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비전은 하나님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위한 꿈을 가지고 할 수 있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런 작은 믿음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없다. 15분마다 스케줄이 잡혀있다. 삶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하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야 다른 나라와 교류할 수 있다. 전세계 320개의 무역센터는 하루 한 곳을 다녀도 3년이 걸린다. 그러나 새벽기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이번 달에도 세계를 두 번 이상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돌아다녀야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세계를 품에 안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지 않는 삶은 결단코 비전을 가질 수 없다.

나는 매주 금요일에 철야기도를 한다. 성전에서 혼자 침낭에서 잔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이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겠는가.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나는 시간의 십일조도 드린다. 1년의 10분의 1은 해외선교에 나선다. 나는 한 번도 휴가를 보낸 적이 없다. 오지에서 선교사들과 보낸다.

유럽에서 무지하게 고생하며 꿈을 키웠다. 역경은 왜 오는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나를 축복하기 위해서다. 내가 유럽에 올 때 나의 부모님은 비행기 표만 주었다. 그것도 원 웨이 티켓이었다. 가서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준 봉투 속에는 돈은 없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울 것이다.’는 글이 쓰인 종이만 있었다. 공항에는 아무도 안 나왔다.


40세에 수상급들과 겨뤄 WTC 수석부총재 올라

주1회 철야기도…“정성 없이 어떻게 이끄시나”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잊지 않았다. 성적은 중간이었다. 유럽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시간의 50퍼센트는 전도에 투자했다. 갈 표만 가지고 전도여행을 떠났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 찾아갔다. 직원은 학장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위의 사람이 보내서 왔다“고 말하자 놀라서 면담을 주선했다. 직원은 내가 대통령의 소개서를 지침하고 온 줄 알았을 것이다. 학장은 소개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학교에 들어오려면 정식으로 입학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명했으나, 나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다. “옥스퍼드가 투자해서 손해 볼 것 없다. 빨리 잡으라. 배낭 메고 오는 사람 봤느냐.”고 반문했다. 하루를 기다리니 스칼라십을 줬다.

그래도 걱정이 됐다. 다음으로 캠브리지대학의 캠브리지 미션을 찾아갔다. 나는 옥스퍼드에서 스칼라십을 받았으나 먹고 입고 잘 데가 없으니, 일하며 먹고 입고 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자는 다음날 오라고 했다. 학교 층계에서 자고 다음날 가니 중국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말은 모르나 중국 글은 안다고 하자, 중국성경을 가져왔다. 성경은 다 알기 때문에 한문글자를 보고 설명하자 반색을 하며 중국계 선교담당을 맡겨줬다. 그렇게 해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 다녔다. 과연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유럽에서 미국에 갔다. 박사학위가 끝나지 않았을 때다. 사람들은 내가 받은 학위를 가짜라며 믿지 않았다. 학력이 너무 많이 겹친다는 것이다. 그 나이에 그렇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느냐고 의심했던 것이다.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못 이룰 것이 없다. 마음에 믿음이 있고, 하나님과 같이 여행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센터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에 가겠다고 하자 선배들이 미쳤다고 했다.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 결혼도 안 했고, 돈도 없고, 재정증명해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 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보내겠다는데 자기가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도한 다음 글을 썼다. 내가 미국에 들어가야 할 10가지 이유를 용지 1장에 써서 그것만 미국대사관에 제출했다. 직원은 결격사유가 많아 영수증을 안 주고 영사에게 보고했고, 한참 후 영사와 면담했다. 그는 “이 글을 당신이 썼느냐, 이렇게 믿느냐,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3시간 만에 비자를 내주었다. 나는 1년에 2백만 불 이상 헌금한다.

내가 수석부총재가 될 때 굉장히 어려웠다. 아내만 나를 믿어줬다. 우리 총재에게 출마해도 되겠느냐 하니 ‘노’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내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겠느냐. 당신 같은 사람에게서 쓰여져야 하나님의 뜻인 줄 안다.”며 격려했다. 기도하는 중에 ‘30밖에 없는데 30으로 하겠다고? 그러면 네가 다른 점을 얘기해 보라.’는 생각이 떠올라 기도했다. ‘하나님, 세계무역센터에서 총재를 보기 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회의가 열렸다. 각국의 수상도 하고, 나보다 20~30세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내 이름은 거론도 안됐다.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 팀의 리더가 일어나 “지금까지 일하는 것을 봤는데 데이빌 리가 최고 적격자다.”고 말했다. 총재도 “우리가 새로운 길을 가야하는데, 하나가 되어 이 사람을 뽑자”고 지지하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작년에 제네바 회의에서 나에 대한 재신임투표가 있었다. 반대파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가 후계자(총재)가 되니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비밀투표를 했다. 그러나 재신임됐다. 이렇게 해서 파워 있는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굉장히 익사이트하다.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은 미국에서 굉장히 우대받는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다. 그 실력 가지고 밥 먹고 살겠냐고. 나는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신다.”고 말했다. 나중에 이 말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근간이 됐다. 29살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교수가 됐는데 교수임명 시 “네가 실력이 있어 된 것이 아니라 희소가치가 있어서다. 나이도 젊고 여러 나라에서 공부했고, 여러 나라 언어를 알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추월당한다.”며 과소평가했다.

미국에 갔으나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눈물밖에 안 나왔다. 가장 비참하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 후 실력을 보장받기 위해 여러 나라에 논문을 보냈는데 교토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초청했다. 나는 아내에게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 말했다. 아내는 기도한 후 말했다. “늘 선교 나가겠다고 말한 사람이 지금 안 나가면 언제 나가겠는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처음으로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결국 아내의 말대로 멕시코 적도지방의 선교사로 나갔다. 학교에서는 돌아와도 자리 없다며 만류했다.

선교지는 목욕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벼룩이 개미떼처럼 덤벼들었다. 무지 고생했다. 전도의 열매가 무어냐고 기도했다.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너는 별만큼 선교하는 사람을 별만큼 도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응답받았으니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잔칫집에서 앞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뒤로 나가라 하면 얼마나 창피한가. 뒤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라 하면 영광이다. 하나님이 나오라 할 때까지 기다리자”며 반대했다. 국제무역센터에서는 날마다 나오라고 펙스를 보냈다. 나오라고 사정해도 안 나가자 반대로 내 주가가 올라갔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수직상승했다.

노르웨이 국왕과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궁정에 초대받았다. 그 후 다시 초대받았으나 예배시간과 겹쳤다. 두 왕가의 약속을 취소했다. 예배드리기 위해 비행기 타고 갔다. 새벽기도는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다. 사탄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나는 5개국어를 한다. 내 친구들은 방언을 하지만 나만 못했다. 나는 외국어로만 기도한다. 새벽기도에서 동시통역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아지처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하나님께 맡기면, 꿈이 인정만 되면, 하나님 앞으로 향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신다. <정리=이중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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