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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산책 <1>러시아 대문호이자 ‘지성인의 스승’ 레프 톨스토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6/11 [15:43]

인물산책 <1>러시아 대문호이자 ‘지성인의 스승’ 레프 톨스토이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6/11 [15:43]

톨스토이와 그의 무덤

“인생이란 善을 향한 노력…사랑만이 목적 달성해”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는 인간 양심을 크게 흔들어 깨운 지성인의 스승이었다. 동시에 그는 사상가요, 평화주의자였으며, 어린이들과 많은 이들을 선화(善化)시킨 위대한 종교가였다. 그의 3대 걸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에는 그의 사상과 예술, 종교의 모든 것이 구현돼 있다. 그는 ‘부활’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란 불멸의 믿음을 낳았다. ‘톨스토이즘’의 근간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체 파악을 비롯해 형제애, 범노동, 비폭력·무저항, 범세계주의, 4 복음서에 기초를 둔 원시 그리스도교의 확립, 평화주의, 사유재산의 부정, 모든 문화·문명·과학·예술의 폐기, 국가·제도·교회의 기피 등으로 요약된다. 그는 인생을 선(善)에 대한 희구로 보았고, 인생의 의의를 선에 대한 노력으로 파악했다. 선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며, 모든 사람은 이 목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톨스토이는 1828년 중앙 러시아 툴리스카야현 야스나야 폴리야나(Yasnaya Polyana)에서 명문귀족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2살 때 모친을 잃고, 9살 때 뇌일혈로 부친을 잃은 뒤 다섯 남매가 고모 집에서 성장했다. 일찍부터 시작(詩作)에 몰두해 자연에의 사랑과 고대 러시아에의 연모가 담긴 시정이 넘치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으며, 폴리야나에 있는 그의 집은 항상 평화가 넘치는 곳이었다.

생애 90편에 달하는 명작을 남기며 사회적 명성과 부를 끌어모았던 그는 1877년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고 난 뒤인 50살을 전후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다. 행복했던 가정생활은 물론, 화려했던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해 천박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괴로움이 찾아온 것이다. 괴로움은 심각한 것이었다. 거의 절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자주 있었다. 무서운 괴로움을 거쳐 마침내 그는 하나의 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어렸을 적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신(神)에 대한 갈망이며, 인간에게 자기완성의 이상을 준 ‘최고의지’에 대한 복귀였다. 이때부터 그의 일생은 영(靈)과 육(肉) 즉, 내면생활과 외면생활의 싸움이었다. 막대한 부와 명성을 오물처럼 내던지고 영원한 자유인의 길에 올랐던 톨스토이의 행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로 위대한 결단이었다.

의식을 전환한 그는 생활 패턴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농부가 입는 루바시카(블라우스풍의 상의)를 입고, 채식을 즐겼다. 민중과 융합하기 위해 스스로 농부들 틈에 끼어 밭을 갈고, 풀을 벴으며, 씨앗을 뿌렸다. 그는 건초를 말리고 장작도 팼다. 손수 지은 콧배기 굽은 신을 신기도 했다. 여가 시간은 진리에 관한 성찰과 그것의 민중화에 쏟았다. 예술 활동은 돌아보지 않는 그의 결연한 변화는 아내를 비롯해 가족과 친지,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변화는 그들에게 슬픔이었다.

톨스토이는 진리와 생활과의 조화를 ‘소유권의 포기’라고 파악했다. 토지며 재산의 소유는 그의 신념에 반하는 죄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악을 낳는 요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전 재산을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모든 저작권도 민중들에게 보급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종교적·사상적 저작에 대해서만 그 뜻이 이뤄졌다. 그는 교회를 정면 부정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파문당했다. 당시 교회에 전달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 것 일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 등 불후명작으로 양심 흔들어 깨워

50세 전후해 富·명성 내던지고 神에 귀의

‘톨스토이즘’은 靈肉싸움서 이룩한 금자탑

진리와 생활 조화하려면 소유권 포기해야


이성과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톨스토이는 이것을 ‘인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이를 왜곡시키는 과학과 사이비 종교를 비난했다. 그는 현대 물질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가차 없이 폭로하면서, 인간사회에 불행을 가져다주는 악의 근원으로서 사치와 무위도식에 빠져 있는 타락한 특권계급을 부정했다.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굴복시키는 유해한 실체로서의 폭력으로 세워진 국가를 비판했다. 그러한 국가에 봉사하는 교회와 공범자인 학문과 예술도 부정했다. 그는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확고한 ‘행복론’을 설파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며 남을 위해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자기 행복만을 바라면 그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성의 활동인 사랑을 가지고 일반 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며, 그 테두리에서만이 올바른 행복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톨스토이는 그의 일기에서 자기를 좀먹는 3개의 악마로서 도박욕과 육욕, 허영심을 들었다. 그는 도박을 대단히 좋아했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 했지만, 도박욕의 노예가 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싸움이었다. 두 번째 악마인 육욕이 문제였다. 그는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다. 때문에 육욕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무진 고생을 했다. 가장 어려운 싸움은 허영심과의 한판 승부였다. 그에게 도덕적 자기완성은 이러한 치열한 내적 투쟁에서 얻어낸 대가였다.

그의 내부에는 좌우에 각각 직능을 달리하는 두 손이 있었다. 한 손은 지상의 것인 악의 유혹, 육을 추구했고, 다른 손에는 선천적으로 천상의 것인 신의 세계 곧, 영의 생활에 대한 순교자적 일생이 운명 지워져 있었다. 톨스토이의 생애는 이 두 손의 끊임없는 싸움이었고, 전자에 대한 후자의 최후 승리였다.

톨스토이는 현대 문명을 비판한 많은 종교적·사상적 저술을 통하여 그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과 자본주의 문명을 부정하는 심오한 사상을 확립했다. 그의 예술적 창조와 심오한 사상은 단순히 사색의 유희가 낳은 허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신에게로 향한 험난한 구도자적 여정을 통해 몸소 괴로워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얻어진 값진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상과 작품은 빛을 잃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전 인류에게 남겨진 공동의 유산으로 불멸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영과 육의 피나는 싸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류 최대 문제에 대한 무한한 교훈과 암시를 발견하게 된다. ‘톨스토이즘’이야말로 그가 내적 실재로서 영과 육의 싸움을 한평생 지속하며 얻은 것이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었던 영의 승리는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체험의 결과였다. 그의 논리 규준(規準)이 실천·도덕·철학적이라는 점에서 ‘톨스토이즘’의 불멸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모두 자기 내부의 이성 즉, 신의 활동인 사랑에 의하여 선한 목적을 향해 정진하는 노력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이성을 좇아 살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영원성이 결여된 개인적·육체적·물질적 악의 생활을 이성을 좇게 하는 데에 집중시켜야 참다운 인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또 신의 아들인 인간은 모두 한 가족이며,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믿었다. 전 인류는 한 단위 국가라든가, 한 단위 종족이라든가, 한 단위 종교의 속박적인 테두리를 넘어서서 형제애와 만인의 행복을 위한 기초 위에서 하나로 융합하고 결합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신적 전환기를 거친 톨스토이는 다시 얻은 신에 대한 신앙 외에 현재의 지상생활에 대한 교회적 해석을 배제하고 실질적 인간생활의 규준으로서의 종교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자기 모습을 명백히 했다. 그는 1908년 80세에 ‘침묵할 수 없다’를 써서 사형집행의 부당성을 알렸고, 2년 뒤 1910년 82세에 친구이자 주치의인 마코비스키를 데리고 가출해 그해 10월 최후의 저작인 ‘유효한 수단’을 탈고한 뒤, 11월 7일 눈이 덮인  아스타포바의 시골 역사 역장 집에서 눈을 감았다.

세습 귀족의 집에서 러시아의 혼으로 태어나, 끊임없는 열정과 의지로써 진리 탐구와 자기 완성의 고행을 거쳐, 마침내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표연히 ‘진리와 실제생활과 죽음’의 대조화를 향하여 길을 떠났던 톨스토이. ‘인류를 위하여, 인류와 함께, 인류 속에서’ 살려고 애썼던, 그의 생애는 인생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이정표였고, 인류애의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유해는 11월 9일 폴리야나로 옮겨져 생가 뒷산에 비석 하나 없이 소박하게 안장됐다. 그의 작품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떠올려지는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크기다. 위인은 또 그렇게 찾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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