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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4/30 [10:47]

삶의 향기-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4/30 [10:47]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있는가, 그러면 사랑하라


강원도 산골 농가에 13세 소녀 현순이가 살았다. 농삿군 최씨가 맹인인 현숙이 부모로부터 양녀로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니다 중퇴하고, 양부모의 집에서 농삿일을 도왔다. 현순이는 과거 친 부모 손에 끌리어 구걸이나 행상을 전전했다고 한다. 따라가기 싫다고 하면 먹을 것이나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여 붙잡고는 사정없이 때렸다고 한다. 현순이는 친부모를 증오하고 있었다. 최씨 부부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자녀를 낳지 못해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이고, 잇따라 현순이를 양녀로 데려왔으나, 학교를 보내지 않고 일만 시켰던 것이다.

내가 처음 그 아이를 만난 곳은 밭이었다. 여름휴가 때 회사 직원들과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아이가 일하던 밭을 지나고 있는데, 어린 것이 쭈그리고 앉아 힘든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표정이라는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어둠만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현순이에 관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아이가 불쌍해졌다. 이 땅의 부모는 어린 자녀들에게 최소한 초등학교 교육만은 시켜야할 책무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교육법에도 명기된 내용이다. 나는 현순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낸 뒤, 서울에 데려다가 초등교육이라도 마쳐서 다시 부모에게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서울에 데려가 학원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최씨 부부를 만나 설득했다. 예상대로 선뜻 승낙하지 않았다. 그 후 여직원을 앞세워 몇 차례 왕래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도 전셋집에서 살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남의 자식을 데려다 중학교입학검정고시를 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현순이는 변화된 환경과 공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얼마동안 학원에 다니는 것을 힘들어 했다. 지금도 아이에게 해줬던 말을 기억한다. “네가 지금 힘들다고 포기하면 너는 그동안 당했던 고통을 평생 면하지 못한다. 여름에 땀 흘려 일하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 듯이 잠시 견뎌내면 중학교에도 갈 수 있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자,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이가 서울에 온지 2개월쯤 지나 공부에 재미를 붙일 무렵, 최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순이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미덥지 않은 이유를 댔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좋은 기회이거늘, 그 새를 못 참고 데려다 일 시킬 궁리나 하다니…. 현순이는 내 책에 ‘엄마’라는 글자를 많이 적어놓았다. 어린 것이 양 어머니라도 많이 그리웠을 것이다.

나는 최씨를 설득했다. 그러자 최씨는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최씨는 도로를 닦을 때도 두 차례나 돈을 요구했다. 내가 빚을 내어 보내준 돈으로 자기 집 앞까지 도로를 냈다.

어쨌거나 내가 벌린 일이니 현순이 문제는 온전히 매듭짓고 싶었다. 우리 집에 온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 다른 직원에게 부탁해 당분간 그 집에서 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 직원도 봉사활동을 같이 나간 터여서 현순이의 딱한 처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현순이는 그 집에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시골로 돌아갔다. 나중에 현순이 부모로부터 합격증을 보내달라고 해서 부쳐줬으니, 필경 중학교에는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몇 개월 동안 현순이를 잘 데리고 있던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자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고 있으니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당시 나는 실직자가 되어 끼니를 걱정하던 처지였다. 하지만, 성의를 다해 구두와 몇 가지 용품을 사서 보내줬다. 그 다음번에는 울면서 전화했다. 자신이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졸라댔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 후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 직원은 지금도 나를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무엇을 바라서 현순이를 도운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큰 고통이 따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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