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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차별없는 평등세상 꿈꾼 인디언이야기- 박홍규(영남대 교수)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4/30 [10:37]

강연/차별없는 평등세상 꿈꾼 인디언이야기- 박홍규(영남대 교수)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4/30 [10:37]

이 글은 ‘2010 양화진 목요강좌’에서 박홍규 영남대 법학과 교수가 ‘차별없는 평등세상 꿈꾼 인디언이야기’라는 주제로 한 강연으로, 본지가 발췌 요약한다. 강연은  지난 4월1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이뤄졌다.

 

 

 

“서양사상의 기저는 인디언 자유주의”

 

어린 시절에 서부영화를 본 추억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100여 년 동안 수백만 개의 영화필름이 만들어졌으며, 그중 4분의 1은 서부영화였다. 서부영화란 악당인 인디언이 나오고, 악당을 잡는 백인 보안관이 등장한다. 중간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을 인디언이 망가뜨리고, 보안관이 이 악당을 총알 몇 방으로 쏴죽이고 여인을 구한다. 이것이 서부영화의 전형이다. 대부분 범죄영화, 할리우드영화도 이러한 틀을 가지고 있다.

미국영화로 대표되는 서양문화의 전형이 또한 기독교문화라 생각한다. 기독교가 인류사회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지만, 신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긴 비극적 사건도 적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북아메리카인디언을 말살시킨 것이다.

인류역사에 지배와 정복사건이 종종 있어 왔지만, 어느 집단이 특정지역을 멸종시킨 사례는 많지 않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했어도 인구는 더 증가됐고, 인도가 300년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았어도 인구는 늘어났다. 반면에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지역에서는 외세가 침략해 원래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이 거의 멸종됐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희귀한 사례다. 그 멸종의 대부분이 기독교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구교와 신교를 포함한 광범위한 기독교 이야기다. 비 서양문명의 대표적 멸종민족이 인디언이다.

지난 6, 70년대 미국사회에서 이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서양사회 전반적으로도 회의가 생겨났다. 이로 인해 인디언 내지 비서양인들의 무참한 살육역사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다. 인디언 등 비서양인에 대한 관심도 증폭됐다. 인디언이라고 하면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삶이 반생태, 반환경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서양인들의 침범 이전에 자연 속에서 자치적으로 살았다. 인디언을 알기 이전에 서양사람들은 자연적인 생활방식을 몰랐다. 이것은 인디언을 만나면서 터득한 것이다. 인디언을 보고 나오면서 토머스 모어가 사회주의와 자연주의의 기본이 되는 ‘유토피아’를 썼다. 그는 기독교인이자 인디언을 알게 된 최초의 서양인으로서 유토피아를 꿈꿨던 것이다. 그 뒤 몽테뉴, 루소, 록크, 미국헌법 등이 나왔고, 페미니즘, 노동운동 등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서양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 모든 것에는 인디언들의 기본사상이 깔려 있다.

종교개혁도 인디언에 의해 생겨났다는 말이 있다. 에라스무스나 몽테뉴의 저술을 보면 인디언들의 모습이 가장 기독교에 가까운 사회임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은 인디언을 공부하면서 서양인들이 인디언에 대해 발견한 것보다, 인디언 자신들이 서양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가 궁금했다. 인디언 추장(민족장)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사회에 우리 인디언같이 살던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고. 이 말은 서양인 중에 물질적 욕구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는데, 너희는 왜 우리를 못살게 굴고 죽이고 그러느냐는 뜻이었다. 왜 예수를 팔아서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느냐는 것이다. 어떤 인디언의 말보다 감동적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엄연한 침략이다. 서부영화에서 인디언이란 대부분 백인들이 분장해 나온 것이고, 실제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저도 인디언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美洲인디언,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살던 사람들

서양사상의 토양 제공하며 미래사회 대안으로 부상

원주민 말살은 희귀한 사례…기독교 이름으로 자행돼


1492년 미 대륙을 침략한 콜럼버스는 인디언들을 종으로 삼겠다, 모두 기독교인들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서양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카대륙에서 500년 이상 기독교 이름으로 살육과 정복의 역사가 벌어졌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야만인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인디언을 식인종과 야만인으로 기록했지만, 이들의 순결하고, 당당한 모습도 함께 기술돼 있다. 콜럼버스 이후 청교도 등 많은 크리스천들이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건너가 정복자가 됐지만, 상당수는 인디언들을 통해 참된 기독교인의 길, 미래사회의 대안을 발견하기도 했다.

요즘 요리사나 주방장을 지칭해 ‘셰프(chef)’란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본래는 프랑스 사람들이 인디언 추장에게 붙인 말이다. 인디언 추장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전쟁 지휘자나, 절대 권력자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추장은 대부분 늙었다. 인디언 추장은 대통령이나 CEO가 아니었다. 늙은 사람 중에 말 좀 하는 사람들이 맡았다. 추장들은 공동생산이나 분업을 할 때 노동 강도가 느슨해지면 앞에 나서서 “대충 놀아라”하고 잔소리하는 역할을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깨우는 것도 추장들의 몫이었다. 추장들은 구성원들이 본분을 끊임없이 북돋우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존재였다. 추장은 아무런 권력이나 힘이 없었다. 그저 늙어 죽기 전까지 모범을 보이고, 부족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국 서부극에서는 인디언들이 전쟁을 하면서 머리 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잔혹하게 묘사된다. 이것이 서양인들의 무참한 살육의 표적이 되었다. 인디언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이들은 소유관념이 없었다. 남이 가진 것을 빼앗을 줄을 몰랐다. 인디언 남자들이 전쟁 때 적의 머리 가죽을 벗긴 것은 자신들의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한 방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록을 보면 콜럼버스 침략 당시의 아메리카 인디언 숫자는 1500만 명이었다. 그 인구가 그대로 불어났다면 같은 면적을 가진 러시아나 중국처럼 적어도 10억명은 돼야 옳다. 그러나 인디언보호구역의 인디언을 모두 합하면 100만명도 안된다. 그나마 이들 대부분은 실업자와 마약중독자, 극빈자로 전락해 있다. 이대로 가면 멸종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인디언가족을 초대했을 때 함께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오후 6시에 오기로 돼 있었다. 인디언들이 삼계탕을 그렇게 좋아해 목사님은 삼계탕을 준비했다. 약속시간을 2시간이나 넘겨 무려 30명의 인디언가족이 들이닥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전혀 걱정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삼계탕에 물만 더 쏟아 붓는 것이었다. 멀건 삼계탕으로 참석자들이 식사를 무사히 마쳤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 다음날에는 내가 인디언마을에 초대받아 갔다. 인디언 목사 사택에 가면 반드시 냉장고 문부터 열어봐야 한다. 안 열어보면 큰일 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다 끄집어내 먹어야 한다. 이것은 ‘나는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냉장고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면 썩은 것이 많이 나올 것이다. 인디언들은 물건이 썩어있을 겨를이 없다. 이들은 아이들 교육도 멋대로이고, 위생관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하고 똑같다. 나는 수염을 기르는데, 한민족의 전통(身體髮膚 受之父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사는 모습이 내 취향에 맞다.

우리가 몇 가지 혼동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디언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살지 않는다. 집집마다 굉장한 거리를 두고 산다. 땅이 넓어서일까. 아니다. 공간개념이 다를 뿐이다. 인디언적 공동체생활은 개인의 자율성이나 개성, 독창성이 최대한 확보돼야 한다. 그래서 공간적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나 강자를 중심으로 지배계급의 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이 나보다 잘 난 것도, 자기보다 부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원시사회나 야만사회라고 해서 권력도, 계급도, 욕망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회도 지배자나 돈, 재산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돈이나 권력 따위에 욕심 내지 않으며 사회의 욕망을 조절해내는 극소수 지배자가 있었다. 그것이 종교였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 신자의 개념은 일반인과는 조금 다르다. 내 집과 연구실에는 성경책이 비치돼 있다. 정기적으로 가는 교회는 없어도 이 교회, 저 교회  많이 다닌다. 외국에 나가도 교회나 성당에 들른다. 나는 성경도 좋고, 예수도 좋아한다. 성경책도 3번 읽어 웬만큼은 알고 있다.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도 그런 역사가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인디언에 대한 공부를 20년가량 진행하면서 종교의 의미를 새롭게 가졌다.  그전에는 종교란 ‘인민의 아편’이라고 생각했던 운동권이었다. 고대인디언을 연구하면서 이 사람들의 종교라는 것은 법보다 더 강력한 사회질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의 종교는 믿음, 사랑, 신뢰, 합의 등에 의한 질서의 형성이었다. 인디언사회에서 왜 종교를 중시하는가. 인디언사회는 거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가 그 역할을 대신해 온 것이다. 종교가 권력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점도 있지만, 법이나 정치가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해냈다.

인디언사회는 굉장히 투쟁적, 경쟁적이었으나, 이것을 종교가 순화시켜주고 막아줬다. 인디언들의 종교예술 즉, 공동춤이나 공동음악도 개인들의 분출하는 개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엮어주고 순화시켜주는 사회질서의 한 메커니즘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인디언들의 이러한 삶과 문화를 계속 관찰했다. 19세기에 일어난 페미니즘과 아나키즘, 사회주의마저도 인디언사회에서 시사점을 얻었다. 기독교 내부의 진보적 시각들도 대부분 인디언들의 삶에서 추구됐다. 남을 구속하지도, 구속 받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인디언들이 인류사회에 가져다 준 커다란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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