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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경허 큰스님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3/30 [13:50]

인물탐구/경허 큰스님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3/30 [13:50]
 

경허선사의 오도송 태평가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하고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로다


사통팔달한 무애도인 경허 스님은 관념의 틀을 넘어선 시대의 스승이었다. 스님은 금계 시 여기는 술과 고기, 그리고 여자도 멀리하지 않았다. 스님은 당시 범인의 안목에서 보더라도 파계승이요 괴승이라 여길 정도로 많은 기행을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동침하고,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인간의 윤리의 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행적을 남겼다.

참이란 무엇인가. 겉과 속이 같은 것이고, 시작과 끝이 같은 것이다. 참된 사람은 육신을 위해 행하지 않고, 나를 위해 행하지 않으며, 남을 의식하지 않고 본성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꾸밈없고, 거짓 없고,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야말로 도를 깨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였다. 가야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 길이 끊겨버린 곳을 오르다 길옆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해인사 퇴설당에 데려와 겨우 살려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경허 스님 방에서 먹고 자고 했다. 수제자 만공 스님이 보내라고 간청했지만 경허 스님은 들은 체도 안 했다. 그 소문이 동네에도 퍼져 스님과 신자들이 여자를 쫓아내기 위해 몰려들었다. 여인이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었다. 코도 없어 얼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고, 손가락도 없는 나병환자였다.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냄새가 역해 가까이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열흘 동안 그 여자를 닦이고, 밥을 먹이고, 자기 옆에 재웠던 것이다.

모두들 경악했다. 마침내 스님과 신도들은 머리를 숙였다. 어느 누구도 여자로 생각할 수 없었다. 스님의 눈에는 날개가 부러져 퍼덕거리는 한 마리의 가여운 어린 새로 보였을 것이다. 선사는 자비의 화신이었고, 계율을 넘어선 선승이었다. 그에게는 절이 따로 없었고, 중생이 따로 없었다. 그는 사람의 본성을 찾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을 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니었다.

또 하나 천장사에서 있었던 일화다. 경허 스님의 형님인 태허 스님이 갈산 김씨네 사십구일재를 지내기 위해 푸짐하게 장을 보아다 갖가지 과일과 떡을 탁자에 정성껏 진열해 놓았을 때다. 구경꾼 아이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 홀연히 경허 선사가 나타나 법당에 차려놓은 과일을 모조리 구경꾼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를 안 태허 스님이 화를 내면서 “재나 다 지낸 뒤 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나눠 주느냐?”고 하자 경허 스님은 “이렇게 지내는 것이 바른 재입니다.”고 대답했다.

선사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 어떤 율(律)이나 의식이나 재(齋)보다 먼저요, 으뜸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경허 스님은 관념을 넘어선 사람이었다.

경허 스님(鏡虛禪師․1849∼1912)의 속명은 동욱(東旭)이고,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법호는 경허(鏡虛)다. 아버지 송두옥(宋斗玉)의 차남으로 전주에서 출생했다.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기도 광주의 청계사(淸溪寺)에서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물 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14세 때 절에 머문 거사로부터 문맹을 거두었고,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 등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동학사에서 강백이 되자 전국에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자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경허 스님은 1879년 옛 스승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스님은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앉아 밤새도록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터득하고 새롭게 발심(發心)하였다. 

스님은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 뒤 서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경허 스님은 1880년 홍주 천장암(天藏庵)에서 용암(龍岩)의 법을 이은 후 천장암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부석사(浮石寺) 등에서 활동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1894년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 해인사의 경전간행불사(經典刊行佛事)와 수선사(修禪社) 불사의 법주가 되었다. 1904년에는 안변 석왕사의 오백나한개금불사의 증사(證師)가 되었다.

경허 스님은 56세 때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수법제자인 만공에게 전법송을 내려주고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 갑산 옹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만년에 왜 속세에 내려와 속인의 삶으로 생을 마감했을까. 그의 임종 게는 다음과 같다.

‘마음 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그의 세속나이 64세, 법랍 56세였다.

만공은 경허 스님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영찬(影讚)을 써서 금선대 진영각(眞影閣) 봉안했다. 만공이야 말로 스승 경허 스님을 이해한 오직 한 사람이었다.


<경허법사영찬(鏡虛法師影讚)>

빈 거울에는 본래 거울조차 없고 鏡虛本無鏡

소를 깨달음에 일찍이 소도 아니로다 惺牛曾非牛

거울도 없고 소도 아닌 곳곳마다 非無處處路

산 눈(活眼) 자유로이 술과 다못 색이로다 活眼酒興色


경허 스님은 생애를 통해 선(禪)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한 선사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경허 스님의 수법제자는 송만공(1871~1946), 신혜월(1861~1937), 전수월(1855~1928), 혜봉․침운․방한암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 근현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경허 스님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중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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