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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근심입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2/16 [13:26]

무엇이 근심입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2/16 [13:26]
 

무엇이 근심입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지난달 만취한 경찰이 스님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자주 생겨나고 있어 또 다른 불씨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불똥은 엉뚱한 곳에 튀고 있습니다. 한 시민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제기한 ‘스님’ 호칭 문제 때문입니다. ‘스님을 폭행했다’고 보도한 19개 언론사에 “목사, 신부, 장관, 대통령은 존칭을 안 붙이면서 유독 스님에게 붙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니 이를 정정하라”고 신청한 것입니다.

‣새해 들어 해외에서는 ‘하나님의 호칭’을 놓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혈사태까지 벌어지더니 급기야 한국에서는‘성직자의 호칭’을 놓고도 기독교계와 불교계가 논쟁을 벌이는 양상입니다. 포털사이트 토론방에서는 상대종교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비방과 폄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이 외국에서처럼 폭력사태로까지 번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상대종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점점 각박해지고 부족해진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단 전체가 아닌 일부 극렬신자나 신도들의 과격한 주장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잦은 논쟁이 벌어지다 보면 종교간의 격한 감정과 갈등이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목사 신부 스님 등 종교지도자들이 강단에서 신도들에게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 신’은 육체와 이름도 초월한 존재이므로 ‘거룩한 신의 이름’을 놓고 종교간 영역싸움을 하기보다는 ‘창조주 신‘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인 ‘성직자 호칭’ 역시 이러한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언론관례상 보통명사로 쓰는 호칭에 대해선 굳이 타종교라 하여 폄하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기도하는 성직자들에게 각자 자기 종교 안에서 최대한의 존경과 예를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師)’와 신부의 ‘부(父)’에는 이미 최대한의 경칭이 들어가 있습니다. 일반신자들은 그것으로도 존경과 예를 다하지 못한다고 느껴서 ‘목사님’ ‘신부님’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유명사인 ‘스님’을 고수해야 된다는 한 불교인이 “목사님, 신부님을 ‘스님’같은 언론용어로 바꾸고 싶다면 ‘목님’ ‘신님’으로 부르자”며 비아냥거리는 격한 자세도 갈등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약간의 이해와 배려정신을 갖추면 종교간 갈등은 조금씩  해소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기도하는 마음속엔 남을 폄하, 비방하거나 폭언, 저주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감사와 축복, 회개와 간구의 말이 있을 뿐입니다. 타 종교가 미신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하고 밉더라도 그들의 기도를 떠 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창조주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기도’를 올려보길 제안합니다. 그러면 타 종교를 훼손할 마음과 시간이 없으리라 봅니다. ‘하나님의 호칭’ ‘성직자의 호칭’을 갖고 싸우고 갈등하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세계종교신문이 신년호부터 ‘시단(詩壇)’대신 ‘기도문’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각 종교의 유명인사부터 무명인들의 절실한 기도가 실립니다. 시(詩)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긴 하지만 기도만큼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지는 못합니다. 기도문을 통해 창조주 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사랑과 이해와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로서 참회하고 간구하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신과 성직자의 ‘바람직한 호칭’을 위해 기도하진 않을 것입니다. 내 종교를 위해 타 종교를 짓밟아야 한다는 기도도 아닙니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창조주 신에 나아가는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근심이고 불만입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세계종교신문 ‘기도문’에 독자 여러분의 절실한 기도를 기다립니다. 그것이 전파되어 창조주 신의 뜻을 전하고 사랑과 용서, 배려의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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