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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勞使)는 동귀일체(同歸一體)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1/29 [10:43]

노사(勞使)는 동귀일체(同歸一體)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1/29 [10:43]
 

노사(勞使)는 동귀일체(同歸一體)

-생사고락의 끈에 매어진 노동자와 사용자-


산업구조의 변화의 물결이 높아지면서 노사간의 갈등과 투쟁이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의 인권보장과 생활향상을 위해 필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사간의 갈등을 상호발전을 위해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간다면 노사는 물론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흐뭇한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극한적인 투쟁은 쌍방이 자멸을 초래하고 나아가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 놓아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시대는 무한경쟁시대다. 국제적인 경쟁에서 어느 기업 할 것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 노동자가 정해진 근로시간에 땀을 흘리며 정성을 다해도 될까 말까 하는 시점에, 사용자와 대립하고 투쟁을 계속한다면 어느 회사인들 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대체 어느 쪽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동안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노사관계가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노동자들은 한두 사람의 선동에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이 회사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의 가족들의 생명줄이 이 회사에 걸려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쟁의(爭議)를 하더라도 회사도 살고 나도 사는 쪽으로 나아가야지, ‘회사야 망하든 말든, 내 주장만 관철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은 서로 죽는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 ‘끝장을 내고 회사를 떠나면 그만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기가 속한 회사를 떠나도 역시 지금과 똑같은 환경을 접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어느 제화공장의 노동자들이 봉급인상을 목표로 투쟁을 했지만, 사장이 쉽게 들어주지 않아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활 터전인 회사가 죽어서도 안 되고, 투쟁은 해야겠고…. 고심 끝에 노동자들은 왼쪽 신발만 계속 만들었다. 기업주로서는 상품으로 팔수가 없으므로 결국 협상에 응하게 되었다. 투쟁을 하면서도 한쪽 신발은 만들어 놓았으므로 오른쪽 신발만 만들면 전체적인 생산에는 차질이 없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자들도 보고 배워야할 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노사는 분규가 일어나면 오늘 살고 말듯이 공장의 기계를 함부로 다루는 일도 있었고, 종업원들이 경영자를 감금하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기업체가 극도로 쇠약해져서 재료가 모자라 일을 못할 지경인데도, 쓰다 남은 재료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신입사원들이 열심히 일하려 해도 중간 간부들이 ‘놀아가며 되는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현장을 자주 비우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하니, 이래서야 회사가 발전할 것이며, 그렇다면 종업원들의 복지문제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처음 회사에 들어갈 때는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 감사함을 잊어버리고 만다. 회사와 나는 일체라는, ‘우리’라는 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 자기를 위해 있기를 바라며 대립적인 관계가 되어 맞선다면 우리 기업의 장래가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에게 시달리는 사용자는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이주노동자들을 낮은 임금을 주고 고용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는 실업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일보 전진하는 기업은 아예 외국으로 회사를 옮겨 버리니, 국내 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수출 밖에 없다.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수출의 요체는 가격과 품질이다. 같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생산을 하는가에 따라 생산 코스트가 결정되고, 같은 일을 하되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작업하는가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게는 품질면에서 지고, 후진국에게는 가격면에서 지는 악조건 하에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노사분규로 인해 내부문제까지 발생한다면 우리가 설 땅이 어디이겠는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총력을 기울여 노사분규로 인한 경쟁력 약화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주의 책임도 크다. 과거 호황을 누릴 때 종업원을 한 가족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기 배만 불렸던 악덕기업주도 많았다. 작은 급료를 주며 많은 일을 시키면서도 ‘있으려면 있고 나가려면 나가라’는 식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여기던 기업주들도 있었다. 회사 살리기에 몰두하지 않고 골프 모임이나 외국여행 또는 로비활동에나 신경을 쓰면서 종업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지 않은 기업주들도 적지 않았다.


몇 년 전 일본의 여러 중소기업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어떤 노동자차림의 사람에게 “사장님 계시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으면서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한 그 분이 바로 사장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작업복을 벗었는데 작업모에는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청바지를 입고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여보, 차를 좀 준비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사장 부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경리 장부를 만지고 있는 아가씨는 사장의 딸이었다.

중소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종업원이 100명이 넘는 중요한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장실은 으리으리하게 꾸며지고, 고급 양복을 입은 사장이 회전의자에 몸을 묻고 으스대는 사람이 많다. 값비싼 옷을 입고 고급 세단차를 타고 회사에 들어와 안하무인격으로 종업원을 대하는 사장 부인도 있다. 사장은 으레 밖에 나가 외식을 하게 되니, 종업원들의 식사가 어떠할지 살펴볼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종업원을 가족으로 생각하며 함께 일하고 함께 식사하며 자연스럽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다. 일과가 끝난 뒤 가능하면 종업원들과 간단한 주석(酒席)을 만든다. 회사에서는 위계질서가 분명하지만 술자리에서는 상하가 없다. 같은 인격적 주체로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장은 대개 오너드라이버로서 일상생활에 젖어있고, 운전기사를 채용하더라도 사장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이 회사는 곧 나의 회사’라는 의식으로 열심히 일할 것이다.

2차 대전의 패전국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이 세계적인 선진국이 되기까지에는 이처럼 기업주들의 근면성실과 근로자들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는 기업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우리나라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근로자와 기업주가 서로를 위하는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천도교의 경전에는 ‘동귀일체(同歸一體)’라는 말이 있다.

나를 중심한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은 한울님의 섭리의 한 끈으로 연결된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네가 살아야 나도 살고, 네가 존재하므로 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慈悲)가 다를 수 없다.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신다.’는 천도교의 사인여천(事人如天)윤리로 회사를 경영한다면,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를 위하면서 회사를 발전시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나는 동귀일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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