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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생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1/29 [09:56]

원불교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생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1/29 [09:56]
 이규원 풍수전문대기자의 사찰과 종교성지순례2


원불교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생가

 

사람이 태어난 자리가

산태극, 물태극의 중심점이라니

 

생가를 중심으로 물길이 에워싸고 있다. 교단의 상징인 일원상처럼 둥그렇지는 않으나 럭비공 모양의 타원형이다. 우측의 백호지역 환포가 한량없이 넉넉하여 여성 지위 향상과 재물 걱정은 당초부터 없었을 듯, 소태산의 남녀평등사상이 여기서 태동했으니….


 

대저大抵 성인이나 각자覺者의 탄생에는 유별난 징후가 나타나거나 일부 천기가 누설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때로는 심상치 않은 태몽을 통해 성인 출현을 예고하는가 하면, 생가에 각별한 땅기운이 나타나 이를 알아챈 사람들이 자진하여 모여들기도 한다. 이후로부터는 참진리를 찾아 기다리던 무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 마을에는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대종사의 생가가 있다. 지금 그곳에는 세계 20여 개국 원불교 교도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교단의 5대 성지 중 첫 번째로 꼽는 교조 탄생지와 대각 장소가 이곳에 있어서 찾는 이들마다 옷깃을 여미고 일념정진에 빠져든다. 그곳, ‘영산靈山성지’는 어떤 땅이어서 도의 깨우침에 목마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일까.

길손이 되어 가더라도 반겨줄 어른이 있어야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법. 좌산左山상사上師가 영산성지에 주석하는 날을 어렵사리 전갈 받아 부리나케 달려갔다. 종단의 큰 어른이 거동하는데 혼자일 리가 없다. 조원오 영광교구장, 김대선 문화사회부장, 이경옥 영산사무소장, 이관도 원음방송사장이 성지 내의 다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원불교는 수장의 권력 이동에 본이 되는 모범적 전통을 갖고 있다. 교헌에 의해 종법사 위位를 유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시기를 판단하여 흔쾌히 물려주고 있다. 그러고는 상사 자리에서 교단 발전의 자양분이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상사는 왕조 시대의 상왕에 비유할 수 있다.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수장 자리를 둘러싼 교권다툼은 정치판을 능가한다는 비난을 수없이 받아 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권모술수와 폭력사태, 여기에다 금권 타락까지 겹쳐 온 국민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916~1943), 2대 정산 송규 종법사(1943~1962), 3대 대산 김대거 종법사(1962~1995), 4대 좌산 이광정 종법사(1995~ 2006), 5대 경산 장응철 종법사(2006~현재)로 이어지는 법통 승계에 분규가 있었다거나 잡음이 발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3대 종법사 말기 교헌이 정해졌고, 종법사 임기는 6년이며 3회 연임할 수 있다. 좌산도 6년을 더 재위할 수 있었으나 2006년 11월 상사위에 올랐다.


좌산은 장 협착증 수술을 받은 후 몸이 쇠잔해 있었다. 산책길에 나선 교무들과 함께 소태산 생가에 들렀다. 일행 모두 간절한 기도가 끝난 뒤 소태산이 태어난 방 앞 툇마루에 앉았다.


“이 자리가 바로 산태극, 물태극의 중심점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자리가 태극을 이루는 곳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돌아보시지요.”

좌산 상사가 설명과 함께 앞장선다.

참으로 놀랍고도 희한한 일이다. 생가를 중심으로 물길이 에워싸고 있다. 교단의 상징인 일원상一圓相처럼 둥그렇지는 않으나 럭비공 모양의 타원형이다.

“해좌(북에서 서로 30도)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이니 정남향에 가까운 햇볕 잘 드는 곳입니다. 뒤쪽의 옥녀봉이 북현무가 되어 병풍치듯 늘어서 좌청룡으로 굽이친 다음 수파구水破口를 열어 놓았어요. 소태산 대종사가 언답堰沓 공사로 방조제를 막기 전만 해도 생가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날락했습니다.”

생가는 삼간모옥으로 전형적인 초가집이다. 여기서는 구태여 동·서사택도 구분 지을 일이 아니다.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헤아려 보니 좌우가 140미터, 남북이 70미터 정도에 이르는 거대한 원이다.

조원오 교구장이 “이곳을 보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풍수지리사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한다. 마침 잘됐다 싶어 “여시아문으로 명풍수들한테 들은 대로만 전해 달라”고 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석가모니의 제자 아난이 불경을 편찬하면서 모든 경전 앞에 붙인 말로 ‘나는 이와 같이 듣기만 했노라’는 의미로 자기 의견이 가미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측의 백호 지역 환포가 한량없이 넉넉하여 여성 지위 향상과 재물 걱정은 당초부터 없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소태산의 남녀평등사상이 여기서 태동했고, 엿장사, 저축조합운동, 간척공사 등을 통한 자립기반 마련의 인간적 도량이 생가의 지기 영향이었음을 부인한 지관이 없었습니다.”


조 교구장의 말이 이어진다.

“집 앞 건너편(남주작)에는 노루가 엎드려 생가를 행해 절을 하고 있는 지형이지요. 이곳이 바로 ‘노루목 대각터’로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 소태산이 입정入定에 든 후 크게 깨달은 장소로 원불교에서 기리는 대각개교절입니다.”

스님이나 수도자가 도를 깨우침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수십 년을 쉼 없이 공부하여 모진 수행정진 끝에 득도하는 각覺의 세계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다. 다른 하나는 시정市井 속에 몸을 낮추고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다 어느 날 갑자기 섬광 같은 혜안이 열려 홀연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 또는 ‘활연대오豁然大悟’라고도 한다. 불가에서는 신라 동시대의 고승 의상 대사와 원효 대사에 견주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길을 맨 처음부터 아홉 제자(송규, 이재철, 이순순, 김기천, 오창건, 박세철, 박동국, 유건, 김광선)들에게 훈교했다. 참선에만 치우쳐 경제생활을 소홀히 해도 안 되고, 세상일에 기울어 신앙생활의 나태함도 동시에 경계했다. 그는 스승 없이 20여 년간의 구도고행 끝에 크게 득도하고 나서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응보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고 대각의 경지를 펴 보였다. 특히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당시의 개교표어는 백 년 후 현재의 물질문명 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많은 미래학자와 종교연구가들의 찬탄을 받고 있다.

“깊고 깊은 산간 촌락을 ‘벽촌’이라 하는데 영광군의 영촌마을은 벽촌 중에서도 벽촌입니다. 소태산과 그의 제자들이 지게와 가래, 삽으로 막아 놓은 방조제는 일월한문이 되어 뜰 밖을 감싸안고 있어요. 마을의 빈곤 해결을 위해 1918년부터 1년간 갯벌을 막아 2만 9천여 평의 농지로 만든 간척답이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정관평(간척한 들녘 이름)은 정산 종법사에 의해 2차 공사(1955)가 이루어져 2만 8천여 평을 보태게 됩니다.”

이런 자생 민족종교를 일제강점하 관리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소태산은 항상 사찰대상이었고, 그가 머무는 익산성지에 감시초소까지 주재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원불교에 대한 탄압과 방해공작은 교단의 존폐위기로까지 몰렸고, 1943년 해방을 2년여 앞두고 대종사가 열반하자 억지로 화장토록 했다. 그의 법력과 민심동요를 두려워한 일인들의 농간이었다. 그의 유해는 익산성지 교단 총부 내 성탑에 봉안되어 있다.


원불교는 현재 7백여 개 교당에 140만이 넘는 교도가 일원상(○) 법신불을 받들고 있다. 일찍이 교육 사업에 앞장서 원광대학교와 영산선학대학교를 설립한 후 일반 인재와 교단 교역자를 양성해 내고 있다. 장애인복지사업, 무료언청이수술 등을 통해 그늘진 사회 구석구석을 보살핀다. 삼소회三笑會(불교 비구니, 가톨릭 수녀, 원불교 정녀 모임)를 통한 종교 간 만남과 화합에도 앞장서고 있다.

세계 각국에는 나라마다의 전통종교나 자국종교가 있다. 중국의 도교, 영국의 성공회, 일본의 신도나 천리교가 이에 속한다. ‘남묘호렌겟교(나무묘법연화경의 일본어 발음)’로 알려진 일본의 일련정종日蓮正宗은 일련日蓮(니치렌, 1222~1282) 승려가 기성불교의 바탕 위에 독자적으로 깨우친 일본식 불교종단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정의 기강이 바로 안 서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혼란스럽던 조선 말기에 3대 민족종교가 태동하게 되니 수운 최제우(1824 ~1864)에 의한 천도교, 증산 강일순(1871~1909)에 의한 증산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한 원불교다. 세 종교 모두 희망 없는 세기말적 현상에 민족의 자존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각 종교의 창시자나 민족의 선각자 생가를 답사할 때마다 풍수학인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풍수적 시각으로 접근해서가 아니고 산태수국山態水局이 여느 곳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영산성지의 옥녀봉도 아름다운 선녀가 머리를 땋고 성자를 기다리는 산세라는 것입니다.”

좌산 상사는 “영산성지 일대가 세계인을 위해 개방될 날이 머지않았다”면서 “미운 사람한테도 예쁜 곳이 있고 예쁜 사람한테도 미운 곳이 있는 법이니 고루고루 사랑하자”고 당부한다.

92주년 대각개교절 때 경산 종법사는 경축사를 통해 “이 사바세계는 무명업장의 어둠 속에서 치성하는 욕심으로 불타고 있다”면서 “나 혼자만 낙원생활을 누릴 것이 아니라 나의 주변에도 따뜻한 법등을 두루 밝히자”고 설법했다.



<사진 캡션1>

생가를 중심으로 물길이 에워싸고 있다. 교단의 상징인 일원상처럼 둥그렇지는 않으나 럭비공 모양의 타원형이다. 우측의 백호지역 환포가 한량없이 넉넉하여 여성 지위 향상과 재물 걱정은 당초부터 없었을 듯, 소태산의 남녀평등사상이 여기서 태동했으니….


<사진2>

생가 뒤의 옥녀봉은 선녀가 머리를 땋고 성자를 기다리는 산세다.


<사진3>

전북 익산성지 내에 있는 대종사 성탑. 민심을 두려워한 일인들이 강제로 화장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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