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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대승 불교 종래 상좌불교 계승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09/25 [09:21]
사상적 진보 인정하지만, 승가 공동체 생활과 계율 무시한 적 없어

초기대승 불교 종래 상좌불교 계승

사상적 진보 인정하지만, 승가 공동체 생활과 계율 무시한 적 없어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09/25 [09:21]

▲ 대승불교사상 이론체계를 확립한 날란다 사원대학 유적  © CRS NEWS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39)

 

대승이라고 해서 소승(小乘)과 연계성이 없는 전연 다른 사상체계가 아니다. 사실은 소승이라는 용어는 가능하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승이 최고이고 소승은 별것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대승(마하야나)에서 초기 불교를 소승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것은 곧 부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소승 대신 상좌부(테라와다)를 사용해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소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초기 불교 사상이 저열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때로는 교리와 사상적 관점에서 대승과의 비교에서 소승이란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대승 소승을 논하면서 우리는 대승은 만능이라는 개념은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대승불교 운동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발전 확장된 것이지, 일방적으로 급진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 건축 받침대에 새겨진 ‘아미타불’이라는 초기 대승불교 사상을 나타낸 브라미 문자.  © CRS NEWS


초기대승 불교 문헌을 분석한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초기 대승주의자들도 승가공동체적 수도원주의를 강력하게 장려하고 아라한 제도의 합법성을 인정하며, 새로운 종파나 질서를 확립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문헌 중 일부는 종종 금욕적 수행, 숲속 거주, 깊은 명상 집중 상태(삼매)를 강조한 것이다.

 

불교 역사에서 특히 대승불교 발전사에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대승불교의 계율관이다. 인도에서의 대승은 초기 불교 종파와 별도의 율장이나 지계(持戒)를 가지려고 한 적이 없고, 따라서 대승을 따르는 각 비구나 비구니는 공식적으로 초기 불교 종파 중 어느 하나에 속했다. 말하자면 소속 부파가 분명하면서 자신의 수도원의 집단 회원 자격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불교가 담마굽타카(법장부)의 사분율 율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나, 티베트 불교 전통이 근본설일체유부 율장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예이다. 현재까지도 대승이 초기 학파를 벗어난 별도의 수도원 종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근본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수호하는 티베트 불교 라마들이 법당으로 향하고 있다.  © CRS NEWS

 

인도 불교 승가에서 부파에 속하는 비구들이 대승이라는 사상적 진보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수도원의 승가 공동체적 윤리적(율장) 규범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부파의 모든 비구 비구니가 대승주의자가 아니었다.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 승려들을 통해 우리는 인도의 대승과 비() 대승 승려가 종종 같은 절에서 나란히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나가르주나(용수)의 제자인 중관 사상가인 아리아데바.  © CRS NEWS

 

같은 수도원에서 함께 살면서 대승 운동이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자금도 마찬가지이다. 남방 상좌부나 대승불교 전통에서 함께 살지만, 사상은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대승적이냐 소승적이냐 하는 다름은 있는 것이다. 프라즈나바라미타(지혜의 완성), 중관, 유식 불성(佛性) 사상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대승사상이 형성되었다.

 

대승 불교운동은 5세기에 많은 성장을 경험할 때까지 아주 작은 규모로 유지되었다. 문헌을 고찰할 때, 5세기 이전에 발견된 사본은 거의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5세기와 6세기는 대승 사본 제작의 분수령이었다고 하는데, 바미얀 마투라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대불.  © CRS NEWS

 

중국의 인도 구법승인 법현(337422), 현장(602664), 의정(635713)이 인도에서 구법 여행할 때 대승이라는 간판을 단 수도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수도원에는 대승 승려와 대승이 아닌 승려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5세기 이후 대승불교와 그 제도는 서서히 영향력을 키워갔다.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 중 일부는 날란다(Nalanda)대학과 비크라마실라 대학 등이다. 5세기에서 9세기 10세기 까지가 전성기였다. 날란다 사원단지는 결국 수 세기 동안 인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불교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인도 구법승 현장이 인도에 가서 보니, 대승은 50% 정도였을 뿐이다.

 

인도에서의 대승불교 운동은 상당한 기간을 두고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도 대승의 문헌과 철학은 실크로드와 같은 무역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도달했고, 나중에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아시아 불교는 대승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고, 이는 중국불교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대승 불전 작품은 간다라(Gandhāra)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대승의 확산을 위해 이 지역이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대승 학자들은 실크로드 불교 전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로칵세마(지루가참Lokakṣema167186),담마락사(축법호Dharmarakṣa 265313), 쿠마라지바(Kumārajīva 401) 및 다르막세마(다무참Dharmakṣema 385433)와 같은 역경가가 포함된다. 둔황 유적지는 대승불교 연구에 특히 중요한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다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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