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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아내의 행동은 정당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9 [08:55]

삶의 향기-아내의 행동은 정당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9 [08:55]

삶의 향기

아내의 행동은 정당했다


자식들이 장성하니까 아내는 무엇이든 자식들을 우선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펄쩍 뛰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한참 성장과정이라고 자식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 위주로 만들고, 많은 것과 좋은 것은 으레 자식에게 주려고 하며, 또 드러내놓고 자식들의 편을 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한 경우 밥에 잡곡을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애들이 방귀를 뀌니까 안 된다는 식이다.

예전엔 이런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 무서운 게 없어졌다."는 아내의 말처럼 이제는 남편을 의식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때의 일이다. 아들이 토마토 주스를 먹고 싶다며 엄마에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아내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고, 아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기를 바라서 "토마토를 가져다가 씻어서 믹서에 갈아먹으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펄쩍 뛰면서 직접 토마토를 주스로 만들어 왔다. 사건은 점점 점입가경이었다.

주스를 마시려고 컵을 보니 두 컵에 들어있는 주스의 양이 달랐다. 앞의 컵에는 가득 들어있고, 뒤의 컵에는 좀 적게 들어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앞의 컵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시려는데 아내가 말했다.

“그것은 아들 것이니, 뒤의 것을 마시세요.”

아내는 내심으로 아들 것은 가득 넣고, 나의 것은 적게 넣어 각각 그 몫을 정해 놓았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 것을 가져온 것이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남의 것을 훔치려다 주인에게 발각되어 야단맞는 기분이었다. ‘내가 차별 당하고 있는 건가?’ 아들 앞에서 아버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많은 것을 먹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앞에 있는 컵을 가져온 것뿐인데 아내의 그 말 한 마디에 졸지에 식탐하는 아버지로 전락해 버렸다.

난처했다.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자존심이 구겨지더라도 작은 것으로 바꿔 와야 하나, 아니면 큰소리쳐서 잘못된 처사를 바로 잡아야 하나?' 머릿속에서는 이 두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결국 성질을 접었다. 아무 소리 않고 들고 있던 주스를 다 마신 것이다.

마음이 씁쓸했다. 소외감을 넘어 비참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꼼지락거려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주는 지금도 아내가 이렇게 대우하는데, 무능력자가 되면 어떻게 될까?' 적지 않는 분노도 일어났다. '아버지보다 아들을 우선하는 행동이 바람직한 것이며, 그런 행동이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버릇 나쁜 애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내를 이길 생각은 추호도 없고,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으며, 설령 이기려고 해도 이길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제는 집채처럼 커져버린 아내를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부부애가 먼저인가, 모성애가 먼저인가. 동물 암컷은 발정기가 되면 새끼를 가지기 위해 수컷에게 접근하여 온갖 유혹을 하지만, 일단 임신하고 새끼를 낳으면 수컷을 멀리하고 새끼 키우는데 전념한다. 곰곰이 생각하니,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이런 동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이 아버지보다 더 강하다.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부애보다 모성애가 우선하는 것이 진리’라는 결론을 맺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니, 아내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남편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아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그래도 속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애써 위안해본다.(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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