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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양재역 주변-서울의 관문답게 역사적 聖所 즐비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7 [13:32]

서울 서초구 양재역 주변-서울의 관문답게 역사적 聖所 즐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7 [13:32]

정성수의 도심속 종교기행 <3>서울 서초구 양재역 주변

서울의 관문답게 역사적 聖所 즐비

 

양재동성당·원불교강남교당·구룡사·온누리교회가 성장축

말죽거리 옛이름 희미해도 종교는 더욱 창성할 것 


사진 위부터 양재동 성당, 양재동 성당, 원불교당

 

서울 서초구 양재역 주변은 1985년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이 생기기 전만해도 ‘말죽거리’라는 익살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도심에서 성남 가는 시내버스에는 어김없이 말죽거리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말죽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서울 도성에서 충청·전라·경상 지방으로 나가는 벼슬아치나 삼남지방에서 과거보러 오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잠도 자고 말죽도 먹이며 쉬어가던 주막거리였다. 오늘날에도 인근에 양재인터체인지, 만남의 광장, 한국트럭터미널 등이 조성돼 있어 교통과 유통 구조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울의 관문이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말죽거리 주변에는 ‘뼈대 있는’ 종교시설이 많다. 양재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뱅뱅사거리와 매봉역 사이에 강남 최초의 가톨릭 예배당인 양재동성당이 있고, 매봉역과 성남대로 사이에 역시 강남 최초 교당인 원불교 강남교당이 있다. 같은 구역에 조계종 통도사 서울포교당인 구룡사도 자리잡고 있다. 또 성남대로와 서초I.C 사이에 강남 최대 개신교 성전인 온누리교회가 있다. 이들 ‘강남의 성소(聖所)’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지역 종교의 성장축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강남권 최초 공소 양재동성당

 

우선 도곡동 951-4번지에 속한 양재동성당은 ‘ㄴ’자를 돌려놓은 형태의 벽돌조 단층 건물이다. 건물도 소담하고 아름답지만, 벽면에 붙은 하늘을 나는 듯한 예수 석상이 인상적이다. 가톨릭은 보통 공소→준본당→본당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양재동성당은 1912년 서울 중구 중림동 소재의 약현성당에서 분리돼 나와 게리(양재리)공소로 출발했다. 당시 두세(C Doucet) 신부가 설립한 강남권 첫 성당이다. 신자들은 연이어 설립된 잠실리(현 잠원동) 준본당에서 잠시 미사를 보다가, 양재리가 서울로 편입되자 1965년 게리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해 다시 모여들었다. 승격 당시 이름은 말죽거리 본당이었으나, 이듬해 양재동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현대식 건물과 종탑은 1975, 77년 각각 축성됐으며, 1차 축성미사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게리공소 시절에 있던 문화재 같은 추억의 종탑은 한 시골 성당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양재동성당은 쑥쑥 성장해 사당동 본당(1971), 청담동본당(1973), 반포본당(1976)을 잇따라 분할시키면서 강남의 ‘대부(代父) 성당’으로 우뚝 서 있다. 양재동성당은 1999년 관할 서초구청으로부터 최우수봉사단체로 선정됐으며, 지난해 강권수 주임신부가 부임해 봉사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양재동 성당 옆에 과거 성남 가는 구 도로며, 싸리고개가 그대로 남아있어 옛 감흥이 되살아난다.

 

서울시 공모전 선정작 강남교당

 

양재동 6-9 소재 강남교당은 강남권 최초의 원불교 교당이기도 하지만, ‘해외원조교당’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박청수 교무가 30년간 주석하며 해외봉사에 주력했던 혼이 서린 곳이다.

양재역에서 물어물어 강남교당을 찾아가니, 대지 227평 3층짜리 소담한 흰색 건물이 나그네를 반긴다. 주차장으로 이용하는 교당 마당은 고요함 그 자체다. 유난히 친절한 하태은(34) 교무의 안내로 교당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대각전으로 불리는 큰 법당은 2층에 있었고, 1층과 3층에도 각각 작은 법당이 있다. 1층 법당은 선원(禪院)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이곳은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명상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대각전에는 원불교의 상징인 둥근 원이 조각된 일원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대형촛대와 화로 모양의 좌종, 목탁, 죽비 등 불전도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엄·이건축이 설계했다는 강남교당은 서울시 건축설계 공모전에 선정된 바 있다. 일원상을 형상화한 법당 내부가 어찌나 경건한 지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 진다.

강남교당은 과거 해외 오지국가를 돕는 일에 집중했으나, 지금은 지역민을 위한 봉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거의 매일 지역민을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월요일(격주) 오전에는 조대현 한국요리전문가를 초청해 요리교실이 열린다. 화요일(격주)에는 소리꾼 김성애를 초청해 판소리교실을 진행한다. 화요일 저녁과 수요일 오전에는 선원에서 명상 위주의 선방이 운영되고, 토요일 오후에는 절수행교실이 열린다. 매월 셋째 주 목요일 밤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는 하우스콘서트가 마련된다. 모두 지역주민을 위한 것이다. 교도들은 지역내 노인회관, 아동복지시설에 나가서도 봉사한다.

1979년 대산 종법사의 명으로 서울 우이동 수도원(현 봉도청소년수도원)에 부임한 박청수 교무는 그야말로 억척스럽게 교당을 꾸려나갔다. 그는 1981년 교도 3분의 2가 살고 있는 강남 논현동에 부지를 마련해 교당을 옮겼고, 1984년 현재의 자리에 안착했다.

박 교무가 이끄는 강남교당은 가톨릭 성 나자로마을 등 이웃종교 시설도 열심히 찾아가 도왔으며, 특히 캄보디아 난민돕기를 시작해 인도,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펼친 눈부신 사회봉사 업적은 한국종교사에 큰 획을 그을만하다. 박 교무 후임으로 한덕천 교무가 부임해 김명정, 하태은 등 보좌교무와 함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더 무게를 두어 매진하고 있다.

 

양재천변 구룡사엔 가을빛 완연

 

양재동 399-1 구룡산 자락에 있는 구룡사는 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서울포교당이다.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이 구룡사 주지 소임을 겸하고 있다.

정우 스님은 1985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도심속 대중불교의 장을 열었으나, 강남권 포교에 뜻을 두고 양재동으로 이전해 천막법당에서 법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치열한 기도와 원력 끝에 1989년 대지 700평을 매입해 지상 7층, 지하 2층의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는 지금의 구룡사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지상 2·3·4층에 통층방 형식으로 대웅전인 만불보전을 꾸몄으며, 만불보전에는 3면에 만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5층에는 적멸전, 6층 시민선방, 7층 염화실, 지하 1층 극락전과 극단 신시, 지하 2층에 주차장이 있다. 1층에는 문화회관과 유치원이 들어서 있다. 외부에서 보면 4층까지는 현대식 석조건물이고, 5·6·7층 부분은 전통 기와가 올려져 있어 웅장해 보인다.

양재천변 구룡사는 산사는 아니지만, 건물 옆 별채의 감나무가 일품이다. 주변이 탁 트여 일출과 일몰을 고스란히 받고 자란 감나무는 벌써 주황빛을 띠며 가을을 알리고 있다. 2층 로비에는 여러 종류의 법요집이 놓여 있다. ‘보왕삼매론’편을 펼치니 옛 선사들의 가르침이 쏟아져 나온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로써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아라’하셨느니라.”···.

만불전을 안을 들여다보니, 여기저기서 남녀 불자들이 절수행에 여념이 없다. 저들은 치열하게 몸을 바닥까지 구부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있다. 그것이 곧 불교의 힘이 아니던가. 구룡사는 많은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어린이 교화에 힘을 쏟고 있다.

 

온누리교회 자랑은 세계최대 모자이크 예수상

 

 

온누리교회는 서초I.C와 성남대로 사이 우면산 남쪽자락에 앉아 있다. 양재역에서 성남대로를 따라 가다가 첫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일동제약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우회전하면 멀리 2차선 도로 끝에 예수상이 그려진 신비한 건물 하나가 바라다 보인다. 바로 온누리교회다. 일동제약에서 교회까지는 200여미터이고, 도로 양쪽에 서울의 10대 부촌에 속하는 양재동 고급주택가가 도열해 있다. 주택가 안에 말죽거리공원, 방아다리공원 등 큰 공원만 2개나 있다.

우면산을 병풍 삼아 웅장하게 서 있는 온누리교회는 횃불선교회관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간직한 채,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다.

서초구 양재동 55번지 소재의 이 건물은 지난 1991년 기독교 실업인이었던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회장이 기독교 선교 지원이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기독교선교횃불재단’(일명 횃불선교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대지 4000평에 대성전,·관리동,·숙소동 등 3개 동으로 이뤄진 이 건물은 완공되기가 무섭게 ‘이달의 명건물’로 조명받으며 화제를 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성전 외벽에 조성된 예수상은 가로 21미터, 세로 21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성화로 기록된다. 성경 요한복음 10장14절에 나오는 ‘선한 목자’를 형상화했는데, 그 웅장함에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조형물은 멕시코산 특수타일 500만장이 사용됐고, 재질과 색상면에서도 세계최고로 꼽힌다. 양을 인도하는 예수의 모습이 무척 성스럽고 정겹게 다가온다.

횃불선교회관으로 쓰일 당시 대성전에는 3500석 규모의 대강당과 2330석 규모의 대·소 세미나실이 갖춰져 있었다. 관리동에는 각종 기독교단체가 속속 입주했고, 지하에는 10만권의 장서가 구비된 도서관이 마련돼 있었다. 숙소동은 62실, 25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45실의 기도실이 장관이었다. 모든 건물은 지하층으로 연결됐고, 지하층에는 체육시설과 카타콤을 연상케 하는 기도실이 마련돼 있다. 3개동의 중심이자 대성전 입구는 원형광장으로 조성돼 우면산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 건물이 온누리교회로 넘어간 것은 1999년 ‘옷로비사건’ 직후다. 이른바, 최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에게 고가의 옷을 사주며 로비를 했다는 사건이다. 2001년 이 사건 자체는 대법원 무죄판결이 나지만 외화밀반출 등 혐의로 구속된 최 회장은 대한생명, 신동아건설, 삼풍산업 등 주력기업을 모두 잃고마는 불운에 처한다. 횃불선교회관도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 최 회장과 인척관계로 알려진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가 횃불선교회관으로 임대해 들어가기에 이른다. 하 목사는 1985년 서빙고에서 온누리교회를 세워 성공적으로 목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서빙고교회를 새로 지을 수 없게 되자, 횃불선교회관을 교회로 쓰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 건물을 혹자는 횃불선교회관으로, 혹자는 온누리교회로 따로따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 관리동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로 바뀌었다.

온누리교회에는 특별한 예배의식이 있다. 엄숙하고 묵상하는 예배에서 탈피해 마치 콘선트홀에 온 것처럼 음향과 조명이 어우러진 각본 있는 목회를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하 목사가 가진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풍부한 인맥과 사회문제를 푸는 시의적절한 맞춤형 운동도 교회의 고속성장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온누리교회는 선교사 2000명, 사역자 1만명 파송의 비전을 세우고 전 교인이 정성을 모으는 중이다.

말죽거리라는 이름은 이제 지역민들의 기억에서 희미해 가고 있지만, 이곳에서 펼쳐질 종교역사는 성소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함께 점점 더 빛을 발할 전망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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