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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영모의 깨달음-박영호(씨알 자문위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5 [17:40]

<2>유영모의 깨달음-박영호(씨알 자문위원)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5 [17:40]

하느님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니르바나의 세계

 

얼나 깨달으면 죽음 두렵지 않고 탐진치 사라져

한국교회 속죄신앙에서 영성신앙으로 전환해야

예수의 영성신앙 담긴 도마복음은 ‘사랑의 핵폭탄’


빛이 좀 죽어야 숨이 살고

꼴이 좀 빠져야 얼은 바릅니다

빛 낼라고만 낯가죽을 돋구고

꼴 보일라고만 맘이 키인다믄요

그래요 꼭 그럴진댄 얼 없이 산갖 목숨 스럴걸


다석 유영모는 생전에 2000수가 넘는 시를 썼다. 이 시의 제목은 ‘껍데기 몸 삶’이다. 다석의 우리말글살이는 해석이 좀 필요하다. 이 시에서 빠져야→초라해야, 키인다믄요→신경쓴다믄요, 얼 없이→싱겁게, 산갖 목숨→살아있는 가죽 목숨, 스럴걸→사라질 걸로 풀이하면 뜻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은 유영모의 영성신앙 출발점이다. 다석은 하느님하고 얼숨이 터져야 한다고 말했다. 불교의 ‘돈오(頓悟)’ 즉, 일순간 깨닫다는 말은 우리의 잡된 생각을 다 토해내야 함을 의미한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다석은 이 세상의 지식이 모두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다 토해내 무지(無知)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잡념이 모두 떠난 자리에서 하느님의 성령이 와서 기통(氣通)돼야 한다. 학교서 배워서 성자를 만들 수 있었다면 서울대학교에서 성인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이 하느님의 얼을 숨 쉬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답답한 세상에 살다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하면 시원하게 뚫린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자살직전까지 갔다가 하느님과 소통한 뒤 종교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종교서적만 집필했다.

다석은 16세 때인 1905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YMCA는 성역화 돼 있어 애국지사들이 드나들며 을사늑약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다석은 이들 애국지사의 연설을 들으러 다녔다. 그리하여 연동교회에도 나갔다. 예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는데, 좁은 문은 얼나로 사는 문이다. 큰 문은 몸나로 사는 문이다. 몸뚱이를 위해 살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은 큰 문을 원한다. 교회나 절에 가는 사람도 몸뚱이를 위해 복 받기 위해 간다. 진짜 얼나를 깨닫기 위해 가는 사람은 드물다. 겉만 신앙인이다. 다석은 얼나를 위해 살라고 강조했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춘원 이광수와 유영모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때 춘원은 자신보다 두 살이나 많은 다석에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톨스토이 전집을 보여주었다. 다석은 신채호와 여준의 영향을 받아 불경과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그가 훗날 기독교의 교의신학을 비판한 것도 기독교가 교의에 입각한 독선적인 귀족종교로 흘렀기 때문이다. 다석이 유학차 일본에 갔다가 대학을 안 간 것은 순전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다석은 고국에 돌아와 “농사짓고 살겠으니 땅을 사 달라”고 부친을 졸랐으나, 땅을 사주지 않아 귀농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로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다석은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강하는 사람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다석은 관(官)보다 민(民)으로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우리나라는 학벌귀족이 있어 대학 못가면 시집 장가도 갈 수가 없다. 다석은 일백년 전에 학벌이 필요 없다고 설파한 인물이다.   

예수의 영성신앙은 교회에서 씨가 말랐다. 바울의 사도신경은 바울교리의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신을 믿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삼위일체가 무슨 말인가.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신으로 따로 있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계신다. 다석이 이 정도라도 말해줬으니, 고마운 일이다. 옛날 사람들은 하느님을 높은 보좌에 앉아있는 황제처럼 생각했다. 예수는 하느님 우측에 앉은 우의정쯤으로 여겼으니,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다석은 하느님을 허공(빈탕)의 하느님으로 정의했다. 빈탕이 아니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무극은 허공이고, 무극에서 우주가 생성되어 태극이 되었다. 하느님의 자리에서는 밤낮이 없다. 성령으로 충만한 허공, 그 자체가 하느님이다. 그런데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사람처럼 생겼다. 창세기가 웃기는 얘기다. 

가장자리가 없는 허공,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중심만 있다. 무한우주는 신비롭다. 그것이 곧 하느님이다. 불교에서는 생멸하는 속에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한다. 피안의 세계가 니르바나요, 곧 허공이요, 하느님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아 증거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예수의 몸뚱이가 얼나가 아니다. 예수의 참생명이자, 나의 참생명이 얼나다.

동정녀, 육체부활 모두 쓸데없는 소리다.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하는데, 예수를 낳았으면 이미 동정녀가 아니다. 얼나를 깨닫지 못하면 망신스런 일이 자꾸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얼은 성령이요, 곧 하느님이다. 교회는 사도신경이라는 타율적인 신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육체부활도 거짓말이다. 예수가 부활한 뒤 왜 문도 안 열고 들어오고 나갔으며, 육체부활했다면 왜 모든 제자들이 못 알아봤겠나. 사도신경은 이름도, 내용도, 목적도 외울 가치가 없다. 예수가 2000년 전에 왔을 때 심판하지 왜 슬그머니 하늘로 올라가서는 다시 와서 심판해야 한다고 하나. 모두가 거짓말이다. 심지어 돈독한 크리스천인 슈바이처조차 “예수는 기적을 안 일으켜도 될 때는 일으키고, 정작 일으켜야 할 때는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죄지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 몸이 다시 산다, 영원히 산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오늘의 한국기독교는 속죄신앙, 대속신앙에서 빨리 벗어나 영성신앙으로 전환해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양길을 걷는 구미 기독교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된다.

사람이 영적으로 깨닫고 나면 어떻게 달라질까. 우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무엇이 겁나나. 사람이 인격이 성숙한지를 알려면, 죽음을 겁내나, 겁내지 않나 보면 알 수 있다.

둘째는 탐진치가 없어진다. 사람들이 엄청 욕심을 부린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나 흉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국회의원들도 국민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재선을 위해 싸우는 것 아닌가. 모두가 욕심이다. 다석 선생은 관리자나 공직자가 되지 말고 씨알로 살자고 말했다. 탐진치가 사라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예수가 바로 그런 삶을 보여줬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줬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줬다. 에고(ego)가 없어야 한다. 다석은 ‘감히 나한테 그럴 수 있나’하는 그런 마음도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바지저고리로 살라는 말이며, 끊임없이 양보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계속 안 지려고 싸움을 한다. 요즘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힘쓰는 것을 보면 통쾌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누구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진성(瞋性)을 버리고 순리를 택해야 한다. 북한은 상종하지 못할 존재지만, 상종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그렇다면 굳이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도와주고 살면 어떨까. 북한이 남한이 밉다고 중국으로 붙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려면 우리가 좀 어리석게 보이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석은 돈 빌려주면 이자는 받지 않았으나 반드시 조건을 붙였다. 담배 골초한테는 “담배 좀 끊어라” 하는 식이다. 북한도 그런 조건을 붙여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셋째는 성욕을 이겨야 한다. 어떤 목사는 교도소에서 교화설교를 하다 소녀 성폭행으로 구속되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러한 양면성으로는 곤란하다. 영적으로 온전히 거듭나야 성욕이 물러난다. 사람은 오성(悟性)을 통해 제나(에고)가 없어진다. 하느님 앞에 내가 없어진다. 하느님은 참 나이고, 나는 거짓 나다. 이성(理性)을 통해서는 내 안에서 지혜로운 말씀이 나와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내라는 말이다. 감성(感性)을 통해서는 적이 없어야 한다. 천하무적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다석은 야단을 칠 때는 호되게 야단을 쳐도 에고가 없었다. 그리고 무척 겸손했다.

제나가 죽으면 어떤 변화가 올까. 얼나를 깨달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다. 구경각에 이른 사람끼리는 다 통한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하나로 다 같은 것이다. 붓다와 예수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렇게 같을 수가 없다. 두 분 사이에 오간 흔적은 전혀 없지만, 가르침이 일치한다. 두 분 다 구경각을 이뤘기 때문이다. 다석은 공자․맹자․ 노자․붓다․예수 등 성인들을 다 좋아했다. 그분들이 받드는 절대자는 한 분이기 때문이다. 유교에 ‘공석불난(孔席不暖)’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한 곳에 편안하게 머물지 않고 고행을 많이 했다. 유교는 고난의 종교였다. 고난이 없었다면 유교는 인간 세상에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와 붓다도 제자들과 편안하게 예배보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통일복음서’를 만든 적이 있다. 여기에는 동정녀도, 육체부활도, 이적기사도 다 빼버렸다. 현대에 와서 발견된 도마복음에도 이런 내용들이 다 빠져있다. 톨스토이는 확실히 직관력을 가졌고,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도마복음을 읽고 놀랐다. 뚜껑을 열어보니 도마복음은 바울의 교의신학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교의신학자들이 도마복음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A.D. 367년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영지문헌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당시 영지문헌을 신봉했던 수도사들은 아무리 주교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영지문헌 중 가장 중요한 도마복음 등을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파묻어 버린 것이다. 왜 아타나시우스가 영지문헌을 불태우라고 했을까. 예수가 죽은 뒤 예수의 직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뤄 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체로 무식꾼들이었다. 예수 2~3세다. 신자들이 이스라엘식 그리스어인 ‘코이네’를 사용해 복음서를 집필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시아적 영어’일 것이다. 처음에는 이들 공동체에서 예수의 영성신앙 추종자들이 강했고, 바울의 교의신앙 추종자들은 약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세력을 정치세력으로 끌어들이면서 두 무리 가운데 바울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1945년 도마복음이 발견된 것은 히로시마폭탄보다 더 강렬한 사랑의 핵폭탄이었다. ‘제나를 죽이고 얼나로 솟나자’는 예수의 뜻이 담긴 도마복음은 불교나 유교와도 그대로 맥이 통한다.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말은 114마디다. 쿠란이 114장으로 이뤄졌는데, 예사롭지 않다. Q자료는 4복음서보다 먼저 나왔고, 도마복음은 Q자료 보다 먼저 나왔으니 더욱더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예수의 영성신앙은 도마복음에 그대로 드러난다. <정리=정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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