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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신유의 은사가 충만한 파주 방주순복음교회

문윤홍 대기자 | 기사입력 2022/12/06 [16:39]
하나님 치유와 기적을 실현한 신용호 원로목사와 반드보라 사모의 감동 스토리

사랑과 신유의 은사가 충만한 파주 방주순복음교회

하나님 치유와 기적을 실현한 신용호 원로목사와 반드보라 사모의 감동 스토리

문윤홍 대기자 | 입력 : 2022/12/06 [16:39]

하나님 치유와 기적을 실현한 신용호 원로목사와 반드보라 사모의 감동 스토리

 

새 걸레보다 헌 걸레가 더 잘 닦인다. 걸레는 더러운 것을 거침없이 닦을 수 있어야 가치가 있다. 잘 닦이지 않는 걸레는 소용이 없다. 걸레 중에 더럽다고 몸을 사리는 걸레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걸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잡으시고 이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해주신다면 몸이 다 닳아 없어질지라도 쓰임 받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몸을 사린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앉아서 계산하고 잰다. 그리고 포기한다. 뒤로 뺀다. 그러나 걸레에는 그럴 일이 없다. 그저 쓰임 받는 것만으로 기쁘고 감사하다. 걸레이기에 불평할 일도 없다. 어떻게 쓰임을 받든 불평이 없다. 그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데에 감사할 따름이다.’

-신용호 목사·반드보라 사모 자서전 내 코에 걸린 칠색 실의 프롤로그 중에서

 

실제로 이러한 자세로 목회를 해온 주인공은 파주 방주순복음교회를 개척하고 섬겨온 신용호 원로목사이다. 신 원로목사와 반드보라(춘자) 사모 부부는 하나님의 충만한 성령체험과 신유의 은사 등을 통해 온갖 고난을 헤쳐 나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 경기 파주시 법원읍 보광로 1794번길 63에 위치한 방주순복음교회 일대에는 교회와 예빛기도원, 예빛 수()요양원을 갖추고 신앙과 복지를 연계해 전인 구원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는데 이곳에는 신 목사 부부의 기도와 곳곳에 땀과 정성이 배어있다.

▲ 아들 신정욱 방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의 마산고등학교 졸업식 날에 마산고등학교 교정에서 아내 반드보라 사모와 함께 기념 촬영한 모습.

 

신용호 원로목사와 반드보라 사모의 드라마틱한 천로역정(天路歷程)’

 

신용호 원로목사는 지금도 걸레의 철학과 정신으로 실제로 교회와 관련 시설들을 손수 청소하면서 걸레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마음으로 늦깍이 목회를 시작했다. 일반 목회자들처럼 젊은 시절에 신학대학교를 거쳐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젊은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는 일반적인 과정을 밟지 못했다. 이른바 좋은 시절에는 세상에서 즐길 것 다 즐기고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하나님에게 호되게 매를 맞고 정신 차린 후 뒤늦게 목회를 시작한 것이다.

 

신 목사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솔로몬의 고백처럼 물질의 풍요함이 헛되고 헛됨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인생을 살았다. 이른바 지상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모든 전쟁을 치르며 살아왔다. 골프 치는 사람이 희귀했던 1980년대에 그는 매일 골프를 치고 살았다. 그것도 최고급 승용차만 몰고 다니면서 어린 아들에게 골프를 가르쳐주며 함께 골프장을 다니기도 했다. 물론 신앙생활은 등한시했다. 하나님은 그와 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평생 동반자 반 사모와의 만남탁구 선수와 코치, 대기업 직장생활사모의 사업번창

 

신 목사는 천년고도(千年古都) 경북 경주(慶州)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5살 되던 해에 고등학교 교사였던 부친은 6.25 한국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 당시 교사는 징집 면제 대상이었는데도 부친은 장교 훈련을 받고 1953년 임관하자마자 곧바로 전투에 투입돼 그해 3월 전사(戰死)했다.

 

부모님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신 목사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인이다. 그가 다녔던 교회는 경주역 앞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은 경주교회였다. 고신측 장로교회였는데, 어머니 손을 잡고 성탄절 날 함께 예배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신 목사는 증언한다.

 

모친은 이 교회 전도사였다. 어머니는 목사님과 함께 심방을 다니면서 교회사역을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곤궁했던 신 목사 가족은 집 바로 앞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서 나눠주던 구호물품 강냉이와 가루우유, 밀가루, 옥수수가루, 통조림캔 등을 받아와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신 목사와 어린 여동생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떴다. 그렇게 해서 두 남매는 고아가 됐다. 이후 두 남매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게 됐는데 큰아버지도 살림 형편이 좋지 않았다. 신 목사는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면서 어렵게 자랐다.

▲ 신용호 목사의 현대중공업 총무과 대리로 근무할 당시의 증명사진

 

신 목사는 경주 계림초등학교, 경주중·고등학교를, 반드보라 사모는 월성초등학교, 경주 여자중·고등학교를 각각 나왔다. 신 목사는 중학교 때부터 탁구 선수를 했다. 경상도 대표로 전국대회에도 출전해 우승하기도 했다. 울산 현대조선에 근무할 당시 전국체전에서 경상남도 대표로 코치 겸 선수로 참가하여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시 신 목사는 경상도에서 탁구로는 나름 유명 인사였다. 탁구로 한참 잘 나갈 때 중학생들을 선발해 지도했는데, 그중 한 명이 현재 삼성탁구단 총감독 강문수이다. 강 총감독은 유남규를 지도했는데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KT&G 감독 서상길도 그때 가르쳤던 제자인데 여자 탁구계에서 유명한 감독이다. 두 제자 모두 한국 탁구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게 된 것도 처음에는 울산 조선소 탁구팀 코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후 총무과장을 하다가 창원에 있는 현대정공으로 옮기면서 간부로 근무하게 됐다. 반드보라 사모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집안 살림살이도 크게 나아졌다. 그렇게 해서 울산과 창원에서 20년 이상 생활하게 됐다. 회사에서의 업무는 주로 접대와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탁구코치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사귈 수 있었다. 그 당시 신 목사는 골프 치고 놀러 다니면서 밤이면 술 마시고 늘 집 밖으로 돌았다. 교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그때 사모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 신용호 목사의 탁구선수 시절에 탁구 경기를 마치고 여동생  신순희  권사와 함께 찍은 사진.

 

반 사모는 개인사업을 했는데 부동산 관련 일이었다. 사모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친정아버지의 재테크 하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수완도 있었다. 신 목사가 조선소에 아침 일찍 출근해서 힘들게 벌어오는 월급을 그냥 받아쓰기가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받는 월급을 써서 없애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모아 투자로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 사모는 월급을 모아서 여기저기 재테크를 하기 시작했는데, 작게 시작한 사업이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재산이 모이더니, 주유소를 운영하게 됐다. 그 당시에 주유소를 소유할 정도이면 지역 유지는 되어야 했다. 울산도 한참 도시개발이 이뤄지던 시기였기에 사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지역 공항 개발 소식을 미리 알고 핵심지역에 투자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사모는 개발 요지의 땅을 선점해 매입해서 매입가격의 몇 배를 받고 팔고 다시 핵심 상권에 가까운 땅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늘려나갔다. 사모의 탁월한 투자능력으로 재산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늘어나게 됐다.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당시 신 목사는 사장님소리를 듣고 살았다, 은행도, 거래처를 가도 VIP 대접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절절매면서도 반가워한다. 인맥을 따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저절로 따라 왔다.

 

잘 나가던 사업체가 날아가고 저택마저 차압당해두 자녀와 생이별하고 무작정 상경

 

그러나 그렇게 잘 나가던 시절도 일단락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신 목사가 돌이키길 기다렸다. 하지만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던 신 목사는 여전히 돌이킬 마음이 없었다, 여기가 좋으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인내의 끝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사기꾼 하나가 붙드니 잘 나가던 사업체가 하나 둘 날아가기 시작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많았던 재산이 바람에 겨가 날아가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소유한 재산에 모두 차압이 들어왔다, 결국 신 목사 가족은 쫓기듯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처남에게 사업체 정리를 맡기고 도망치듯 울산을 떠나야만 했다. 아들은 유학시절 배운 일본어 전공 덕분에 일어강사를 하면서 먼저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딸은 오빠가 있는 부산으로 피해 있으라 하고 신 목사 부부는 일단 울산에서 가장 먼 곳이라고 생각한 서울로 올라왔다, 막상 서울에 왔지만 살 길이 막막했다. 신 목사의 여동생네 집에서 잠시 신세를 졌다.

 

주일이 되어 여동생이 다니는 영등포에 있는 교회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지금 여기서 자살하려고 하시는 분이 계시죠. 안 됩니다. 절대로 자살하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신 목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신 목사는 희망과 소망을 모두 빼앗겼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그 큰 집은 물론이고 집에 있던 소장품들, 심지어 결혼사진 한 장마저 모두 두고 쫓기듯이 도망쳐 나와야 했다. 달랑 승용차 한 대만 몰고 두 자녀와 생이별하면서 도주해야만 했다.

 

그때에도 신 목사는 믿음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낙심이 됐고 창피했다. 가족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인생을 포기하는 길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니 그때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절대 포기해선 안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또 한 주간의 시간이 흘러 주일이 돌아왔다, 그날도 예배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설상가상으로 사모가 갑자기 배를 잡고 쓰러졌다. 움켜쥔 배에서 큰 덩어리가 만져졌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 소견으로는 암이 의심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집이 망한 것도 정신 못 차릴 지경인데 사모마저 암이라니. 그야말로 멘붕이 왔다. 서울에 올라와서 정착해 다니던 교회로 찾아갔다. 목사님에게 사모가 암에 걸린 것 같다고 얘기하고 빨리 나을 수 있게 기도를 부탁했다. 정 목사님은 신유의 은사가 뛰어나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을 기도로 고친 것으로 잘 알려졌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를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고 나니까 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구한 것이 지정 병원에 가서 암 진단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래야 확실하게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간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반드보라 사모의 암 말기 판정평창 기도원에서 불 연단생명을 살리신 하나님

 

서울 문래동에서 그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큰 병원에서 받은 진단 결과, 난소암 4기였다. 이미 암세포가 장기까지 너무 많이 퍼져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수술에 성공해도 3개월, 길어야 6개월 시한부라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사모가 받을 충격과 고통을 생각하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뭐든 말씀만 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병원에서 진단서를 갖고 교회 담임목사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목사님에게 안수 기도를 부탁했더니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하고 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원도 평창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섬기라고 했다. 의사는 절망을 말했지만 그 목사님은 희망을 말했다.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들려주셨다. 0·001%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사모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신 목사 부부는 강원도 평창 기도원에 들어갔다. 어렵게 찾아서 막상 들어가 보니 기도원 건물은 없고 덜렁 기둥 네 개만 보였다, 당연히 벽도, 지붕도, 창문도 없었다. 바닥공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그냥 짓다가 그만둔 기둥에 스티로폼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허름하게 설치된 작은 비닐하우스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기도원 건물의 전부였다.

 

 

평창 기도원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교회에서 199279일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마지리 산80번지 4만평을 구입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 건축비가 없어서 건축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렇게 지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기도원 생활이 시작됐다. 신 목사 부부가 그곳에 도착한 날짜가 624일이었다. 짓다가 중단된 기도원 건물 바닥에 스티로품 2개를 깔고 하늘의 별을 보면서 잠을 자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도원에 도착해 첫 3일 금식기도를 했다. 사모도 3일 금식기도는 처음이었다. 사모를 살리기 위해 왔지만 고통스런 나날들이었다.

 

기도원을 세우시는 하나님하나님 계획은 목회자의 길 걷게 하는 큰 뜻이 있었다

 

그중에 짓다가 중단된 기도원을 건축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많았다. 무엇보다 공사비 마련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단 중에 징계만 하시는 게 아니라 지혜도 주신다. 급하게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빈털터리로 서울에 올라오니 돈이 바닥났다. 주유소를 경영하면서 여기저기 외상값을 많이 깔아 놨는데 그때 갑자기 외상이 제일 많았던 김 사장이 생각났다. 모두 두고 왔는데 그나마 외상장부는 챙겨 왔길래 그걸 보고 신 목사 대신 사모가 그 명단을 보고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사모가 많이 아프다면서 어려운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사실 얼마나 돈이 들어올까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통장에 진짜 돈이 들어왔다. 3000만원이나 됐다.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상황에선 엄청난 거금이었다. 게다가 당시 주유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 특성상 외상 거래가 많았고 그 외상값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모의 전화는 신통한(?) 능력을 발휘했다. 외상으로 기름을 가져갔던 거래처 사장들이 바로바로 입금해 주었다. 그렇게 돈이 입금되면 그 돈을 거의 다 헌금했다. 그때 돌려받은 돈이 8000만 원이 훨씬 넘었다. 예물을 드리면 정 목사님이 손을 얹고 간절히 축복기도를 꼭 해주었다.

 

하나님, 귀히 쓰실 주님의 종입니다. 반드시 축복하사 이 불 연단을 잘 견디어 승리하게 하시고, 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할 때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신 목사는 단지 사모의 병만 낫기를 소원했었다, 주의 종이 될지는, 목사가 될지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정 목사는 이미 응답을 받았다. 그는 신 목사에게 주의 종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씀을 듣고 신 목사는 주의 종이 되어 목사가 되어야 하나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재정이 확보되면 기도원 건축이 진행됐다. 건축자재가 올라오면 등짐을 메고 직접 벽돌을 운반했다. 사실 신 목사는 이런 일을 생전 처음 하는 것이었다. 두 부부가 처음 겪는 일이어서 힘들었지만 잘 견뎌내야만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도원을 세우도록 신 목사 부부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당시 신 목사는 그저 사모를 살리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더 크고 깊고 넓으셨다. 신 목사 부부의 신앙을 다시 세우고 기둥밖에 없던 기도원을 온전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기도원인지라 기둥 네 개뿐인 기도원 바닥에 앉아 열심히 찬양을 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향해 제대로 기도 한번 해본 적이 없던 신 목사 부부는 매일매일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연단 끝에 신 목사를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하셨다.

 

기도원 섬김의 생활이 3년쯤 지났을 무렵 서울에 있는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녔다. 영등포에 있는 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신 목사 부부가 함께 신학교를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신학교 원서 접수하는 날, 갑자기 사모가 고열이 나면서 쓰러졌다. 그래서 신 목사 혼자 신학교와 신학대학원까지 6년간 공부했지만 사모는 신학을 하지 못했다.

 

기도 중 사모가 본 환상 내 코에 걸린 칠색 실아들도 목회자의 길 환상을 보다

 

어느 날 아픈 사모가 기도원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사모의 코에 가느다란 줄 일곱 개가 끼워져 있었다. 얼마나 단단하던지 순간 답답한 마음에 콧줄을 빼려고 하자 빠지지는 않고 도리어 코가 당겨져서 아팠다. 그런데 콧줄을 보니 정말 가느다래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는데 아무리 당겨도 아프기만 하지 끊어지지 않았다. 또 그 줄의 색깔이 얼마나 영롱하고 아름답던지 형형색색 무지갯빛이 나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예쁘고 환상적이었다. 순간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니 콧줄이 위쪽으로 길게 올라가더니 본당 천정을 넘어 이내 하늘 위로 올라가 나중에는 너무 높아서 볼 수 없는 곳까지 한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모는 너무 신기해서 예수님에게 여쭤봤다.

 

예수님, 제 코에 왜 줄이 이렇게 걸려 있어요?” 예수님은 알 수 없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시다가 곧 말씀했다. “그 줄은 내가 잡고 있는 줄이다.”

 

마치 송아지 코에 코뚜레를 해서 농부가 소를 끌고 다니듯이 주님은 옳은 길로 신 목사 부부를 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한부 인생이던 사모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잘 생존(?)해 있으니까 속으론 병만 나으면 또 돈 벌러 가야지하는 인간적인 마음이 생기던 시기였다. 사실 사모는 돈 버는 재능이 있었다. 죽는다고 해도 잠깐 세상의 정욕이 들어오니까 다급하신 주님이 불 연단 속에서 신 목사 부부를 주님의 종으로 확실하게 만들려고 하는 와중에 이런 환상을 보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두 부부를 기도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며 살게 했다.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사모는 살려달라고 얼마나 울부짖으며 목숨 건 기도를 했든지 환상이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보였다. 정말 영적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매일 계속됐다. 신 목사 부부는 그때 7년 동안 보여주신 환상이 지금 그대로 이뤄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 신용호 목사 순복음영산신학원 졸업식 날에 아내 반드보라 사모와 딸 신은선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신 목사의 아들 정욱(현 파주 방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이 신학을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무척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신학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 속에서 어느 날 어머니 반 사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어머니, 제가 주의 길을 갈지 안 갈지를 놓고 갈등하고 있어요. 기도해 보시고 환상을 보여주세요.” “그래? 나는 벌써 응답을 받았는데” “?” “나중에 말하마. 내가 보는 것보다 네가 보는 게 더 정확하니 너도 계속 기도해 보거라.” 그래서 아들도 본격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결국 환상을 보게 됐다.

 

환상 중에 아들 정욱의 코에도 칠색 실이 걸려 있어 진짜인가 싶어 줄을 당겼더니 코가 떨어져 나갈 만큼 실제로 아팠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니도 똑같은 환상을 보게된 것을 알게 된 아들은 놀라면서 마음의 확신을 얻고 결국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어떻게 모자(母子)가 똑같은 꿈을 꿨는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들이 기도 중에 또 한가지 환상을 본 일이 있다. 환상 속에서 아들이 옛날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의 목 부분 위쪽, 학년 배지에 숫자 ‘2’가 선명하게 새겨진 환상을 본 것이다. 아들은 대학원만 하면 됐는데 그게 2년 과정이라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결국 2대째 목사가 됐다. 지금은 아들 신정욱 담임목사는 아버지 신용호 원로목사에게 아버지, 제가 다시 태어나지는 않겠지만 만약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또 목사가 될 거예요.”

 

그만큼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목회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목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명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목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 목사 부부는 순종으로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신 목사도 정말 사모의 병이 아니었다면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모 때문에 회개하고 손 들고 주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신 목사는 지금 후회도 없고 불만도 없다고 한다. 오로지 행복할 뿐이라고 한다. 

 

교회 개척 첫 예배하나님이 보내주신 9명의 성도들신유의 은사

 

그렇게 긴 연단의 시간을 마치자 비로소 죽었던 신 목사의 영이 다시 살아났다. 기도원 생활을 만 3년 채우고 나서 영등포에 있는 교회로 옮겼다. 교회 지하실의 방에서 생활하면서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를 하면서 개척을 준비했다. 신학생 시절 기도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며 진로 문제로 기도만 하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개척을 하거라.”

 

개척할 때에 주신 말씀이 있다고 한다. 빌립보서 213절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이 말씀은 현재 표구를 해서 교회 건물 안에 걸려 있다. 다시 말해 개척하는 것이 신 목사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이고 신 목사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척을 하면 너의 입에 내가 함께 할 것이고 너의 손에 내가 기적을 행하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창세기 123절 말씀도 함께 받았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할 것이니 땅의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음을 받을 것이라

 

신 목사는 1998125일 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이틀 만에 일산 대화동 버스종점 인근에, 대화역에선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개척을 시작했다. 비록 반지하이지만 40평 규모에 방이 2개가 있었다. 딸이 합류하여 방 하나를 쓰고 신 목사 부부가 다른 방 하나를 거처로 사용했다. 그렇게 가족 셋이서 개척을 시작했다. 첫 예배를 드리는 주일날 예배를 막 시작하려는 데 문이 삐걱 열리면서 3명이 동시에 들어왔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첫 주에 하나님께서 3명을 보내주셔서 총 5명 앉혀놓고 신 목사는 설교를 했다. 그렇게 3주 동안 게속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도합 9명의 새 신자가 오게 된 것이다. 신 목사 부부와 반주하는 딸까지 합하면 12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를 연상케 했다.

 

이렇게 하면 금방 부흥이 되겠구나생각했으나 그 이후로 신기하게도 새 신자들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개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주변에 저 교회에 가면 병이 낫는다더라‘, ’귀신도 떠나간다더라등의 소문이 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교회는 부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얼마 후에 한 아이 엄마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 번에 아이의 귀가 아파서 밤늦게 찾아온 여성이었다. 이번에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아닌 노인이었다. 같이 온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분은 교회 권사였는데 딸의 손에 이끌려오신 것이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어보니 얼마 전부터 갑자가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딸이 지방에 내려가서 모시고 올라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아이를 치유 받은 일이 있어 어머니에게 우리 집 근처에 방주교회라고 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신유의 은사가 많으시대요. 내일부터 새벽 기도하러 나갑시다며 말하고 모시고 온 것이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8일째 되는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와서 그 권사가 말했다.”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눈이 보여요.“

 

막상 개척을 하고 보니 주변에 두 집 건너 하나 있을 정도로 교회가 많았다. 그때 신 목사는 목회가 뭔지도 모르고, 설교가 뭔지도 모르는 목회 초년병 시절이었다. 교회만 개척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줄 알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현실은 생각과 크게 달랐다. IMF 외환위기가 오고 국가적으로나 국민 모두 힘든 시기였다. 목회가 마음만 가지고 잘 안됐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자꾸 이상한 음성이 들렸다. ”나가라, 밟아라, 북쪽으로 가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기도를 했다. 또 이 소리가 들리니 참 신기했다. 신 목사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무시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기도하고 교회 사역을 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사모도 들었다. 사모도 그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밟아라. 북쪽으로 가라.“

 

그러던 어느 날 사모가 말했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북쪽으로 옮기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1998년 12월7일 방주순복음교회 창립 감사예배를 드리고 함께 찍은 기념 가족사진

 

그 다음 날부터 북쪽으로 교회 자리를 찾아다녔다. 휴전선(DMZ) 인근까지 올라가서 교회를 시작할 곳을 찾았다. 그러나 마음을 주시는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해서 현 위치인 파주시 법원읍 보광로 1794번길 63으로 이전하게 됐다. 이곳으로 이전해 현재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과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대로 정착하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방주순복음교회 입간판을 세우는 과정에 사모가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는 차원에서 기도했더니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10여분 폭우가 쏟아지다가 햇볕이 쨍쨍나는 이변이 실제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의 방주교회 이름을 지을 때 신 목사는 처음에 벧엘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모가 기도를 하면 그 이름이 아니었다. ”방주로 하거라.“ 사실 신 목사는 벧엘을 더 선호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는 주변에 거의 없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사모는 방주교회라고 하셨다고만 했다. 결국 사모의 응답대로 교회 이름을 방주순복음교회라고 명명하게 됐고,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제주도에도 방주교회가 있다. 제주도 방주교회 목사의 말에 따르면 자꾸 남쪽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고 불순종하다가 결국 떠밀려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제주까지 가게 됐다고 한다. 신기했다. 신 목사는 북쪽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북쪽으로 갔고 그 목사는 남쪽으로 가라고 해서 제주도까지 가게 됐다고 하니 말이다.

 

신용호 원로목사의 목회 철학

 

파주 방주순복음교회 부설 예빛 수()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한 장로님이 3년째 근무 중인데 어느 날 신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목사님처럼 지금도 화장실 청소하시고 궂은 일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신용호 원로목사는 걸레 목사로 통한다. 여기서 걸레는 더럽다는 뜻이 아니다. 새 걸레는 잘 안 닦인다. 사용하던 걸레가 더 잘 닦인다. 철든 사람은 스스로 돌이켜 잘하게 마련이다. 신 목사는 평창 기도원에서 3년간 불 연단을 받으면서 부귀영화와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았다. 걸레 생각을 하면 섬김이 절로 나온다. 결코 어렵지 않다. 신 목사의 목회철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섬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목회의 근본이 되었다. 차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목회의 출발이다. 요양원도, 기도원도 이러한 섬김이 기초가 됐다. 목회와 요양원을 운영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일하러 온다. 그중에는 목회자들도 있고 간호사, 요양보호사도 있다. 그러나 신 목사는 섬김의 정신이 결여된 사람들, 대충 눈 가리고 아웅하는 사람들, 섬김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있는 사람들, 게으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몇 번 경고한 뒤 따르지 않으면 내보냈다. 공동체를 위해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배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영혼들을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 목사의 지론은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진짜이다. 사랑이 없으면 못 섬긴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

 

둘째, 겸손이다

 

겸손과 야훼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신 목사는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면서 또 하나 중시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겸손해야 쓰임 받을 수 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양들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겸손한 사람만이 쓰임을 받는다. 신 목사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에게 귀한 사역을 맡긴다는 철학을 갖고 이를 실천해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 주신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태복음 1619)

 

셋째,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에베소서 320)

 

생각이 부정적인 사람과는 함께 하기 어렵다는 게 신 목사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사람과는 대화 자체가 안 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어둡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그것은 마귀의 생각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능히 넘치도록 채우시는 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섬겨야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섬기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예수를 만나려고 한다.

 

그래서 신 목사는 항상 섬김과 겸손 그리고 긍정적인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려고 노력한다. 사실 겸손하지 않으면 섬길 수 없으며 예수의 긍정적인 마음을 품지 않으면 섬길 수 없다.

 

따라서 신 목사는 이 세 가지를 잊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한다.

 

신정욱 담임목사 취임신용호 원로목사는 당회장과 예빛기도원 원장 취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파주 방주순복음교회는 중생(구원)의 복음(3:3) 성령충만의 복음(: 6-7) 신유의 복음(16: 17-18) 축복의 복음(고후 8:9) 재림의 복음(살전 14: 16-17)5중복음, 3중 축복(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생각(3:20), (2:13), 믿음(11:6) (4:12)4차원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 신정욱 담임목사

 

파주 방주순복음교회는 20201010일 신정욱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했고, 신용호 원로목사는 방주순복음교회 당회장과 예빛기도원 원장에 취임했다. 방주순복음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고린도후서 59), 꿈대로 이루어지는 교회(2:13)를 표어로 내세우고 있다.

 

사회복지학 석사와 명지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들 신정욱 목사(협성대, 명지대 겸임교수)2006년부터 아버지 목사와 함께 좋은 뜻을 받들어 사역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노인돌봄 사역을 위한 농촌목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향후 방주순복음교회는 3000평 부지에 원형 돔 형식의 성전을 건축하여 노아의 방주처럼 이 땅에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복지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예수의 빛을 밝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목표다. 

▲ 방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취임 및 예빛기도원 창립 감사예배를 드린 후 기념촬영

 

믿음과 사랑으로 어르신들을 섬기는 '예빛 수()요양원 

 

올해로 창립 24주년을 맞은 방주순복음교회(담임 신정욱 목사)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파주시 법원읍 보광로 1794번길 63에 위치해 있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방주처럼 우뚝 세워진 이곳에서 120여명의 성도들이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방주순복음교회가 이 지역에서 노인요양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2001년 어느 날 택시기사의 손에 이끌려온 한 아주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노인장기요양시설인 '예빛마을'이 세워지게 됐다. 

▲ '예빛 수(秀) 요양원'은 가족의 심리적, 경제적, 육체적 부담이 커지고 있는 치매, 중풍 어르신들을 케어하고 있다.

 

교회 부설로 세워진 예빛마을은 파주 지역교회의 추천으로 서서히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개원한 지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29명의 어르신들을 섬길 수 있었다.이후 교회 앞 공장 건물을 구입하여 20169월에는 예빛 수()요양원을 개원하여 돌봄 사역을 확장하여 현재 42분의 어르신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요양원에서는 웃음치료, 미술치료, 물리치료와 함께 전문 의료진의 주 1회 정기진료를 통해 어르신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그리고 매일 새벽 5시 기도와 저녁 7시 겟세마네기도회를 통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교회 돌봄사역의 일환인 예빛 수 요양원은 가족의 심리적, 경제적, 육체적 부담이 커지고 있는 치매, 중풍 어르신들을 케어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부모님들에게 믿음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섬기는 가족처럼 편안하여 주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의: 031-958-9501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제2수석상임회장 신용호 목사경기북부 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신용호 목사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는 20221128일 수원 명성교회(담임목사 유만석)에서 제35회 정기총회를 열고 유만석 목사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1 수석상임회장 오범열 목사, 2 수석상임회장 신용호 목사, 사무총장에 이승준 목사를 만장일치로 각각 추대해 새 지도부를 구성했다.

 

한편 (사)경기북부기독교총연합회(이하 총연합회, 총회장 신용호목사) 28회 정기총회가 20221114일 원당순복음교회에서 10개 시·군 임원목사님들과 회원들이 모여 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2023년 총연합회를 이끌어 갈 제28대 새 임원진이 발표됐는데 총회장 고경환 목사, 상임부총회장 이선하 목사와 사무총장 조광택 목사가 각각 선출됐다.

 

앞서 총연합회는 2021129일 경기 파주시 법원읍 보광로에 있는 방주순복음교회(신정욱 목사) 대예배실에서 27대 총회장 취임 감사예배를 개최했다. 신임 총회장 신용호(예빛기도원 원장) 목사는 취임 인사말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연합회의 화합과 부흥,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행사에서 목회자중창단, 조미자 목사 등이 축하 공연을 했다. 강영선 순복음영산교회 목사가 교회와 목회자의 영혼구령의 열정’(16:17~18)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진환 김영진 김영현 양상규 목사는 권면의 말씀을, 정동균 김원철 장향희 임다윗 오범열 신상철 목사는 격려사를 전했다. 이어 최요한 권순례 최광필 김광옥 음한국 목사는 새 총회장 취임과 연합회 발전을 위해 축사했다. 음한국 목사는 축사에서 연합회가 하나님과 교회 중심, 예배 및 가정·가족 줌심으로 성장하길 기도하며 취임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파주 은혜축복교회 조 삭개오 목사는 신 회장님의 취임으로 이 지역 기독교의 부흥과 발전, 연합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 경기북부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는 신용호 목사 /사진제공=신용호 목사

 

경기북부기독교연합회는 가평. 구리. 고양. 남양주. 동두천. 양주. 연천. 의정부. 파주. 포천연합회로 이루어져 있다.  

 

신용호 목사는 파주시 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순복음 영산신학원 총동문회장, 파주경찰서 경목위원장, 파주 YMCA 이사장, KRM한국기독교부흥선교협의회 대표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지구촌기독교선교부흥협의회 대표회장, 오산리기도원 7000 목회자중보기도단 총재 등 맡아 사역을 잘 수행하고 있다.

수암(守岩) 문윤홍 大記者/칼럼니스트 ,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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