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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28 [13:40]
임종대 칼럼●천년을 뛰어 넘는 교훈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임종대 칼럼●천년을 뛰어 넘는 교훈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28 [13:40]

▲ 임종대 미래문화사 회장     © 매일종교신문
동물원의 코끼리는 어렸을 때 튼튼한 말뚝에 묶어 놓는다. 그런데 어미 코끼리가 되어도 그 말뚝에 그냥 매어 놓는다. 어미 코끼리는 그 정도의 말뚝쯤은 쉽게 뽑아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었던 조건반사의식이 각인되어 그대로 묶여 있는 것이다.
 
사람도 습관에 길들여져 머리 속에 고정관념이 박히면 코끼리의 말뚝처럼 뽑히지 않는 심리적 말뚝이 될 수가 있다.
 
그런 것 중에 술, 담배, 마약 등의 중독증세를 들 수 있다. 중독이란 습관성만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도 일어나는 수가 있다. 이는 조건반사의 선을 넘어 이성을 주관해버리는 중독으로 독성에 치여 장애를 일으키는 증세다. 중독증세에 빠지면 상식적인 감관의 문을 닫아버리고 중독증세에 매몰되어 버리고 만다.
 
감관의 문인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의식의 문을 단속하여 본연의 상태대로 감지하여야 하는데,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말하는 또 다른 말뚝 같은 병폐의 원인에 빠질 수 있다.
 
초(楚)나라의 현자(賢者)로 알려진 섭공(葉公)이 공자(公子 B.C551~B.C479)의 제자 자로(子路 542~480)에게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로는 섭공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돌아와 스승인 공자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공자가 자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는 학문에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發憤忘食] 도(道)를 즐겨 근심도 잊어버리며 늙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을 보면 떠올리는 중국 당나라의 이태백(李太白 701~762)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이태백이를 깨우쳐 주었던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보(杜甫 712~770)와 더불어 중국 최대의 시인(詩人)이었지만 현종(玄宗 685~762) 황제 당시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한림(翰林)이 되었으나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권력자와 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산속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학문에 매달려 십수년을 정진했다. 호쾌한 성격에 청련거사(靑漣居士)라는 호답게 피말리는 공부에만 매진하던 그가 이만하면 세간으로 내려가 닦은 실력을 펼쳐 보이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남아다운 성격에 그가 좋아하던 주막집을 들러 평상에 덥석 앉았다.
 
컬컬한 김에 술을 한사발 들이키고는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옆에서 어느 할머니가 무엇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이태백이 궁금하여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얼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겠소. 쇠절구공이를 갈고 있소.”
“그걸 갈아 무엇에 쓰려고요?”
“바늘을 만들려고 그렇소.”
“아니, 그 단단한 쇠절구공이를 갈아 언제 바늘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갈다 보면 언젠가는 바늘이 되는 날이 있지 않겠소.”
 
그리고는 돌아 앉아 묵묵히 쇠절구공이를 갈고 있었다.
이태백은 할머니의 말과 행동을 보고는 천둥소리보다 요란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얼른 발걸음을 돌려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십 수년 동안 공부를 했지만 할머니의 마침(磨針)갈마행위를 보고 ‘아! 나의 공부가 나를 내쫓은 자들을 공격하여 이기는데만 급급했구나! 저 할머니가 어떻게 이런 나의 마음을 읽고 나를 꾸짖으시는 것일까? 할머니의 쇠절구공이가 바늘이 되어 만인의 옷을 기워 입히고 따스한 이부자리를 주듯 큰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로구나!’
 
이태백이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는 공자의 말처럼 정신 없이 산속으로 발걸음 재촉했던 것이다.
 
이태백이의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할머니의 절구공이를 가는 갈마정신이 천 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교훈으로 남아진 것이다.
 
도를 즐겨 하며 근심도 잊어버리고 늙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고 한 공자의 마음도 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강서(江西)에서 선종(禪宗)의 종풍(宗風)을 일으켰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깨달음도 역시 벽돌을 가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쓸만한 제자를 만난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선사(善師)가 호남성 전법원(傳法院)에서 날마다 좌선만하고 있는 마조에게 물었다.
 
“좌선해서 무엇하려는가?”
“예,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악이 건너에서 벽돌을 들고 와 그 앞에서 뜩뜩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본 마조가 물었다.
 
“스승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겠나. 벽돌을 갈고있다.”
“벽돌을 갈아서 뭣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아니,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허,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마조는 이 말에 머리가 핑 돌면서 가슴이 멍먹해왔다. 그는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물었다.
“스승님, 그럼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마조는 남악 스승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부드러운 말로 스승이 일렀다.
 
“그대는 좌선하고 있는가 아니면 앉아서 부처 흉내를 내고 있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데 있지 아니하고 일정한 모습이 없는 것이다. 법은 머무름이 없고 얻을 수도 없는데 어찌 집착하는가. 그대처럼 만일 앉아 있는 것이 부처라면 이는 부처를 죽이는 것이요, 부처의 흉내를 내고 있다면 참다운 해탈의 길이 아니다.”
 
마조 도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남악스님께서 자비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모든 사상(事象)을 만들어내는 심지법문(心地法門)을 깨달아야 한다. 심지법문을 배우는 것은 마음 밭에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고 마음에서 선악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대지가 오곡을 일궈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조 도일은 메마른 대지에 단비처럼 촉촉히 적셔지면서 제호(醍醐)의 맛에 빠져든 어린아이와 같았다.
 
소금은 물에 녹으면 소금은 온데간데 없고 그냥 물만 남는다. 그런데 부르는 이름은 물소금이 아니라 소금물이라고 한다. 녹아 없어진 소금을 주체시하는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소금은 자신을 버렸지만 물은 자신의 모습을 버리지 않았다. 버린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물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소금만 남는다.
 
버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인된 조건반사처럼 융해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밭에 씨를 버려야 싹을 얻고,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는다.
 
도(道)를 이야기 하다보면 근심도 잊어버리고 늙어가는 것조차 모를 지경이라고 했듯이 인생이란 다 버리는 연습이다.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태백이 앞에서 할머니는 쇠절구공이를 버렸고, 남악이 벽돌가는 것을 보고 마조는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심지법문을 통해 버리고 얻는 법을 깨달았다.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공의로운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쫓기듯이 허둥지둥 살지 않고 무엇에 매여 살지 않을 것이다.(임종대 미래문화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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