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여보, 소록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어!”

편집국 | 기사입력 2013/06/19 [15:08]
간증/ 정태기 목사(크리스천치유상담연구원 원장)

“여보, 소록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어!”

간증/ 정태기 목사(크리스천치유상담연구원 원장)

편집국 | 입력 : 2013/06/19 [15:08]

 
 
 
간증/ 정태기 목사(크리스천치유상담연구원 원장)


“여보, 소록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어!”
 
 
▲ 정태기 목사     © 편집국


 1968년 8월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우울증 때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교회에서 봉사하지 못하고 안양의 모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절친한 친구가 찾아와서 소록도의 어느 목사님을 소개해 주면서, 한 달만 휴가를 내어 그곳에 가서 쉬고 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소록도를 찾아갔다.
 소록도는 내 생각보다 꽤 큰 섬이었다. 당시 주민 2천여 명이 8개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데 2천 명 주민들 가운데 현재 문둥병을 앓고 있는,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2백 명뿐이었다.
 
 나머지 1800명은 모두 문둥병에서 회복한 상태(음성)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나와서 생활하지 않았다. 이미 몸에 한센병 흔적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록도에서 살아야만 했다.


365일 하루 3번 예배드리는 교회


 그들은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농사지으며 잘 살고 있었다. 소록도에는 각 마을마다 교회가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교회들은 기도원 수준이었다.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월~주일까지 새벽기도 90분, 낮예배 90분, 저녁기도 90분 이렇게 3번 모여 예배를 드렸다. 1년 365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하루 3번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내가 소록도에 도착한 시간이 낮12시였는데, 선착장 바로 앞에 중앙교회당이 있었다. 내 친구가 소개해 준 교회를 찾아가려면 거기서 또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예배당이 있었고, 그 때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에 먼저 그 교회로 들어갔다.
 그 예배당은 (내 짐작으로) 1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큰 건물이었다. 의자는 없었고 마룻바닥이었다. 그 넓은 예배당에 꽉 차게, 약 1천 명 되는 성도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센병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손발이 없으므로 일을 할 수 없어 외부에서 지원해 주는 선교헌금이나 정부 보조금 등으로 살고 있었다.
 
 통성기도 시간이 되었다. 성도들의 기도 소리로 천정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교회당에 ‘불’이 붙었다. 뜨거운 성도들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기도 한 마디 못했다. 나는 아우성치며 기도하는 소리들을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내 바로 뒤에서 한 남자의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주님,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디…. 어떻게 그 은혜를 갚는디유?”
그러다가 엉엉 울어 기도가 잠시 끊어졌다. 울음이 그치고 다시 기도가 이어졌다.
 “주님,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디…. 제가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는디유?”
그러면서 또 엉엉 울었다.


“고맙고 말고, 감사하고 말고!”


 ‘아니 뭐가 그리 고맙고, 무슨 큰 은혜를 받았기에 저토록 울까?’ 궁금해서 눈을 뜨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헉!’
 
 남자인 것 같은 데 나이를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없었다. 코도 없었는데, 콧구멍 속에서 콧물이 흘러나왔다. 입도 돌아가 있었다. 얼굴은 마치 뜨거운 불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두 손목도, 두 발목도 없었다.
 
 
 
 
 ‘아니, 저런 몰골을 하고도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는 기도가 나올까?’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내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소리 지르고 발악하며 통곡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내 입을 틀어막는다는 게 그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겨 입으로 깨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뒹굴며 엉엉 울었다. 그렇게 몇 분간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뭉툭한 손목으로 나를 툭툭 쳤다.
 
 “일어나시유. 예배 끝났시유!”
 
 눈을 뜨고 보니, 그 많던 교우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나는 단 몇 분 울며 기도했다고 생각했는데, 90분이 훌쩍 지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놔 주지 않으니 집에 못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쳐 ‘일어나시유, 예배 끝났시유!’ 하며 나를 밀쳐냈던 것이다. 내가 그를 놓자, 발목이 없는 그는 마룻바닥을 끌면서 교회당을 나가 교회당 밖의 계단에 앉았다. 누군가 리어카로 자기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를 따라가 물어보았다.
 
 “저기요, 실례지만 뭐가 그리 고마우세요? 얘기 좀 해 주세요!”
 내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의 상태가 엉망인데, 뭐가 그리 고맙다는 것이며 무슨 은혜를 받았다는 거요?’
 
 그는 몽둥이 손을 치켜 올려 하늘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고맙고 말고, 감사하고 말고!”
 “뭐가요?”


 
“여보,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훤해?”


 “내가 고향이 충청돈디, 내가 문둥병을 앓았더니, 내 고향이 나를 버렸어. 내 친척이 나를 버렸어. 내 가족도 나를 버렸어! 그런데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와서 나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신 분이 있어!”
 
 나는 그의 아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소록도 가기 전에 소록도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 책에 보니,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편이 한센병에 걸리면 남편을 따라 소록도에 와서 같이 산 아내도 있다. 소록도에서 남편과 함께 살다가 거기서 죽은 아내가 18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살다가 아내가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에 들어오면 아내를 따라 소록도에 들어온 남편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할머니가 충청도에서 여기까지 따라오셨어요?”
 “아니야, 예수님이야!”
 
 나는 깊은 의문이 생겼다. 그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큰 충격이었다. ‘코도 떨어져 나가고, 입도 돌아가고, 귀도 없어지고, 손목, 발목도 다 떨어져 나간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저토록 행복한 것인가?’ 물론 지금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두 평 남짓한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를 1주일만 할아버지 집에 재워주세요!”
 “나 할아버지 아니여. 마흔여덟이여.”
 
 나는 그때까지 그가 할아버지인줄 알았다. 머리도 다 빠지고, 눈썹도 없고….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48세였고, 박 권찰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 한센병 환자들의 고향 소록도     © 편집국

 
 
 나는 친구가 소개해 준 목사님을 찾아가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박 권찰 댁에서 1주일간 신세를 졌다. 밥도 얻어먹으며 함께 지냈다. 나는 그 때,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박 권찰이었다. 박 권찰이 나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기도해 주면, 나도 울며 통곡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울어본 적은 없다.
 
 1주일 후 박 권찰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안양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훤해? 결혼 6년 만에 처음 보는 얼굴이야!”
 나는 뛰어가서 아내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 소록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어!”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없다.(녹취 및 정리: 김정호 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