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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5/10 [10:18]
블로그에서 본 종교세상

“종교는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블로그에서 본 종교세상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5/10 [10:18]

종교와 구원, 버려야 할 의존성
 
나는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불교든 거기에 종사하는 종교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너무 부패하여 사회악이 되어버린 목사와 승려들을 보면 그들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일반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게 된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도는 성직자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자신들만의 종교인 카르텔을 형성하여 신분을 굳건히 한다. 이것은 사회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영구화하기 위해 권력을 잡고 자신들 위주의 정책을 펼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교인이 신도 위에 군림하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신도들의 의존성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목사를 통하여 구원받고 천국에 가고 싶은 것이고, 기복적인 상당수 불교인은 부처나 승려 믿고 극락이나 아니면 후생에 좋은 세계에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복적이고, 의존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고, 진리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목마른 자를 우물가로 안내할 수는 있지만, 물까지 대신 마셔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리공부와 수련, 그리고 자아성찰을 통하여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이것이 구원과 깨달음의 시발이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믿으면 혹은 능력 있는 누군가에 의존하면 깨달음이나 구원을 내려주겠지 하는 마음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켜보기 taucross.blog.me/220346938849 작성자: 우타
 
사소한 것에서도 큰 깨달음 얻는다
 
생각해보니 내가 종교에 관심 갖지 않는 이유는, 이런 만남 덕분인 것 같다. 직업 특성상 사회 전반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들을 기회가 많다. 소소한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을 들어보면 사소한 것에서도 큰 깨달음을 준다. 교회로 치면 주님은 모든 것에 깃들어 계신 것이고, 불교로 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정도의 가르침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청춘들에게 해주는 명사들의 강연들을 들어보면, 꿈을 꾸며 살아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목표를 가져라 등등 꼭 무언가 큰 결심을 하고 실행하고 해야 할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많다. 4000원짜리 백반집 아저씨의 “장학금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학생들이 언제든 와서 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환경도 장학금의 한 종류”라는 말이나, 젊음을 일에 바친 보험설계사 아주머니의 “일도 좋지만 내가 행복해야 고객님들에게도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나를 위한 시간은 꼭 빼 놔요. 하루의 한 시간, 안되면 일주일의 하루라도” 이런 사소한 이야기에서 오는 인생의 어떤 멈춤. 삶을 즐기는 방법은 참 소소하다.
Photographer, Ant blog.naver.com/hwerj 작성자: hwerj (hwerj)
 
지금은 하나님 뜻을 찾을 때
 
종교라는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종교인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행을 서슴없이 하는 자는 분명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마귀의 사람이죠.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주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생령이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6천년 회복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회복이요, 하나님나라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들 종교, 각 교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종교지도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랑이야기 loveismeet.tistory.com/160 작성자: 다빈치
 
종교의 고민
 
사실, 내가 말사를 맡아 나오는 것을 주저주저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문제의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한 것도 아닌 지금의 상태에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고 어쩌면 고수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말사의 주지 직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현재, 종교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이 지점이다. 추상적으로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들이라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위기의식에 내성이 생겨버린 것이다. 물론, 위기의식이 곧바로 현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실은 항상 냉정하게 자신을 대하는 자에게만 비로소 길을 열어준다.
 
만성화되어 버린 위기의식은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 과연 종교가 관료화되고, 세속화되고, 타락하고, 부패해서 위기일까? 과연 인류역사에서 권력의 편에 선, 혹은 권력 그 자체이기도 했던 종교가 아닌 다른 모습의 고등종교가 얼마나 존재했었을까? 과연 인류역사에서 타락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고등종교는 존재하기는 했을까?
 
오히려 더 이상 현대인들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의 민낯이 공공연하게 까발려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현대인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혹은 종교를 떠나는 이유를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에게 잘못이 있다면 세상이 변하였건만, 여전히 예전 잘나가던 시절만 생각하고 그 때 방식대로만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접근해서 종교라는 사회적인 장치자체가 불필요해질 수도 있다. 즉 종교는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할 필요도 있다. 단순히 종교 조직의 자체 정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가톨릭은 개혁성향의 교황을 선출하였을까? 그리고 왜 교황의 개혁적 행보는 연일 기사화 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이 땅의 불교는 스스로 정화하고자 하는 모습조차도 보일 생각을 하질 않고 있긴 해서, 뭐라 할 말이 없긴 하다.
DIGITAL-I centrue01.blog.me 작성자: centrue01(centrue01)
 
“종교 지배층은 있어도 지도자는 없다”
 
한국에서 종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최근 개신교·가톨릭·불교의 3대 주요 종교전문가들이 참여한 종교포럼에서는 “한국 종교에 지배층은 있지만 지도층은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난주 화쟁문화아카데미가 연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경계 너머, 지금 여기’에서다.
 
포럼에서는 개신교의 목사, 가톨릭의 신부, 불교의 스님 등 이른바 성직자들이 항상 높은 곳에서 말하고 듣는 식으로 신자들을 ‘지배하는’ 권위주의가 한국 종교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가톨릭 쪽에서는 교회 권위주의와 성직자 권위주의를, 개신교는 합리적이지 않은 대형교회 목사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불교 쪽에서는 실천하지 않는 출가자의 무관심을 문제 삼았다. 성직자들이 이렇다보니 국민들이 존경할 만한 종교지도자가 없고, 우리 사회에서 종교적 권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적 권위가 공감·실천·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말은 상식에 속한다. 그게 곧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며 종교지도자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예수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했고, 잘못된 체제에 저항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하는 것으로 권위를 확보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개인의 권위를 내려놓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곁으로 다가가 소통하고 공감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최근에 목도하는 종교적 권위의 모범 사례다. 불교 역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어느 종교보다 탁월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공감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최근 들어 성직자들의 반종교적 일탈행위가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다.
 
포럼에서 토론자들은 모두가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성직자의 리더십을 거부하고 종교의 현 제도와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고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개혁과 쇄신 요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종교포럼을 언급하는 것은 종교인 스스로, 그것도 종교 간 벽을 넘어 종교 본연의 역할과 종교 지도자의 사명을 일깨우는 논의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좀 더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특별히 경청할 대목이다. 이제는 성직자들이 어려운 이들을 보듬는 일에 적극 나서고,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서 종교적 권위를 다시 확고히 세울 때다.
내가 궁금한 이야기 blog.naver.com/milk1146
 
문제는 종교가 아닌 종교제도
 
종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질 수는 없다. 암울한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입장에서 종교는 분명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상 종교의 본질이 아닌 종교라는 제도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목도할 때 누구나 ‘종교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본질인 이 종교적인 자세다. 삶의 허무함에 대한 극복을 종교라는 제도나 종교인으로부터 찾으려 할 때 오히려 종교적인 태도는 사라진다.
 
철학자 김영민의 책《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처럼 비판적 이성으로서의 철학적 사유와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 감성으로서의 종교적 태도가 항상 긴장을 이루는 삶은 가능할 수 있을까?
SARABANDE bergman.egloos.com 작성자: SARABANDE
 
전도방향 바꾸면 교회부흥 할 것
 
나는 종교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인들에게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 나에게 전도를 강요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전도’란 말은 기독교를 중심한 말임에 틀림없다. ‘하느님 믿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거북하다.
 
내가 ‘교회에 다니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은 다른 데 있다. 내가 정말 닮고 싶은 멋진 형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멋진 목사님이 슬픔에 잠긴 안산시를 위해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연 것처럼 내 주위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 이런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더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 믿으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 교회에 다니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전도의 방향성이 바뀌면 교회가 더 부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들레로그 blog.naver.com/kiyi0804 작성자: Don Xuihote(kiyi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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