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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⑫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일본의 천조대신 또는 천일창신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7/24 [16:12]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기획 시리즈-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⑫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일본의 천조대신 또는 천일창신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기획 시리즈-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7/24 [16:12]
제13세 성무(成務)왕은 경행왕의 넷째아들이고 본명은 와가다라시히고(稚足彦=이하 ‘치족언’이라 함). 경행46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그때 나이는 24세. 『일본서기』성무 4년 조에는 경행 왕이 웅습 세력을 토벌하는 등 기존의 세력들(주로 신라계)을 정벌, 평정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수인왕조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정복왕조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후대(특히 명치 이후) 사가들이 만세일계로 왜곡 서술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성무왕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는 107세에 죽은 성무 왕에 이어 일본무(日本武)의 둘째아들 다라시나 쓰히고노 스메(足仲彦: 이하 ‘족중언’이라 함)가 제 14세 주우아이(仲哀)왕이 되었다고 한다.
 
중애왕·신공왕후 한민족 분명, 기형적 체형서도 증명
 
그는 31세에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성무 원년이 131년이고 중애 원년이 192년인데 약 60년 상간이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성무 48년에 태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무 왕이 131년 24세에 즉위하여 107세에 죽었으니 83년간 재위 했다고 보는데 성무 48년이면 나이 72세이니 이미 그때는 생산능력을 잃었을 때이다.
 
그런데 성무 왕에 아들이 없었다면 진작부터 양자를 택해서라도 태자를 세웠을 것이니 태자를 세우는 일이 빨랐을 것이고, 또 성무 왕에 아들이 있었다면 태자를 달리 구할 필요도 없으므로 오히려 늦어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제14세 중애 왕 2년 기장족희(氣長足姬)를 왕후로 맞았다고 했다. 이 기장족희는 문헌상 아무 계보가 없는 정체불명의 여인으로서, 나중에 신공왕후가 된다. 그러나 중애왕은 숙부의 딸과 오호사까누시(大酒主) 딸에 두 번씩이나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는다.
 
그럼에도 즉위 이듬해 1월2일에 느닷없이 기장족희와 결혼하여 그를 왕후로 삼았는데 이 역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구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의 키가 무려 10자나 된다고 했다. 10자면 3미터가 조금 넘는 키다. 그런가 하면 기장족희 역시 키가 9척이고 입안의 치아가 한치 다섯푼이라 했으니 3㎝가 조금 넘는 크기이다.(팔번동훈)
 
이처럼 기형적인 인간들로 묘사된 두 사람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기장족희와 중애와는 처음부터 별도의 인연이 아닌 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일본의 원주민은 『위지』‘동이전’에 나와 있는바 구모(또는 ‘구마’)족으로 키가 고작 넉자(약 130㎝)밖에 안 되는 단구이다. 이로보아 중애와 기장족희가 기형적 장신이라 하더라도 그는 일본에 도래한 외래 족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땐 아직 서쪽 중국이나 남방계열에서는 도래하지 않을 때이니 이 두 인물은 틀림없이 한국 땅에서 건너간 한민족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이야기가 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두 부부를 일본의 천조대신 또는 천일창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사람(안동준. 『한족과 고대일본왕실』47~52쪽)은 이 이야기를 중애와 기장족희(신공왕후)와의 이야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 포항 호미곶에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像.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 부부 를 일본의 천조대신 또는 천일창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도일설과 유사
 
『삼국유사』권 제1 연오랑과 세오녀 기록에 보면 이렇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서기 157년) 동해 빈이라는 곳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를 따는데 홀연히 바위(또는 고기) 하나가 나타나 연오를 업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나라 사람들이 바위를 타고 바다 가운데 나타난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라 하며 그를 접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상히 여겨 바닷가를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가죽신이 있는지라 그 바위 위에 오르니 바위가 남편 때와 같이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신라에서는 일월이 광채를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아뢰어 일월의 정(精)이 우리나라(신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이런 변이 일어났다고 했다. 왕이 사자를 일본에 보내 부부 두 사람을 찾게 했다. 그들이 먼저 만난 것은 연오 였다. 이때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가겠느냐. 그러나 짐의 비(妃)가 세견(細絹)을 짠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하며 그 비단을 내어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 임금께 아뢰고 그의 말대로 제사를 지냈다. 그랬더니 전과 같이 일월이 밝았다. 그 비단을 창고에 넣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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