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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⑰응신왕(應神王)편㊤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8/24 [13:22]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⑰응신왕(應神王)편㊤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8/24 [13:22]

응신왕(應神王)의 출생에 관해선 아직도 사학계에서 확정을 잡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신공이 이른바 신라정벌을 마치고 돌아와 12월 축자문전(筑紫蚊田)에서 낳았다는 예전(譽田: 응신왕의 이름)은 일여(壹與)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위서(魏書)』‘왜인전’에 비미호(卑彌呼. 신공왕후를 중국 측 문헌에는 비미호라 했음)의 큰 딸 이름을 일여(壹與)라 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예전(응신)은 신공의 소생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신공이 낳은 일여는 딸이요, 이와 다른 이름인 예전은 아들이다. 예전은 중애왕의 4남(유복자)이라고 『일본서기』에는 기록 되어 있다.
 
또 남구주의 구마소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중애왕이 갑자기 몸이 아프다가 다음날 급사 했다가고 『일본서기』(중애 9년 봄 2월)에 기록 돼 있으며, 『고사기』에는 귀환한 중애왕이 신공이 요구한 신라정벌의 신탁(信託)을 어긴 벌로 악기를 탔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아 불을 켜 보았더니 이미 시체가 되었다고 한다.
 
중애는 신라 정벌 반대, 신공과 다툼…독살설
 
『일본서기』쪽은 독살 같고, 『고사기』쪽 기록은 자살 같다. 중애왕의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신라 정벌을 단행(173년)했고, 1년 후로 출상을 미루었다. 공교롭게도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이 해(173년)에 신공이 사신을 파견(아달라왕 20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미 앞서 언급한 데로 세오녀(신공)가 연오랑(중애)을 만나기전 남자라곤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하는 단 한사람(무내숙미<武內宿彌>)외에는 자기 방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바 있다. 이 남자가 무내숙미로서 신공이 신라정벌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이었다. 따라서 중애왕의 죽음은 무내숙미와 신공이 공모하여 암살한 것이 아닌 가 추측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는 신라정벌 문제로 의견 다툼이 있었고, 중애는 끝내 신라정벌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심증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응신은 중애의 유복자라기보다 신공과 무내숙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도 가질만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데로 중애왕=신공왕후가 있던 곳은 주로 구주지방이었다. 그런데 응신왕은 기내(幾內)지역인 나라(奈良)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렇다면 정말로 응신왕은 어느 계통의 사람인가. 이 무렵 요동 북쪽 송화강 변에 있던 단군조선의 후예요, 고구려의 조국이었던 부여의 후왕 의라(依羅)가 북방세력에 의해 밀려난 후 피신했다가 행방이 묘연해 졌는데 그 나중에 일본 성씨록에 의라씨라는 것이 나타나고 일본에 부여 풍습이 갑자기 수입된다.
 
응신왕은 부여후왕 ‘의라’설이 가장 유력
 
『일본서기』『고사기』에도 나오듯 부여국의 신하였던 우가(牛加) 등 다수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고, 또 응신 조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예외 없이 한민족(특히 백제)이 대거 일본으로 간 것 등의 기록은 응신이 부여후왕 의라 였음을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실마리를 풀기 위해선 백제, 고구려, 부여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고구려 시조는 주몽(朱蒙)이다. 원래 주몽은 북부여계 사람이다. 북부여 왕실에서 자라나 나중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 탈출, 고구려를 세운다.
 
졸본부여로 탈출한 주몽은 졸본부여왕 연타발(延陁勃)의 둘째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두게 된다. 그러나 주몽은 일찍 북부여에 있을 때 예(禮)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유리(琉璃)를 낳았는데 예씨의 소생이 찾아오니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 이가 나중에 유리왕이 된다.
 
그러므로 위협을 느낀 졸본태생의 부인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향을 떠난다. 비류는 소서노의 죽은 전남편 우대(優臺)의 아들이고 온조는 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아버지가 다른 형제간이다.
 
졸본부여왕 연타발은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후계자로 지명해 젊은 과부였던 자기 딸 소서노를 아내로 삼게 한다. 소서노는 온조를 키우며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털어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 총력을 기울였다.
 
졸본부여왕이 돌아가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 했다. 22세에 일약 왕이 된 주몽은 소서노와 점차 멀어졌고 나중에는 전처(예씨 부인)를 다시 받아들여 그와의 소생인 유리를 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건국공로와 왕비의 자격, 자기 소생의 왕위계승 마저 잃은 비극의 여인 소서노는 두 아들 형제와 함께 고향을 떠나고 만다.
 
그리하여 망명 후 그들이 최초로 세운 나라 지역은 중국 측 『수서』‘백제전’에 따르면 예성강 북쪽의 대방고지(帶方故地)였다. 즉 오늘날의 황해도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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