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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39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7/21 [09:15]
어떻게 洞察해야 자기 자신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나

통찰! 天問天答 39

어떻게 洞察해야 자기 자신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나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7/21 [09:15]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어떻게 洞察해야 자기 자신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나
 
질문 58:
수행이나 방편을 통하지 않고, ‘지금의 나’만으로 ‘나’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통찰(洞察)해야 진정한 자기 자신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사물이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사물(事物)이 어떻게 이렇게 여기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의 사물이 여기에 있기 이전에, 여기 ‘있음’을 인식해 줄 수가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요.
 
그와 같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있는 ‘지금의 나’ 이전(以前)에 ‘지금의 나’를 인식해 준
‘무엇’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가 여기에 이렇게 있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 주는, 즉
항상 ‘자각’하는 ‘무엇’은 ‘지금의 나’ 보다는 더 사실적(寫實的)인 ‘나’인 겁니다.
그리고 그 더 사실적인 ‘나’는 ‘지금의 나’와 대상적으로 구분되는 모든 사물들의 주체로서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드러남이 없고, 모든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물질적 가치나 의미에 매일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만으로도 ‘나’를 알고 자각 하는 데는 어떤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 자신’이므로 해서 그 어디에도 종속(從屬)될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이 허공이 그 어디에도 종속됨이 없듯이 말이지요.
 
질문 59:
어떤 수행자는 자기는 ‘전체’라고 말을 합니다. 또 어떤 수행자는 ‘개체’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은 ‘전체’라고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전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개체’라고 말을 하는 이유 또한 ‘개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체’와 ‘개체’의 차이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전체’와 ‘개체’가 규정 되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는 전체도 개체도 아닙니다. 단지 선택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항상
‘자각’ 합니다.
 
질문 60:
아직 어떤 ‘상태나 체험’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남아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짚어 주시겠습니까?
 
무얼 느껴야 되는 것도 없고, 무얼 경험해야 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반드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횟수의 생과 사를 반복해 왔고, 그러한 반복 속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합당하다 싶으면 ‘의식적인 죽음’을 한번 받아들여 보세요. ‘지금의 나’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진아’(眞我)로 거듭 날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삶을 살다가 또 때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 생(生)조차, 이번 생처럼 또 무의식적으로 불현듯 태어나고, 불현듯 살아지고, 불현듯 사라져 갈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적인 죽음’을 통해 스스로 삶의 능동적 주권을 회복 하지 않고서는 ‘살아 있다는 것’ 즉 ‘살아 숨 쉬는 자유’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보세요,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느낄 수가 있으며, 무엇을 경험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어떠한 경험이 있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조차
‘마음’이 만들어 내는 상(想)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해 가세요?
 
따라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무지에서 ‘자각’으로 거듭날 때
‘진아’(眞我)는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생과 사(死)가 다 자기 마음 안에서, 자기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은 생과 사의 이치이며, 이러한 이치를 넘어 만법(萬法)의 ‘이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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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한별 2016/08/06 [13:33] 수정 | 삭제
  • 의식적인 죽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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