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기돗발’ 궁합과 우리들의 하나님

신민형 | 기사입력 2015/01/03 [00:47]
하늘소풍길 단상

‘기돗발’ 궁합과 우리들의 하나님

하늘소풍길 단상

신민형 | 입력 : 2015/01/03 [00:47]

 
 
▶새해 첫날 아침, 식탁에 떡국을 차려놓으면 옛날 차례상이 생각나 부모님과 조상들께 바치는 기도를 올린다. 부모님이 개신교에 귀의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했던 전통차례의 의미를 되살려 보자는 의도다.
 
‘홍동백서 어동육서(紅東白西 魚東肉西)’ 차례상에 지방(紙榜)을 걸어놓고 절을 올리던 어린 시절, 푸짐한 음식에 입맛을 다시며 ‘왜 이렇게 형식적인 의례를 해야하나?’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술잔을 향로 위에다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리고 꾸벅꾸벅 두 번 반 절하는 형식에 맞추느라 바빴지 차례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엄숙한 자세의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되질 않았다.
 
이제 부모를 여의고 나이가 들다보니 그 형식이 담은 내용과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그래서 차례상은 아니지만 떡국 밥상 앞에서나마 기도로써 그 형식을 되살리고 싶었다. 이런 단촐한 형식마저도 애들한테는 역시 고리타분한 의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기도에 익숙한 아내에게 기도부탁을 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기도답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나의 기도방식은 기도와 아내에 대한 결례라고 여겼으나 아내는 여전히 나에게 대표기도를 넘긴다. 내 방식에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다.
 
“부모님, 장인장모님,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조상님과 하나님!
이렇게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과 생활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영혼이 여전히 이승과 우리 삶에 연민과 애정을 품고 계시다면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하신 영혼으로 계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희 가족을 비롯한 이승의 사람들은 당신들께 감사하며 당신들을, 당신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닮은 삶으로,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벗어나 더욱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마도 나의 ‘하나님’을 아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입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새해 기도의식을 갖는 불교신자는 부처님을, 유고집안에서는 조상을,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를 향해 예를 올렸을 것이다. 성경 말씀도 해석이 각각이듯이 하나님의 개념도 민족과 종교, 지역, 사회환경에 따라 제각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해 아침 기도를 마치고 수리산 산책에 나섰다. 그리고 뭔가 더 정리하는 기도를 하고 싶었다. 교황이 전날 새해맞이 메시지에서 전한 말도 음미하고 싶었다. 그는 “새해 불꽃놀이가 지속하는 것은 잠시뿐”이라며 “새해는 생의 유한함과 ‘인생행로의 끝’을 돌아보는 시간이다.“라고 했다. 이 또한 내가 느끼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10여 Km 산책길에 있는 성불사, 용진사, 수리사와 엘림교회, 에덴기도원 중 어디를 가볼까 생각했다. 소위 ‘기돗발’이 먹히는 곳을 택하려 했다. 아늑한 기슭의 수리사로 마음길과 발길이 옮겨졌는데 ‘기돗발’이란 결국 ‘나의’ 하나님을 편히 만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돗발도 궁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대웅전과 산신각에서 나의 하나님께 절을 올리고 내 나름의 명상과 기도에 젖어 들었다. 마침 화제가 되었던 ‘동물의 영혼 유무 논란’을 두고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동물에게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으며 무속신앙식 가족을 위한 구복(求福)기도와 하나님과 주변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기독교식 회개기도, 탐진치(貪瞋痴)를 벗어나 해탈로 이르는 불교식 구도자의 기도를 모두 올려 보았다.
 
▶4시간여 산책 뒤 샤워를 하고 발뻗고 누우니 세상이 평화롭고 편했다. 사르르 잠드는 가운데 느끼는 희열이었다.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도 이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탐진치로 일희일비하는 일상에 찌들어 잠들 때 편안하지 못하고 어수선한 꿈을 꾸듯이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일관된 삶으로 이 세상 떠나게 되면 불편한 영혼으로 떠 돌지 않을까 하는 상념이었다.
 
▶사소로운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입었을 주변사람들에 대해 회개하고, 그들을 포함한 가족과 동물, 만물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과 평화를 빈 하루가 희열을 가져다 주었듯이 그런 삶이 무덤 속 희열을 가져다 줄 것이란 믿음이 은연중 생겨났다.
 
만족을 주는 ‘참 잘 놀았다’ ‘참 즐거웠다’ ‘참 잘 견뎠다’보다 ‘참 잘 정리하고 사랑을 느낀’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이 ‘참 사랑하며’ 인생을 정리한 삶이 편안한 죽음을 장식하는 것 아닌가. 희열은 아니더라도 고요한 죽음- 그래서 희열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될 듯하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고 흙으로 돌아가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영생을 누린다는 신앙같이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러면 ‘참 사랑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의 하나님’의 뜻인데 다른 사람의 하나님의 뜻도 그럴 것 같았다.
 
  • 도배방지 이미지

신민형 범종교시각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