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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4/28 [16:54]
일상속 종교이야기

절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일상속 종교이야기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4/28 [16:54]
나를 낮추고 만물을 공경하는 절


연푸른 새싹과 화사한 꽃들로 치장한 우면산의 봄을 산책하면 나의 세상은 천국이 된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난해하고 고단하며,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상일지라도 숲속 향기를 맡게 되면 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지고 세상에 나왔다는 게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감사하다. 그래서 아내 말대로 나는 새벽이든 야밤이든 상관치 않는 ‘산 산책 중독자’이다. 
 
나에게 숲길 산책은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이다. 숲 속에선 일상 속 힘들고 절박한 상황까지 녹여 준다. 세상 소풍에서 즐겁고 기쁜 일도 있지만 괴롭고 슬픈 일 역시 겪어야 삶의 맛이 더하지 않나 하는 객관적 관조(觀照) 정신이 들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은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면서 타인의 아픔은 ‘성숙의 과정’이라고 강 건너 불 보듯 하지만 ‘숲속 천국’에선 내 자신의 아픔마저 세상소풍의 선물로 바라볼 수 있다. 희로애락(喜怒哀樂) 모두가 어차피 삶 속에 들어있는 것 아닌가.

일상생활을 하다가, 술을 먹다가 느닷없이 죽음과 삶의 허무함에 빠지면 우울증이 된다. 그러나 숲에는 이를 승화시키는 기력(氣力)이 있다.

수천, 수만, 수억 년을 온갖 재앙 다 겪으면서도 묵묵히 자리한 숲과 풀, 흙과 돌에서 기력이란 ‘DNA’를 보게 된다. 어느 가을 아무 미련 없이 몸을 날린 낙엽들이 자양분이 되어 수천, 수만 년 후의 숲과 풀, 흙과 돌이 되지 않겠는가. 인간에게도 그러한 ‘DNA’가 있다. 허무하듯 죽고 숱한 애증이 오가는 세상이지만 무구한 세월이 지나면 그러한 허무와 애증은 그저 삶의 단조로운 흐름에 지나지 않다. 영원히 전해질 ‘DNA’는 사랑일 것이다. 사람이 만든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사랑,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사랑, 생로병사의 고통과 허무함을 위로해주는 사랑…. 숲과 사람의 기본적인 ‘DNA’는 같다. 

숲 속에선 아픔과 고통을 평정(平靜)과 즐거움으로 승화시키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일게 한다. 돌더미를 쌓아 놓은 우면산 소망탑에 절을 하고, 우면산 기슭 대성사 대웅전에 향을 펴 합장하고, 하산길 배불뚝이 포대화상과 성황당에도 감사하는 절을 하게 만든다. 진정이 담긴 절은 ‘나를 낮추며 세상 만물을 공경하는 마음을 들게 함으로써 내 자신도 존중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삶의 위로 받고 영혼을 구원받는 기도


물론 숲속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런 관조정신은 사라지나 그 여향(餘香)은 생활의 아픔과 슬픔을 추스르는 힘으로 작용한다.

숲의 정기를 받은 나는 간혹 아내에게 그러한 유의 말을 하며, 그 말로 스스로를 고취시킨다. 
“이 세상 소풍 나와서 당신 만나 즐거움과 아픔을 공유하는 사랑의 맛을 알게 되었고, 부귀영화 못지않은 재미를 누려 보았으니 정말 축복받은 삶이오. 앞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온갖 고충이 없을 수 없는데 그것도 축복이라 감사하며 기꺼이 감수합시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허무, 고통, 기쁨, 슬픔 모두 하잘 것 없는 것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 퍼트릴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란 ‘DNA’오. 부귀영화, 명예보다 귀중하오. 우리, 죽도록 서로의 고통까지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 ‘감사’ ‘축복’ 등 고귀하고 달콤한 종교적 용어에 감격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반듯한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아내가 종교다원주의를 흉내 내는 나의 말에 목사님 말씀만큼이나 관심을 갖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성경이나 불경의 말씀은 얼마나 비신자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악용되고 있는가. 정치인, 장사꾼이 처세수단으로 사용할 시의적절한 표현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마저 제각각으로 해석해 기복적(祈福的) 신앙을 강조하는가 하면 위협적, 수동적, 공격적 신앙 등 다양한 목소리가 나타난다. 새로운 교리를 내세워 목회자와 교회, 교세의 성장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진정성도 담겨 있기에 그만큼 확산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모두 다른 해석과 이론을 하나님의 뜻이자 선포라 강조하니 헷갈린다. 개신교, 불교의 수백 개 신흥 교단이 그렇고  이슬람, 힌두교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사랑’ ‘자비’ ‘축복’ ‘감사’ ‘용서’ ‘겸손’ ‘인내’ ‘배려’ ‘위안’ 등 인간세상의 좋은 덕목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내가 설정한 종교관을 아내에게 농담조로 설명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참 너그러우신 분이오. 어떤 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게 세상을 만드셨소. 자신의 환경과 지역 등의 여건에 따라 적절한 믿음과 종교를 갖도록 하셨다고 보오. 숲과 풀, 동물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귀중한 것이오. 우리 ‘가람이’도 그 중에 하나요. 누구든, 무엇이든 모두 축복받고 구원받은 것이오.”

아내는 정색했다. 나의 본색(本色)을 이미 파악한지라 노골적인 반론에 나서진 않았지만 ‘오, 주여!’란 혼잣말을 나지막히 품어냄으로써 자신의 안타까움을 다스리려 한 것이다. 아내의 ‘외치지 못하는 탄성(嘆聲)’에 내 마음이 아려 와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다른 술자리 같았으면 단호하고 오만한 반박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성경구절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말이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타 종교의 교리도 내 교리같이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라며…. 그러나 온유(溫柔)한 사랑을 나에게 가르쳐 준 아내에겐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아내에게서 사랑의 의미를 배운 사람으로서 아내의 신념에 도전과 흠집을 낼 수는 없었다. 또한 아내는 가엾은 나의 영혼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남자한테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아내의 기도 모습을 보면 한 건강식품회사의 광고카피가 떠오른다. 그리 좋은 걸 왜 남편이 믿지 못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기도하면 이루어질까 하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묻어난다. 아내에겐 정말 좋은 신앙이자 종교이다. 그래서 아내는 이 험난하기도 한 세상에서 온유한 마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건강식품회사 사장 또한 그런 믿음과 신념이 있기에 자신 있게 상품을 밀어 붙였으며 단가가 높지 않은 품목으로 연 매출 1천억 원을 넘겼을 게다. 기적이랄 수 있다. 자신이 체험하고 효력을 보았기에 확고한 믿음으로 전도한 덕분이다. 

아내도 그 회사 제품 중 하나를 나에게 장기 복용케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로 회복과 혈류를 좋게 한다던 그 제품은 나에게 별반 효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 체질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에겐 ‘아로나민’이 가장 효과를 냈기 때문에 건강식품에는 신뢰감을 갖지 않았다. 내가 아내에게 ‘숲이 얼마나 좋은데…’를 안타깝게 외치지만 아내의 건강과 체질에 맞지 않고, 믿음이 없기에 숲길 산책의 권유에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효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법이다. 믿음이 있으면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도 본다. 그러나 이번 건강식품은 ‘남자한테…’라며 모든 남자를 보편화시켰는데 나 같은 남자한테는 보편화시킬 용도의 제품도 아니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 교파는 거리와 지하철 전도에 나선다. 그 충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건강식품이 체질과 신뢰감에 따라 먹혀 들어가듯이 좋은 교리와 신앙 역시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밭의 체질과 환경, 여건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여건이 다른 마음 밭에 보편화시킨 뿌리를 내리려다 갈등과 부조화, 다툼과 살생까지 발생한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를 되뇌는 모든 신앙과 교리에는 뭔가 좋은 것이 있다. ‘사랑’ ‘자비’ ‘축복’ ‘감사’ ‘용서’ ‘겸손’ ‘인내’ ‘배려’ ‘위안’ 등이 담기지 않은 종교는 없다. 그것의 세부적인 해석과 지침을 달리해서 갈등과 다툼이 생긴다면 종교의 본질을 흐뜨려 놓는 것이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부지생 언지사(不知生 焉知死․삶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공자 말씀을 나는 대단히 좋아한다. 공자가 하나님 나라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보다 나은 삶의 규범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본다.

나는 이 세상 소풍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내가 자신의 종교를 사랑하는 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아내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싶다. 아내가 예수를 영접 못한 나의 영혼을 얼마나 가엾게 보는지 알지만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 한편 아내 또한 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를 넘어선 사랑이다. 나에겐 모든 신앙과 종교에 '사랑의 DNA'가 면면히 이어져 왔고 진화해 나갈 것이란 믿음이 있다. 사랑이 종교를 초월한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부지생 언지사‘를 외치는 것이 나의 독선과 교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을 잊지 않는 한 내 마음 밭에 뿌리내린 좋은 신념이랄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 밭이 제각각이어서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를 내세우는 우리 세상의 종교이야기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을 전파하는 모든 종교의 기본정신이 있기에 ‘사랑의 DNA'는 풍성하게 세상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이란 기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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