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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깨달음의 반복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2/25 [08:56]
일상속 종교이야기

착각과 깨달음의 반복

일상속 종교이야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2/25 [08:56]

● 크리스찬인 아내와 종교다원주의자인 나는 별다른 종교적 갈등없이 세상을 헤쳐가고 있다. 물론 아내는 내가 ‘예수를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못버리고 있지만 스님들의 법문과 공자말씀 등을 통해서 세상살이의 지혜를 얻길 즐겨한다. 나 역시 아내가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어 일요일 예배시간은 만사 제쳐놓고 아내의 몫이 된다.
 
세파(世波)를 헤쳐나가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간의 사랑과 배려가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현실감각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상이야기를 수년전부터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수양이자 구도(求道) 작업이다. 
 
● 마음이 열려있는 한 개신교 성직자가 우리 부부의 일상이야기를 읽고 ‘편협하지 않은 종교관이 좋다’는 내용의 글을 띄웠다.
 
“절대적인 것, 최고의 것, 최선의 것, 유일한 것, 확실한 것 등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것이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다양성과 인간의 보편적인 단편성들, 그리고 사건과 사실들의 혼합에서 낳아지는 혼란을 한꺼번에 휘어잡기 위해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유일한 것’의 오류를 강조하면서도 그는 성직자의 자세를 견지해 “그의 부인이 언젠가는 그를 그리스도께 지금 보다는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유일신을 믿는 개신교 성직자 입장으로서 끝내 ‘유일한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이러한 문답을 읽은 목회자 친구가 나섰다. 그 역시 미국 다종교, 다문화사회에서 성실히 사역하는 열린 목회자이다.
 
“ 이미 구약시대부터 남을 품는 보편적인 기독교와 남을 품지 않는 배타적 기독교의 대립과 융화의 과정은 계속 되어왔다. 기원전 6세기 제2이사야의 등장으로부터 유대교 안에 힐렐과 샴마이의 대립, 예수와 바리새․ 사두개의 대립, 더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이방인을 향해 무할례 복음을 전한 바울의 대립… 내가 보기에는 우리 친구 부부의 대화도 그 선상 안에 있네.”
 
나는 우리 부부의 일상을 조화로 보았지만 그는 아직까지 ‘크리스찬과 다원주의자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포용력을 갖고 다인종, 다종교 빈민사역에 전념하는 그이지만 모태신앙으로서 쌓아온 바탕신앙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 부부가 같은 믿음을 갖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있으며 귀국차 아내를 만나서도 그러한 믿음을 주입시킨 바 있다.
 
● 나는 그를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 성공적인 직장인(다국적 기업 경영자)으로서 존경한다. 따라서 내 신앙과 달라도 목회자인 그를 존중하게 된다. 오히려 그가 깊은 믿음이 있기에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포용력 갖춘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만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그가 쓴 ‘기독교 안에서의 대립과 조화’에 반론을 펴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의 글에 장단을 맞춰 답했다.
 
“모든 게 반복하고 반복하는데 그 안에서 반복임을 모르고 헤매고 있네.”
 
● 그러나 내 ‘반복’의 의미는 그가 받아들일 의미와 달랐다. 불교의 윤회설은 믿지 않지만 윤회(輪廻)란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억천만겁(億千萬劫)이란 무한의 시간에서 역사와 종교, 사상과 신앙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상념이었다. 무량겁(無量劫) 세월동안 정반합(正反合)의 논리가 계속되어 왔으며 정,반,합의 과정이 진리와 발전에 근접하려 하나 정,반,합 그 어느 것도 절대진리와 완전한 진화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절대진리, 절대신앙, ‘유일한 것’이란 것을 부정하는 의미였다. 정통이 이단이 되고, 이단이 정통과 합류했다가, 다시 정통이 이단이 되는 역사 아니었던가.
 
● 지난 주말 대모산 산책 하산길 벤치에서 아내의 예배 종료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부모님과 애들 구애받지 않으니 우리들만의 시간도 가져봅시다. 이슬람에는 잉여재산의 2.5%를 자선하는 ‘자캇’이란 의무가 있는데 고달팠던 우리만을 위해 자캇을 베풀어 봅시다.”
 
‘집에서 만나요’라는 응답이 올 줄 알았는데 다소곳하게 “네“라는 메시지가 떴다. 갈매기살집서 산사춘을 들이켰고 내 카톡 상태 메시지와 일치하는 카페 ‘Carpe Diem’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호사스런 시간을 가졌다. 오붓한 정담을 나눴더니 세상이 내 것이었고 걱정에 쌓였던 만사가 잘 풀려나가는 듯 했다. 여흥은 계속 이어져 밤잠을 잊고 한바탕 신나는 상상을 했다. 살아있는 현실이 되었다.
 
장자의 호접몽이 떠올랐다.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현실과 상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모든 성취와 영화가 일장춘몽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일장춘몽의 현실을 밤새 맘껏 누리지 않았는가.
 
● ‘예수’와 ‘자캇’이 공존하는 우리 부부의 일상이야기는 또 이렇게 반복되었다. 무엇이 정(正)이고 반(反)이고 합(合)인가. 이렇게 조화를 이룬 일상의 즐거움에서 절대진리를 찾고 싶다. 그리고 그 순간에 정지된 ‘억천만겁’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깨달음일까. 착각과 깨달음도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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