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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㊻ 초기 서구불교 학자들, 불교모더니즘과 프로테스탄트 불교 열어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11/08 [10:22]
근대과학사상과 합리주의 불교근대화에 영향, 진화론도 불교와 과학 거리 좁히는데 역할

서양문화와 불교-㊻ 초기 서구불교 학자들, 불교모더니즘과 프로테스탄트 불교 열어

근대과학사상과 합리주의 불교근대화에 영향, 진화론도 불교와 과학 거리 좁히는데 역할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11/08 [10:22]

근대과학사상과 합리주의 불교근대화에 영향, 진화론도 불교와 과학 거리 좁히는데 역할

 

서구불교를 탐색하면서 우리는 불교 근대주의를 상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의 과학사상과 합리주의는 불교를 서구의 계시 종교나 인도의 힌두교 계통의 종교와 구별하는 관점이 생겼는데, 이런 인식을 한 분들이 전회에서 소개했던 헨리 스틸 올 코트 신지학협회 초대회장, 독일계 미국의 비교종교학자 폴 카루수, 미국에 최초로 선불교를 전파한 쇼엔 사쿠 등, 일련의 불교근대주의 학자들이었다. 일부 선교사들에 의하여 왜곡된 우상숭배의 종교로 낙인찍혔던 불교를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종교로 탈바꿈 시키면서 불교근대주의 내지는 프로테스탄트 불교로 전환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 독일계 미국인 비교종교학자 폴 카루수는 ‘붓다의 복음’을 통해서 불교를 서구사회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     

 

불교 모더니즘은 근대불교또는 신불교’ ‘네오 불교(Neo-Buddhism)’네오야나(Neoyana)’이다. 소승(小乘) 대승(大乘) 금강승(金剛乘) 다음의 신승(新乘) 새로운 수레의 의미이다. 이 운동은 불교의 현대적 재해석에 기초한 새로운 운동이다. 서구의 다른 종교에서도 유사한 모더니즘 운동이 생겨났다. 불교를 서구사회에 과학적 합리주의적 학문적 이론에 의하여 소개한 학자는 독일계 미국인 비교종교학자인 폴 카루수(18521919)의 공적이 크다고 할 것이다.

 

폴 카루수는 불교를 만나고 나서 불교는 과학적인 종교란 결론을 내리고붓다의 복음: The Gospel of Buddha(1894)를 저술했다. 한해 전에는 과학의 종교:The Religion of Science(1893)를 출판하였다. 누구보다도 1893년 시카고에서 종교의회를 기획한 비교종교학자인 폴 카루수는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인 불교 지도자에게 매료됐다. ‘아나가리카란 뜻은 집 없는 무소유자로서 방랑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서구사회의 물질관에 집착한 종교와는 전연 다른 성격의 불교지도자를 만나면서 비교종교학자인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비교종교학자인 폴 카루수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얻어서, 미국을 몇 차례 방문하게 되었고, 전국 순회강연과 샌프란시스코에서 1897년 미국 불교역사상 처음으로 웨삭(부처님 탄생 성도 열반 축일)행사를 개최하는데 후원을 했으며, 세 번째 방문에서는 불교심리학인 아비담마(구사론)를 강의하여 불교가 확실히 과학적인 종교란 인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폴 카루수는 이미 불교의 핵심을 파악하여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붓다의 복음을 저술했고, 이 책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게 큰 영감을 주면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불교근대주의 운동에 이론적 틀을 갖는데 영감을 주었다.

▲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가 창립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世界大覺會)에서 건립한 인도 녹야원(사르나트) 물라간다쿠티 불교사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는 처음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민족주의란 바로 불교였고, 그는 불교를 새롭게 인식하고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그가 처음 가본 인도에서의 불교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불적지라고 있었지만 힌두교도들이 관리하고 있음을 목격하고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각 인도불교성지보호와 개발을 위한 대각회(Maha Body Society)를 창립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인도 불적지를 순례하면서 가장 먼저 보드가야로 가서 대탑(대각사)을 참배했는데, 이 탑은 불탑인데도 힌두 시바파의 승려가 관리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데에서 성지보호와 복원에의 원력을 세웠다고 한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대각회를 설립하고, 인도의 불교성지보호와 복원에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가 인도의 불교성지를 보호하고 복원하는 전말을 여기서 다 소개하려면 수백 쪽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스토리가 길다. 19세기말경이면 인도는 브리티시 인디아로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인도의 종교지형은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면서 이슬람 시크교 등이 공존하고 기독교도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불교는 12세기 이슬람의 침공으로 700백년간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로 소수 종교의 하나로 실 날 같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불교란 종교를 잊고 있었다. 겨우 동인도(방글라데시의 치타공)와 라다크 지역에 몇 개의 사찰과 소수의 승려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같은 인도권으로서 실론은 그나마 불교가 살아 있었다.

▲ 독일 최초의 불교협회를 결성한 인도학 학자인 카를 자이덴슈투커.   

  

보드가야 대각사는 팔라왕조를 무너뜨린 힌두왕조인 세나왕조(1112세기)가 대체하면서 인도 북동부를 휩쓸었고, 그 다음에는 투르크계 무슬림의 한 장군에 의해서 파손된다. 그리고 부근에는 힌두 사원이 건립하게 되었다. 왕조를 잘못 만나면 아무리 강성했던 종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인도불교의 쇠퇴는 이런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사실은 불교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종교가 이미 되어가고 있었다. 승가 내부의 타락과 민중의 외면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차에, 외부의 공격을 받아서 결정타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대각사도 오랜 침묵 속에 묻혀버린 역사의 유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파손된 대각사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 영국 런던 소재 불교협회 본부 건물.

  

유럽과 미국에서 불교란 종교가 이성의 종교임이 인식되면서 지식인들에게 어필되었다. 독일과 영국에서는 불교협회가 창설되었다. 독일에서는 인도학의 대가인 카를 자이덴슈투커(Karl Seidenstücker18761936) 박사가 1903년 불교협회를 창설했으며 영국에서는 브리티시 불교협회가 결성되고 불교리뷰(The Buddhist Review)’라는 저널이 발행됐다.

 

세계불교(The World of Buddhism)의 저자로 유명한 하인츠 베헤르트(Bechert, Heinz 19322005)는 불교근대주의 성립의 요소로서 몇 가지를 들었는데, 초기 불교의 재해석, 과학적(합리적)인 종교로서의 사회철학, 낙관주의 철학을 갖고 있는 불교의 재해석괴 비신화학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불교는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행동주의"와 사회적 참여, 불교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 명상 수행의 부활이라고 했다.

 

비신화화(非神話化)란 종교적인 본문들에 대해서 해석학적 방법을 시도할 때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신학적 교훈들로 부터 우주론적이며 역사적 주장의 분리하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18841976)1941년 신약성서와 신화(New Testament and Mythology)에서 비신화화란 용어를 이런 맥락에서 소개했지만 이 개념은 그 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

▲ 하인츠 베헤르트의 《세계불교》    

루돌프 카를 불트만은 독일의 개신교(루터교) 신학자이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했으며, 학교 동료인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한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연구는 예수 (1926)에 집대성되었다.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름을 따라서 불트만 학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 신학자 볼트만.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1921)는 여전히 복음서 연구에서, 틀에 박힌 수사학적인 어구나, 모여서 복음서를 형성한 이야기 단위들에 대한 그의 분석과 불트만이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해설자이었던 이른바 "양식 비평"이라는, 역사적으로 기원을 분석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조차 필수적인 도구로 간주된다.

 

불트만은 현대의 남성과 여성에게 우주의 외계인을 그리게 하는, 하늘의 도시나 삼층적 우주 같은 신화적인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그런 신화적 용어들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고유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현대의 남성과 여성은, 신화적인 용어가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트만은 그의 신학적 저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신화적인 표현을, 새롭고 실존적인 해석으로 교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성서의 역사적 관점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로서 조직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도 성서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스리랑카 불교행사에 참석하여 불교부 장관과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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