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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서(1)

정영부 | 기사입력 2023/11/17 [09:22]

시간에 대해서(1)

정영부 | 입력 : 2023/11/17 [09:22]

 

▲ 150여 회에 걸쳐 연재 중인 「영혼학 그 표준이론」이 ‘지식과감성 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독자 제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 CRS NEWS

 

이번 154회에는 다음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12장 내용 중 시간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를 한다.

 

1. 시간에 대한 여러 담론들

 

사전적으로 시간이란 물리량을 정하는 기본단위로, ‘시각과 시각 사이를 말하다. 이러한 직선적이고 기계적인 시간관에 의한 정의는 산업혁명 이후 뉴턴적 시간관과 진화론적 시간관이 득세한 이후로 지금까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적 정의가 되었다. 물리학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시간의 화살1)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만 직선적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설명한다.2)그러나 이러한 직선적, 기계적 시간관은 1905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간은 상대적인 것임이 드러났고, 이후 여러 심리학적 연구로 생체시계의 존재가 이론화되었으며 급기야 시간의 화살이 일방향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가상적 논의도 나타나는 등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플로티노스에게 시간은 존재의 사슬에서 한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화(變化)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일자에서 멀리 떨어진 물질세계에서만 보이는 현상이다. 따라서 불변무한한 궁극적인 일자에게는 시간이란 없다. 그러니 일자와 가까이 있는 세계(저승)에도 시간은 있을 것이되 그 시간은 물질계의 시간과는 다를 것이다.3)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현재는 이미 없는 것아직 없는 것의 통과점으로서만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숙고하다가 시간과 관련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마침내 인간의 혼에 주목하였다. 그는 결론하기를 혼이야말로 자신 속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영원 속에 분할된 시간 간격을 파악해서 시간의 지속을 파지(把持)하는 주체로 생각했다.4)시간을 심리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간의 정체와 관련하여 시간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졌는가를 신학자의 입장에서 고찰하고 세상은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지, 시간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세계가 어떻게 신에 의해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에게 신은 초시간적인 존재이고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힌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시간관은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이 만들어 낸 도구일 뿐 물리계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은 과학적, 물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식의 시간과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서의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5)

또한 흥미 있는 일이나 관심의 집중이 필요한 까다로운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주장도 있으며, 인간이 지니는 시간 감각은 일정 시간 동안 누적된 기억이라며 사람은 기억의 용량에 의해 시간 흐름의 크기를 인식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또 미국의 심리학자 허드슨 호글런드(Hudson Hoagland 1899~1982)는 실험을 통하여 사람의 체온이 올라갈수록 시간을 인지하는 과정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였으며 오늘날 많은 심리학자들은 자각 수준에 의해 생체시계의 속도가 증가하면 외부 시간은 느려지는데 반면 인체 반응속도는 빨라진다고 하고 또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생체시계의 속도가 느려져 외부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고 주장한다.6)

 

칼 구스타프 융은 시간에 대하여 과학자로서는 특이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그가 발견한 공시성 현상7)을 설명하면서 정신을 시공간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고 인간 관념 속의 시공간과 인과성 개념에 의한 직선적 시간관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 “성경에 이르기를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고 그 에너지가 빅뱅하여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공간이 응축하여 빛과 물질이 나타났다. 공간 안에서 빛과 물질이 움직였으니 빠른 움직임은 짧은 시간을 낳았고 느린 움직임은 긴 시간이 되었다.”

 

2. 표준이론의 시간

 

표준이론에서 볼 때 시간이란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물리적 세계에는 움직임만이 있을 뿐 시간이란 것은 없다.8)성경9)에 이르기를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고 그 에너지가 빅뱅하여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공간이 응축하여 빛과 물질이 나타났다. 공간 안에서 빛과 물질이 움직였으니 빠른 움직임은 짧은 시간을 낳았고 느린 움직임은 긴 시간이 되었다.10)공간에 빛과 물질이 생기고 그들의 움직이면서 시간이란 개념도 등장하였던 것이다.11)그때 동양에서는 태허를 말하였다.

 

태초에 가 있었다. 그래서 태허(太虛)

태초에 도 있었다. 없는 태초(太初)는 없으니까

도 있었다. 없이는 있고 없고도 없으니까12)

 

時空은 누가 만들었을까?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창조주가 로 만들었다

의 에너지가 빅뱅하여 時空이 만들어지고 빛과 이 나왔다

 

저승도 하느님의 피조세계인 한 마찬가지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천국이든 혼계든 피조세계에서는 어디서나 움직임으로 인하여 어디가 생기고 언제가 생긴다. 그러니 결국 움직임이 시간이고 공간이다.13)신지학을 비롯한 많은 사상에서 저승은 시공개념이 없거나 이승과 다르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구성물질이 달라 시간과 공간의 효율이 다를 뿐 같다. As above, so below.

 

또한 표준이론에서 시간은 역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방향성을 갖는다. 열역학 제2법칙까지 들먹일 것도 없이 우주는 인과(因果)의 세계요 인과관계에 있는 두 사건의 순서는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생이 곧 시간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현생은 하느님 안의 내가 꾸는 남가일몽일 뿐이며 윤회라는 방법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현생들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시간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니르바나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야 환상이 깨어지고 꿈이 아닌 현실이 시작된다는 멋진 주장으로 들린다. 이는 빅뱅의 우주에서 유전을 거듭하는 그 시절만 시간일 뿐 언젠가 이데아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없어진다는 플라톤적 주장14)과는 결이 다른 주장이다. 두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표준이론과도 의견이 다르나 그 다름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저승이나 이승이나 시간의 세상인데 보다 가치 있는 시간이 어느 곳의 시간이냐의 차이이므로 사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전술한 바와 같이 아퀴나스는 세상은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지, 시간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창세기의 첫날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여 밤과 낮을 가르신 때부터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충실히 증언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표준이론과 같은 시간관을 말하고 있다.

 

3. 저승의 시간

 

여러 사상 특히 최근의 오컬트에서는 저승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이승과 전혀 다르다거나 아예 저승은 시공을 초월한 4차원, 5차원의 세계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15)근거 없는 말이다. 그들은 공간이 극복되면 4차원이요 추가로 시간까지 극복되면 5차원이라고 하는데 5차원이란 수학적으로 공간의 차원이 5인 것을 가리킨다. 5개 차원에서 표현되는 공간을 5차원 공간이라고 부른다. 차원이란 덧차원이라고 하여 일정한 정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극복하였다고 5차원인 것은 아니다. 시공(時空)은 일체인데 차원에 따라 이건 있고 저건 없다는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저승은 물질세계인 이승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으므로 4차원이라고 하는데 구성 물질의 정묘성과 거주자의 영적 능력이 이승과 달라 공간이동과 물질의 부림이 이승보다 더 쉽다는 의미일 뿐이지 이를 저승과 이승이 차원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이승에서도 물속이나 무중력의 상태에 놓이면 많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고 스쿠버다이버가 차원이 다른 곳을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언급한 바와 같이 혼들의 세계인 혼계뿐 아니라 영계를 포함한 그 어느 저승에서도 시간을 역행하는 시간극복은 불가능하다. 시간극복이란 과거를 거의 현재로 체험하는 듯한 생생한 기억이 가능하다는 과거의 현재화(現在化)’의 의미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승과 저승의 시간에 대한 개념 차이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은 원의 중심에 있고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는 점들의 모임 즉 원주(圓周)상에 있다고 하며 원주상의 점들 간의 거리가 시간이라는 우주 시간관을 피력하였다. 이는 이승이 저승마을의 둘레를 흐르는 江上의 배라는 비유의 컨셉과 비슷한 시간관이다.16)아마 이 컨셉의 출처가 아퀴나스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위 비유는 마태복음 2232절을 설명하려는 한 아이디어로, 저승마을에 사는 사람이나 이승의 사는 사람이나 지금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이니 하느님 또한 산 자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창의적으로 설명한 비유다. 이를 두고 과거로의 환생이니 심지어 과거로의 여행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하였다.

인생은 이미 쓰인 역사책(희곡)을 따라 읽어 가는 몸짓이다. 모든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나는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부터 역사책을 들고 어느 사건에 대하여 읽기 시작한다. 읽는 동안 나는 많이 배워야 한다. 읽고 나서는 반드시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뜻은 어느 영혼이 어느 환생계획을 택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즉 어떤 생으로 환생하여 이승을 경험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어떤 환생계획을 뽑아 들어도 차이가 없다. 수학이든 문학이든 철학이든 어떤 학문을 하였든지 문리를 깨우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부자든 가난하든 여자든 남자든 임금이든 머슴이든 양심과 기도로 영혼을 닦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로 이해된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시간관에서의 역사(歷史)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의 기록이라면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이 현재라는 이야기가 되거나17)과거로의 환생또는 인생은 연극이라는 것을 시사한 글이 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건(事件)도 같이 창조하였을까? 영화를 잔뜩 찍어 비디오 가게에 늘어놓고 골라서 보도록 하는 것이 인생이고 사극을 보면서 왕이 된 착각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승의 삶일까? 아니다. 영과 혼은 발전하고 진화하는 존재이며 발전과 진화의 인과개념에 이미 시간이 들어있다. 또 각본 없는 액터로서 사건을 직접 창조하고 꾸려가는 것이 인생이고 그 무대가 이승이다.

 

<註釋>

1) 모든 방향으로 대칭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달리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가는 비대칭성(비가역성)을 가진다. 시간의 화살은 이러한 시간의 비대칭성을 화살에 비유하여 표현한 말로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 제창하였다.

 

2)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물리세계는 경우의 수가 큰 상태로 변화해 가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역으로 흐르는 것은 확률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작은 쪽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다. 이렇게 나타나는 시간의 방향성을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라 하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성은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성과 같기 때문에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3) 케빈 페리, 철학의 대답들, 195쪽 외 참조

 

4) “나의 마음이여, 나는 네 안에서 시간을 측정한다.”(고백론, 1127)

 

5) 시간이란 고립된 계기들의 시리즈이다. 연속 혹은 지속은 시간에 관한 체험의 산물이다. 의식의 생생한 경험으로 각 계기는 이전 순간의 정보를 나른다. 그리고 기대된 미래를 목표로 하는 현재와 과거를 포함하는 역동적인 전체로 나타난다(케빈 페리, 철학의 대답들, 191).

 

6) 이는 저승과 이승간에 시간 흐름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 설명과 같은 논리다.

 

7) 칼 융의 공시성(共時性, 同時性, synchronicity)현상

 

칼 융은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의 기이한 경험들은 기반으로 1952비인과적인 연결원리로서 공시성(Synchronizitat als ein Prinzip akausaler Zusammenhange)’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공시성현상이란 인과성이 전혀 없는 의식사건과 외부사건이 이해할 수 없는 관련성을 보이는 우연의 일치현상이다. 그가 연구한 하나로 묶이는 사건들은 원래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밀접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 논문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Ernst Pauli 1900~1958)에 대한 사례도 담겨 있다. 융은 여기에서 재수에 옴 붙은 남자파울리의 비운(悲運)을 설명한다. 소위 파울리효과(Pauli effect)’. ‘파울리효과는 동일한 시점에 벌어지는 연관이 없는 사건들이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각되는 현상을 말한다. 파울리만 나타나면 실험실이 엉망이 되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여 동료 과학자들은 그가 자기 실험실에 들어오는 일을 기피하였다. 과학자들이 의 존재를 믿은 것이다. 융은 우리가 우연이라 생각하는 서로 무관한 일들 간의 연속현상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간의 연결로 인한 현상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이는 정신이 시공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存在)임을 시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우연은 없다. 있다면 우연한 필연이 있을 뿐이다. 우연은 영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음에서 비롯한다. 나비효과, 재수나 운, 나쁜 일은 꼭 떼로 몰려오는 이유, 엎친 데 덮치는 머피의 법칙, 이날까지 다칠 듯 다칠 듯 다치지 않고 살아온 이유가 다 그런 것들이다.

 

8) 러시아 태생의 독일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가 제안한 시공세계(민코프스키 공간)에서는 세계의 궤적을 나타내는 世界線이라는 말이 있다. 물리적인 사건(event)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일어나는데, 그 공간좌표와 시간좌표를 함께 나타낸 것을 세계점(World point)이라고 하며, 이러한 세계점이 그리는 궤적을 세계선(World line)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어떤 점이 어느 시점에 존재한다는 사건은 하나의 세계점으로 표시할 수 있고, 사건의 연결은 세계선을 따라가는 운동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시간과 공간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룬다는 생각을 제시하여, 시간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공간과 더불어 시공간이란 개념의 한 속성일 뿐이라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움직임이 시간이고 공간이라는 표준이론의 생각과도 멋지게 어울린다.

 

9)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곳은 아직 비어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기 1:1~3).

 

10) 공간을 움직임으로 나누면 시간이 된다. 거리/속도=시간

 

11) 시간의 창조 시점

 

空劫不成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그러니 첫날에 시간이 생겼다

아우구스티누스 말마따나

하느님은 첫날 어중간쯤에 시간을 만드셨다. 결국

시간이 없는 때가 있었으니 시간도 창조된 것이다. 그러니

첫째 날을 벗어나면 시간도 분명 없으렸다

 

창조된 모든 것은 成住壞空壞劫 한다

시간도 한다

그렇다면 의 시간이 겁이라는 空劫語不成說이다

 

12) 사실 빅뱅이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공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 공간과 시간의 탄생은 同時. 그러나 빅뱅 전에 기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을 때는 최초의 에너지 덩어리가 아무리 작다 한들 공간은 있었고 시간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럼 하느님으로부터 기가 나올 때 이미 시공이 창조되었어야겠다.

 

13) 양자역학에도 시간이란 양자 부피가 움직이는 현상이다. ,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양자적 현상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부산물이다.

 

14) 플라톤은 본질의 순수성은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독립적이고 부동(不動)한 상태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런 변화도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 이데아계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인데 이데아계에 정말로 변화와 운동이 없지는 않으니 이데아계에도 시간이 있다. 부동(不動)의 이데아계가 어디에 있을 수는 있겠다.

 

15) 1.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물은 연속적으로 진행하고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지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천국에는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스베덴보리, 천상여행기-천국편프롤로그 사람은 천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참조)

2. 인용문에서처럼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영(천사)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천국은 지상과 차이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시공은 없더라도 상태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상태의 변화가 곧 공간이고 시간이다. 상태가 공간이고 변화(움직임)가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공과 표준이론의 시공이 다를 것이 없다.

3. 그런데 왜 한편에서는 저승에 시공이 없다하고 다른 편에서는 있다하는가. 이제 판단은 각자 몫이다. 과연 저승에는 시공이 있을까 없을까?

 

16) 저승의 시간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

 

어느 신부님 왈

이승은 천국을 둘러싸고 흐르는 강물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라더라

그렇다면

속도가 다르면 시간의 흐름도 다르다 하니

누구는 떠내려가고 누구는 강을 거슬러 젓는다면

거슬러 젓는 이의 시간은 덧없이 가고 몸은 빨리 늙을 테니

그는 분명

고생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렸다

하여간 이때

강 어디쯤에서 배를 내려 천국마을로 들어가면 그것이

죽음이란다

마을에는 아브라함도 살고 야곱도 살고 하느님도 사신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이승의 여정에는 시간이 있으나

마을에는 강 어디쯤에서 내렸는지 상관없이

아브라함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란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야곱도 나도 때가 되면

나루터에 나와 다시 강물여행을 한다

신부님은 그것을

윤회라고 하실까? 

 

죽음과 시간

 

사람이 죽는 순간 자기 인생을 파노라마로 본다는데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는 세상에 입문하면

인생역정이 단숨에 보이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눈여겨보아 두자

언젠가 죽어서 피안의 둔덕을 걸으며

지금을 살펴보는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니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이란 말이 있더라

로고스 의식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로고스 의식만 그럴까?

모든 사람의 지금은 다 영원하다

그렇다고

지금은 과거에도 영원하였다거나

미래도 지금 영원하다고 말 섞지 말라

지금은 지금으로서 영원하다

 

지금 그때를 떠올리며 추억하듯

언젠가는 지금을 떠올리리라

언젠가가 살아서이면 지금이 추억이겠지만

죽어서도 추억일까?

 

어쨌든

시간 속에 갇혀 사는 이승의 삶

죽으면 시간도 죽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나는 다시 겪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혹시 지금의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는 혹시 다음의 나도 보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 나는 지금 이미 다 산 것이 아닐까?

 

어쨌든

지금을 잘 보아 두자

죽어서 잘 보아 둔 지금을 보며

누군가처럼

내 그럴 줄 알았다 할 테니

 

17) 12.2. ‘기시감에 대하여중 리드비터의 붓디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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