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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 結(1)-불교와 표준이론

정영부 | 기사입력 2023/11/30 [12:48]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 結(1)-불교와 표준이론

정영부 | 입력 : 2023/11/30 [12:48]

 

▲ 1년 6개월 동안 연재해 온 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이 제13장 ‘結’과 ‘結詩’를 다룬 2편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필자의 구도자적 정신과 열의는 최근 ‘영혼학 그 표준이론’(지식과감성 刊)으로 출간되었습니다.  © CRS NEWS

 

이번 157회에는 마지막 장인 제13의 내용 중 그 첫 번째 이야기를 한다.

 

13. (1)

 

표준이론은 직관에 의해 프레임이 구축되고1)이후 사색의 살이 붙고 궁구의 피가 흘러 기초가 놓인 후 다시 여러 사상, 생각들과 비교하는 공부가 더해져 지금의 이론이 되었다.

 

표준이론의 기본 프레임은

 

1) 사람은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구성되는데

2) 혼은 기()로부터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여 탄생하였고

3) 영은 혼이 영적으로 진화한 존재이며

4) 영과 혼은 태어날 때 몸에 들어오는 시기도 다르고

5) 명종 후 가는 저승도 다르며 각자 윤회한다.

라는 것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유수한 종교와 사상의 기본 골격은 서로 놀랍도록 닮았으며 세부적인 내용도 마치 어느 집의 설계도가 그 평수와 방의 수 심지어 그 위치까지 비슷한 것처럼 서로 많이 닮아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표준설계도는 표준이론임도 아울러 납득하였으리라고 믿는다. 멀리서 보았을 때 집들은 서로 너무 달라 보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서로 자기 집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서로의 집은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면 제도(濟度)를 위한 방편(方便)이나 집주인의 취향으로 인한 인테리어 차이 또는 설계도를 벗어난 사소한 불법건축 부분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여러 집들을 살펴봄으로써 자기 집에 대한 이해가 새삼스럽게 깊어졌을 것이며 그 집들을 지은 건축가의 마음도 잘 알게 되었다. 또 모든 집들의 설계는 결국 서로 비슷하고 자세히 뜯어보면 어느 한 건축가가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진리는 하나뿐이고 섭리 또한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니 집이고 사상이고 모델하우스가 있어야 한다. 표준이론의 역할은 모델하우스다. 모델하우스는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표준을 제시하는 모형일 뿐이다. 집을 새로 꾸미려는 사람에게도, 집을 사려는 사람에게도 표준이론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표준이론의 결론이 어느 한 집이 표준설계도와 완전히 일치하더라라는 결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주지(周知)한 바와 같이 표준이론과 주요 프레임이 완전히 일치하는 종교나 사상은 없었다.2)

그래도 그중 불교와 신지학 그리고 유란시아서의 주장하는 바가 표준이론과 많이 닮았다. 또 기독교의 급진적 유신진화론의 주장3)도 여기에 윤회론만 부활시켜 더하면 전체 프레임이 표준이론과 과히 다르지 않을 만큼 유사하다.

 

불교와 표준이론

 

우선 불교는 표면적으로는 표준이론과 영 다른 길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표준이론과 유사하다. 전술한 11.3.3. 중의 주요 종교와 사상별 영과 혼의 정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는

 

1) 아트만을 부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라한과 보살을 통하여 영을 말하고 바라밀과 극락을 말하여 천국을 시인하며 본초불과 법신불(비로자나) 그리고 공()사상을 통하여 창조주나 신 또는 우주의식을 인정한다.

2) 게다가 아라한도 보살이 되어 도피안하기 전까지는 이승에 환생한다. 보살 또한 임의로 윤회하며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니 이 역시 표준이론의 고급영과 같다.

3) 한편 아라한이나 보살이 환생한 몸에도 반드시 혼(아뢰야식)이 있을 것이다. 이는 없다는 언급이 없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설(佛說)을 보아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니 있는 것이다.

4) 더구나 불교는 육근과 오온으로 의식(意識)의 발생을 설명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혼의 생물학적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무아의 덫을 남긴 부처님 때문에 후학들이 삼키아(Sāṃkhya)를 역으로 베끼다 보니 무착의 유식론 같은 담론이 발생하여 불설이 극단적인 마야론4)으로 흐르는 폐단이 생겼지만 유식론도 결과적으로는 윤회혼의 진화적 탄생을 논증한 셈이 되었다. 과연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이를 불교의 과학성을 증거하는 데 써먹고 있다.

5) 무엇보다도 불교는 환생의 종교다. 비록 부처님께서 장작불 운운하시고 한편으로는 無記하시는 통에 그 후학들이 무아의 덫에 빠져 8만 장경을 쌓아가며 구도에 지체하는 감은 있지만 장작불이든 등잔불이든 환생을 말하고 있고 그 장작불과 등잔불이 열반과 해탈을 추구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6) 이미 여러 번 중언하였음에도 결()에 와서까지 다시 한번 부언(附言)하거니와 오온에서 비롯한 제6식이 제7식의 자의식으로 발전한다는 의미는 동물의 혼인 각혼(覺魂)이 군혼(群魂)상태에서 개체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7식이 번뇌와 에 시달리면서 을 쌓고 이를 8식에 장()하는 것은 사람의 혼인 知魂이 생물학적 진화를 통하여 탄생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無明의 이치를 깨우침은 영혼육의 이치를 깨우침이고 번뇌를 멸하고 아라한으로 거듭남은 혼이 영이 되는 영화(靈化)이며, 무아와 의 피안(彼岸)自他가 따로 없는 一元의 천국이다. 나아가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하느님과 합일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가 공식적으로는 그 성립배경과 중생제도(衆生濟度)를 위한 방편(方便)적 이유로 인해 무신과 무아윤회를 말하고 있으나 거시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표준이론과 매우 흡사한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구성되는 사람애 대한 유수한 종교와 사상의 기본 골격은 서로 놀랍도록 닮았다.

 

<註釋>

1) 1. 독일 종교 학자로서 시카고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요아힘 바흐(Joachim Ernst Adolphe Felix Wach 1898~1955)는 종교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궁극적 실체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일단 체험을 하게 되면 그 궁극적 실체와 통교를 확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안정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반응능력은 영혼의 직관능력이다. 그는 직관적인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가장 높은 지식인 진리의 자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하였다(김은수, 비교종교학개론, 76쪽 참조).

2. 직관에 의한 저술에 심령적 색채를 더하면 자동서기(自動書記, Automatic writing, automatic script, psychography)가 된다. 자동서기의 실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여러 해석이 있다

1) 궁극적 실체로부터의 자극 또는 영계통신(채널링)으로 인한 글이다. 성령의 감도에 의하여 쓰였다는 기독교의 복음서가 대표적이다.

2) LBL이나 전생의 경험이 혼뇌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다.

3) 신들린 듯이 또는 신나게 쓴 글일 뿐이다.

4) 내부에 농익어 있던 詩想, 樂想, 思想 같은 것이 펜을 들거나 피아노 앞에 앉으면 구체화되어 시, 노래, 등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경우와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나 자동서기에는 위 여러 원인이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 표준이론의 주요 프레임은 내면에 그 大綱이 알게 모르게 익어 있었다가 때가 되자 직관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거기에 심령적 요소가 있었을까? 심령적 요소가 없는 창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보다 표준이론은 영혼일체의 영이 혼에게 주는 가르침(靈敎)이라고 생각한다. “영이 말하고 혼이 적다.”

 

2) 사상의 기원과 사상 간의 불일치

 

1.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하나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서로 너무 다른 사상과 관()을 갖고 있다. 진리를 말하는 사상이라면 최소한 주요 프레임은 서로 일치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진리에 대한 인간의 思想은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

2) 우주는 그만큼 唯心의 세계다. 그것은 명종 후 혼을 마중 나오는 성인(聖人)들이 서로 다른 이유와 같다.

3) 직관과 그 도구인 영감(靈感)과 그 스승령의 수준에 달렸다. 채널러를 통한다 하여도 스피커 영의 수준이 다르면 각자 자기 수준의 이야기를 한다.

4) 일치하지 않는 것도 섭리다. 인간 문명의 수준에 따라 적절한 지혜가 전해진다. 전해져도 알려지지 않는다. 알려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5) 애초에 불일치는 없었다. 다 진실이었다. 다만 始祖들의 표현기법만 달랐을 뿐이다. 차이는 후배들의 정치적, 권력적, 조직적, 금전적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6) 존재는 신의 단편과 진화의 경험이 합쳐진 소산이다. 신의 전능이 경험으로 새로워진 결과물이다. 경험이 어찌 같을 수 있는가. 경험으로 얻은 새로움이 같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움일 수 없다. 따라서 존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서로 다른 존재는 다른 관을 갖는다.

7) 위에서 말하는 신의 단편부터 서로 다를 수 있다. 원형인간론이라면 단편이 발출한 신체 부위가 다른 것이다.

8) 만사(萬事)는 애초부터 그 드러내 보이는 현상들이 서로 다르고 현상 간에 모순마저 보인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다름과 모순을 이해하려는 각자의 관()을 개발하였다. 그것이 사상이다.

 

2. 브라질의 해방신학자이며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교의 교수인 Leonardo Boff(1938~)는 종교에는 자기만의 양식이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부정적인 존재형식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다른 종교의 양식을 자신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서로 번역(ubersetzng)하고 용해(einschmelzung)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같은 진리를 두고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 제 사상의 양태는 반드시 극복되어 서로 융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종교혼합주의를 긍정하는 견해다. 그에 따르면 종교혼합주의는 지극히 정상적인 종교역사적 현상이며 종교적 경험을 풍부하게 해준다고 한다(김은수, 비교종교학개론, 95쪽 참조). 종교혼합주의를 초긍정하는 이러한 보프의 주장은 표준이론 의 통합이론이 바람직한 것임을 역설하는 주장으로,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모든 사상이 처음부터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직시하되 그 원인을 따지는 것보다 그 차이를 해소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3. 어떤 사람들은 사상 간의 차이를 이유로 사상의 가치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차이를 부인하고 그 차이의 원천인 상대방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관철하려 한다. 전자의 사람들은 별문제 없다. 자기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사람들이 문제다. 그들은 비슷한 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패를 짓고 무리를 이루어 다른 관을 가진 사람들과 대립하고 불화하고 전쟁한다. 모든 현상을 꿰뚫어 일이관지하는 세계관의 이론이 있다면 어떨까. 대립과 불화가 좀 사그라들까? 통합이론이 필요한 이유다.

 

3) 8.2.1. ‘기독교의 영혼창조의 시기와 방법과 미주 180 ‘기독교와 진화론참조

 

4)마야론

 

1.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에는 기본적으로 물질세계의 환상성에 대한 일고(一考)를 가지고 있다. 표준이론은 이를 마야론이란 제하(題下)에 그 내용과 실체를 정리해 본다. 마야론이 웬만한 사상마다 단골 메뉴가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들어오면 이에 완전히 속박되기 때문에 그 인식 능력이 불완전하고 찰나적이 될 수밖에 없어 외부세계는 물론 의식의 주체인 자아도 그 실재성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無知나 데카르트의 ‘Cogitio ergo sum’, ‘원리의 영원한 무변성(無邊性)에 비하면 우주는 비현실적이라는 블라바츠키의 말 등에서 보듯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이 주요 담론으로 드러나는 사상에는 유물론, 유식론, 허무주의, 회의주의, 경험주의, 불교의 무아윤회, 도가의 무위사상 등이 있다. 심지어 우리민족의 의 뿌리도 마야라고 할 수 있다.(9.5.1. ‘꿈과 영혼육의 기억장치중 흥타령 참조)

 

2. ‘마야(māyā)’힌두교 철학용어로서 세상를 존재하게 하는 우주적 환상이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힌두의 4베다 중 하나인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에서는 마야를 환상이라기보다는 현상세계가 실재(實在)한다는 우주적 환상을 만드는 강력한 힘으로 본다. 또 우파니샤드 이래 힌두이즘은 우주를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원리와 일시적이며 변화하는 마야적 물질 간의 상호작용으로 곧잘 묘사하여 왔다.(*1)시카고대학의 인도학 학자인 웬디 도니거(Wendy Doniger 1940~)에 따르면 힌두에서 우주가 환영(māy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2)그에 따르면 힌두의 마야는 환상(幻像)이 아니라 무상(無常)이다.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맥락이다.

 

3. 마야론은 마야의 정도 또는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다.

 

1) 발출론적 마야론

()은 창조주 또는 원초적 존재로부터 발출된 신의 일부다. 그는 무한히 자유롭고 영원한 존재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데 그 물질세계는 실재(實在)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1) 아데아(Adea)의 마야론 : 물질세계인 이승의 실재(實在, existence)성 또는 실제(實際, reality)성이 저승에 비해 훨씬 못하다는 의미에서의 마야론이다. 천상의 플레로마(pleroma) 세계의 이데아(Idea)만이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며 항상(恒常)할 뿐 이승의 아데아 세계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으로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림자는 사실 표현의 흠결일 뿐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니 아데아의 마야론은 실재론이다. 영지주의, 플라톤이나 힌두이즘, 신지학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 허구(虛構)의 극단적 마야론 : 신으로부터 발출한 영()은 존재하지도 않는 물질세계에서 육과 혼에 사로잡혀 자기가 몸이나 혼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이러한 환상은 신으로부터 떠나온 죄의식 또는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혼이라는 허구의 존재에 사로잡힘으로 인한 것이다. 영지주의 일부에서 보이는 극단적 마야론이다. 오늘날에도 서구 뉴에이지 사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3)

 

2) 인식론적 마야론

인간의 인식은 실재성과 객관성을 확인할 수 없는 물질적 감관에 기인하는 것이니 인식의 주체와 결과에는 마야의 성질이 있다는 주장이다.

(1) 착각(錯覺)의 마야론 : 달이 없는 밤에 땅에 놓인 밧줄은 뱀으로 오인 될 수 있다. 어둠이 걷히면 밧줄만 남고 뱀은 사라진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의 감각과 인식능력이 완전치 못하여 대상의 실체를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의 마야론이다.

(2) 허무(虛無)의 마야론 : 색성향미촉법의 육경(六境)6식으로서의 인식의 소산이라 그 가치가 진애와 같고(六塵) 마음 닦음에 있어 도적과 같을 뿐이니(六賊) 물질세계에 대한 욕망은 덧없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3) 유심(唯心)의 마야론 : 물질 우주는 나의 마음이 지은 헛것이고 마음의 작용인 인식이 끊어지면 사라지는 것이니 오로지 만 존재한다는 마야론이다. 이때 은 자존적 존재로서 식이다. 으로부터 유래하였다면 발출적 마야론이 된다.

(4) 유식(唯識)의 극단적 마야론 : 물질우주는 인식의 소산일 뿐이니 허구이고 인식의 주체인 依他的으로 발생한 無常한 것으니 그 自性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마야론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주창하는 용수(龍樹 150-250)의 공관(空觀)이나 분별식인 6이 마야이니 이에 연한 7의 자의식도 마야라는 무착(無着 310~390)唯識論이 여기에 속한다. 용수의 공관(中論)이나 무착의 유식이 모두 부처님의 緣起無我를 논증하려는 이론이다 보니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공관은 제법(諸法)이 무가 아니라 공이요 게다가 그 공은 공즉시색이고, 실재하지는 않지만 假名은 가지며 나아가 유는 아니지만 묘유(妙有)라는 非有非無의 애매한 중도적 실재관을 가진다(길희성, 인도철학사11장 중관철학 참조). 그러나 유식론은 인식(각혼의식 수준)인 제6식은 육근의 감각기관에서 나오고 自我격인 제7식은 6식에서 나오니 자아 또한 의타적으로 변하는 감각기관의 소산이기 때문에 인식의 주체인 자아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진정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唯識(Consciousness Only)이라면 그 은 당연히 실재(實在)(*4)하여야 함에도 불교 유식의 은 마야요 인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불교 유식학은 唯識이되 有識이 아닌 無識을 주장하는 꼴이 되어 唯心론이라기 보다는 唯物론에 가깝다. 불교의 唯識有識론이 되려면 6식의 근간이 당연히 7식이어야 한다. 6식에서 7식이 연()하는 것이 아니라 7식에서 6식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서 7식은 필연적으로 힌두의 아트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에 반하게 되어 후학에게는 금역(禁域)이었다.(*5)결국 무착의 유식론은 唯識의 허울을 쓴 극단적인 마야론의 한 형태다.

 

3) 현대적 마야론

(1) 유물론적 마야론 : 생각은 두뇌 신경세포인 뉴런 간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고 마음은 이러한 생각(生角)에 기반한 것으로 실체가 없는 헛것이다. 따라서 헛것이 감각하는 우주는 그 실재(唯物)와 무관히 인간에게는 마야라는 주장으로 신경의학적 마야론이다.

(2) 양자역학적 마야론 :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관찰자효과(observer effect)에 따르면 관찰을 위해서는 매개입자가 필요한데 매개입자는 관측대상을 필연적으로 파동에서 입자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주는 우리가 관찰해야 존재하며 관찰 전에는 파동에 불과하니 우리가 보는 우주는 사실 관찰하기 전에는 파동인 마야의 우주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의 관찰이 없어도 매개입자는 어쨌든 거기에 있을 것이니 우주가 마이크로적으로는 스스로 입자(물질)가 되었다 파동(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이 되었다 할지라도 마크로 우주는 恒常한다. 혜능의 마음이 없어도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고 무인지경의 밀림 속에서도 나무는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마야론은 기껏해야 와 대상이 서로 영향을 주어 변화한다는 무상(無常)론이다.

 

4. 표준이론에 마야론이 있다면 인간의 인식능력이 불완전하고 찰나적임에 따라 인식대상의 실체를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착각(錯覺)의 마야론이다. 기껏해야 아데아의 마야나 양자역학의 마야다. 백보 양보하여 만일 우리 우주가 마야의 세계라 하더라도 그 마야의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니 그 세계에도 분명한 신의 법칙(攝理)이 있고 구성요소가 있으며 그들에게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마야는 마야라는 이름의 실상(實像)인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마야론의 원류인 힌두 우파니샤드의 마야는 환상(幻像)이 아니라 무상(無常)이다.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또한 같다. 부처님의 無常我無我로 착각한 무착의 唯識이나 브라만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우파니샤드의 일원론(*6)을 마야론으로 이해한 샹카라의 베단타 이래 현상세계는 無明이 초래한 마야의 세계라는 주장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그 맥을 잇고 있으나 二元無明에 따른 제법(諸法)의 개체성(separateness)이 마야일 뿐 그들의 一元的 개별성(individuality)은 실상이라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마야는 없다.

 

5. 우주의 법칙에는 자연과학자들에 의해 탐구될 수 있는 형이하(形而下)자연법칙이 있고 형이상(形而上)브라만의 법칙이 있다. 이승의 존재들(諸法)이 그들이 가진 인식능력의 저질성으로 인하여 외부의 우주와 내부의 자아가 허상이요 무아(無我)로 의심받는다면 우리는 이를 브라만의 법칙으로 만회하여야 한다. 오관으로 감지되는 형이하의 우주도 그 실재를 믿지 못하여 마야론이 등장한 판에 형이상의 세계를 어찌 담론하랴 하여 격물(格物)을 포기한다면 뛰기 힘들다 하여 날기는커녕 걷기조차 미리 포기하는 격이니 치지(致知)는 물건너간다. 그런데 문제는 걷기를 포기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브라만의 법칙을 곡해하여 허구의 극단적 마야론을 주장하는 이승과 저승의 유정(有情)들에게 있다. 그들은 뭇 중생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날개를 꺾고 있다.

 

6. 같은 우주를 놓고 그 정체에 대하여 을 달리함은 이승에서뿐 아니라 광대무비한 저승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일 것이다. 또 수승한 영이 중생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다. 지구처럼 영적 진화의 수준이 낮은 이승에서는 방편적 논리가 섭리상 더욱 폭넓게 용인되어 왔을 것이다. 그래서 古來로 마야론이나 무아론이 있었고 일시창조론과 단생론을 펼칠 수 있었으며 심판이니 지옥이니 원죄니 하는 없는 소리도 중생에게 먹혀왔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까지 뉴에이지 일각에서 古來의 극단적 방편을 다시 꺼내드는 일은 그 유정이 아무리 채널링의 교령(交靈)이라 하더라도 시대착오다.

 

(*1) 1. 불가사의한 힘(māyā)을 통하여, 브라흐만은 우주의 동태적 조물주가 된다. 라마누자는 세상을 매료시키는 마야를 주제신의 본성을 숨겨주는 장막으로 기술하고 있다. 스웨따스와따라 우빠니샤드(Shvetashvatara Upanishad)는 거미처럼 자신의 근본 물질에서 산출된 거미줄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불이론적 브라흐만이 물질이 마야이고, 위대한 신이 주제신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서행정, 인도철학이야기5장 중 브라흐만참조)

2. 마야는 실체의 상황관계에 대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진상(眞想)으로서 인도철학자들이 채용한 형이상학적 관념이다. ‘마야 māyā’라는 말은 우주적 환영으로, 유일신의 힘(śakti), 이원(二元)으로, 인지된 세계로, 근본원질로, 마력(魔力)으로 다양하게 주석된다. 일반적으로 감각과 지성의 세계가 비실재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고 공()도 아니지만 사실상 논리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일종의 절대적 정신의 표현 영역이다. 물질세계의 진상으로서 마야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리그베다에서 원시적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마야를 통하여 인드라는 수많은 형태가 된다.” “인드라는 마야의 힘 때문에 자기 몸을 여러 가지 형상으로 표현한다.”베단따 학자들은 아비댜(avidyā 無明), 아갸나(ajñāna 不可知), 쁘라끄리띠(근본물질, )를 실질적으로 마야와 동의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비댜(avidyā)의 영향으로, 아뜨만은 명아(命我, 개인아, jiva)로 나타난다. 아갸나(Ajñāna)는 절대자가 상대물로 나타나 절대자가 다수로 보이게 한다. 근본물질은 마야가 우주를 창조하는 물질처럼 나타내곤 한다.신아(神我) , 브라흐만의 참다운 실체를 감춘 채, 가공의 현상적 실체들에 대한 선입관을 제안하여 제2의 힘이라는 마야가 산출된 것이다. “전체우주는 우주 존재의 부분이라는 대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마치 마력에 의하여 거짓을 실체로 보는 것처럼”(Mai Up. 7.10) 실존적 단일체인 신아(神我)의 추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명색의 망상을 실재로 보여지게 하는 대상으로 가득한 것이다.(전게서 5장 중 마야참조)

 

(*2) 심지어 힌두 6파철학 중 하나인 냐야(Nyaya) 학파는 prakriti(물질세상)가 환상이라는 주장을 배척하고 마야는 인지(認知)의 결함이나 불완전 또는 부재라고 주장하였다. prakritiPurusa의 실재(實在)에는 속임수가 없으며 혼란, 이해부족 또는 인지노력의 부족만 있다는 것이다.(영문위키 ‘māyā’ 참조)

 

(*3) 뉴에이지 마야론의 대부분은 이승을 영혼의 발전과 진화의 장()으로 전제하고 거기에 古來허상의 마야론을 섞는다. 그들의 마야론은 힌두의 마야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극적 효과를 노리고 극단의 마야론을 취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진화와 마야 두 개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예컨데 인연(因緣)들이 모여서 같이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또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과 서로의 진화와 깨달음을 추구한다. 깨달음이란 이것이 다 꿈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 꿈을 깨도록 도와야 한다는 식이다. 신으로부터의 발출과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고 이승의 덧없음을 계몽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마야론을 동원하는 것은 무방하나 그 수준이 현재 지구의 영성 수준에 맞아야 할 것이다.(12.8.4. ‘시간여행참조) ‘물질보다 영성이라는 사실을 계몽하는 수준을 넘어선 마야론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마야론의 주장을 예시해 본다.

1) “이승은 영의 세계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일 뿐입니다. 영만이 실재이지만 사람은 영의 세계로 갈 때까지 실재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김성진 역, 실버 버치의 가르침중 역자해설 중)

2). 세도나의 레스터도 영만이 진정한 존재이고 우주는 영이 육과 혼에 사로잡혀 꾸는 남가일몽의 마야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논지가 정리되어있지 않다.

- “온갖 다양한 인간관계와 만남을 통해서도 날마다 성장해갈 수 있다. 우리는 시험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이곳은 자신을 입증하는 무대가 아니라 배움의 무대요 교실이다.”

- “진정한 자아를 깨닫고 나면, 당신은 이 온 우주가 자신의 마음 속의 한갓 일장춘몽임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꿈속의 모든 것 - 등장인물들, 그들의 행동, 인물들 사이의 관계 등등 을 상상으로 지어낸다. 우리는 언젠가 꿈에서 깨어나, 이 모든 것을 자신이 꿈으로 지어내어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 “내가 곧 이 우주의 있음(I AM the Amness of this universe)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온 우주는 내 상상 속의 한 심상 즉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있음(my beingness)만이 현실이었고 존재하는 것의 전부였던 것이다.”(레스터 레븐슨, 깨달음 그리고 지혜1깨달음참조)

3) 헬렌 슈크만의 기적수업과 그 해설서 개리 레너드의 우주가 사라지다역시 마야론이 중심주제다. Gary는 도마 사도의 입을 빌어 우주는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원인에서 결과로 꼼짝없이 일직선으로만 흘러가는 단선적인 환영의 세계라고 한다.(12.8.4. ‘시간여행참조)

 

(*4) 六祖 혜능(638~713)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 하였다. 無着이라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움직인다는 무명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無明하는 이는 누구인가? 마야인가?

 

(*5) 그런데 또 다른 불설인 사유론(四有論)은 제6식과 7식이 8식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한다. 사유론은 불교 윤회담론 중 하나로서 윤회의 주체인 中有(아뢰야식, 8)가 생기체인 生有(식온)에 임하여 6식과 7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本有가 시작된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불교리를 떠받치는 두 사상인 윤회론과 무아론이 충돌한다(5.5.6. ‘이슬람교의 저승중 주석 참조).

 

(*6)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Shvetashvatara Upanishad)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을 인격신으로 파악하여 이 세계는 마술사(mayin) 같은 신의 환술(maya)에 의해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길희성, 인도철학사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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