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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판자촌의 예수’ 故정일우 신부, 영화로 다시 만나다
김동원 감독의 ‘내 친구 정일우’ …철거민 등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삶 그려
기사입력: 2017/12/01 [07:51]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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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소망은 죽기 전에 인간이 되고 싶은 거예요.” ‘복음을 입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며 1973년 11월 서강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산 천주교 예수회 소속 정일우(1935~2014, 미국) 신부가 남긴 한마디다.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 파일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신부는 1960년 한국에 와서 3년간 철학을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 사제품을 받은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 신부는 평생을 우리나라 철거민과 빈민, 부랑아, 걸인과 함께한 ‘판자촌의 예수’다. 1986년에는 ‘판자촌 지기’ 제정구(바오로, 1944~1999) 의원과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1994년 홀연히 잊힌 농민으로 지내고 싶다며 충북 괴산 청천면 삼송리에서 ‘예수회 누룩 공동체’를 이뤄 농부로 살았다.

지난 10월26일 개봉한 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예수님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했던 정 신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헝클어진 머리와 검정 고무신, 운동복이 트레이드마크인 정 신부는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개비로 하루를 시작한다. 동네 이웃들을 만나면 “한잔 해야지?” 하고 외치는 개구쟁이였다. 얼큰히 술에 취하면 흥에 겨워 어깨를 덩실거리고 춤을 추기도 하는 ‘한국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철거민과 함께한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살던 집은 점점 부서지고, 천막도 철거를 당하자 정 신부는 ‘하늘이 이불’이라며 철거민들과 비닐을 덮고 잠을 청한다.      
▲ 정일우 신부의 다큐영화 ‘내친구 정일우’ 포스터     

영화에서 정 신부는 미사 강론 중에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이 나라의 희망은 가난뱅이뿐”이라고. 이 메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 친구 정일우’를 제작한 김동원(프란치스코) 감독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으로 2004년 국내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했다. 2008년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증을 담은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전쟁’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영화는 9년 만의 신작이다. 전주희(예수회) 수사와 제정구 의원 아내이자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신명자(베로니카)씨 등 정 신부와 인연이 있던 이들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정 신부 추모 영상을 만들려고 하다가 영화로 개봉하게 됐다. 10월20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김 감독은 “정일우 신부님이 추구하셨던 자유스러움은 그분이 추구하는 가난의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면서 “가난한 삶의 현장이 사라진 요즘 시대에 가난 속에서 더욱 행복하셨던 신부님의 삶은 더욱 빛이 난다”고 했다. 제정구기념사업회ㆍ예수회 한국관구ㆍ푸른영상이 제작한 이 영화는 11월12일까지 울산장애인종합복지관과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ㆍ천주교 사회운동 네트워크 주최로 특별 릴레이 시사회를 열었다.

‘빈민 사목의 대부’ 정일우 신부는 누구인가

2014년 6월2일 선종한 천주교 예수회 소속 정일우 신부(79)는 한국 천주교의 양심적 신부들이 가장 존경하는 빛과 같은 존재다. 판자촌에서 산 빈민사목의 대부(代父)이자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 지도신부이기도 했다.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신부는 18살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세인트루이스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고인은 25살이던 1960년 9월부터 3년간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한 뒤 사제서품을 받고 1966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 정일우 신부는 미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예수회 입회, 31살 한국에 들어와 평생 ‘빈민운동’을 하면서 청계천 판자촌에서 어울려 살며 박정희정권 반대하다 강제추방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정 신부는 예수회 부수련장, 수련장으로 영성신학을 지도했지만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들어 1973년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1969년 홀로 박정희대통령의 3선(選) 개헌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할 만큼 약자들과 함께해 왔다. 그로 인해 몇 번이나 강제 추방될 뻔 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정든 한국과 벗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에 눌러앉게 된 그는 갈곳 없이 정부의 철거정책에 내몰리는 철거민들과 함께 청계천, 양평동, 상계동 등에서 늘 함께 했다. 고인은 빈민촌에서 빈민, 부랑아, 걸인들과 함께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 훗날 한국의 사제들이 빈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 삶의 거울이었다.

도시빈민운동가 제정구 선생의 부인 신명자 복음자리 이사장은 “제 남편 제정구도 개구쟁이었지만, 정 신부님은 더 개구쟁이었다”며 “언젠가는 육교에서 50원씩에 파는 병아리 10마리를 사갖고 와 그 좁은 방에서 병아리 10마리와 함께 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한, 복음자리 공동체 식구들은 “평상시엔 하느님의 존재를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정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 모임 할 때는 정말 성령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강론이 없어도 뭔가 움직이는 느낌, 어디서 오는 힘인지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공동체 식구들은 아무런 가식 없이 청년들과 술을 함께 마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해주는 정 신부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대하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내공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를 우리 곁에 온 예수처럼 반겼다.            
▲ '솔뫼농장' 식구들이 차린 정 신부의 환갑 잔치날에 함께 춤울 추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때 정 신부는 '진짜농부'의 길을 걷기 위해 농촌정착을 결심했다.     
     
서울 양평동 판자촌에 살다가 철거되자 갈 곳 없는 도시빈민 170세대와 함께 경기 시흥 소래면 신천리로 옮겨간 정 신부는 그곳에서 고인이 된 제정구씨 등과 함께 복음자리 공동체를 꾸려 20여명과 함께 먹고 자고 살았다.

정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말하는 법도 없었고, 신부인 체 하지도 않았고, 모처럼 미사 때 미사복을 입은 그에게 누군가 “이제야 신부같네요”라고 말하면, “이 때라도 신부인 척해야지”라고 점잔을 뺐다고 한다.

정 신부는 70세 생일을 앞두고 영적 수련을 하며 무려 63일간 지속한 단식으로 그는 죽음 직전에 이르러 그 동안 서울 평창동 성이냐시오집에서 요양해왔다. 정 신부의 선종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빈소엔 사제들과 노동자, 빈민 등이 몰려들었다.           
▲ 제정구 선생 10주기 추모행사 자서전 출판 기념미사에서 부축을 받으며 미사에 참석하는 정일우 신부가 파안대소하고 있다.     

문규현 신부는 “우리들의 큰 스승, 대선배 정일우 신부님. 신부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진짜 그리스도를 봤지요. 약자와 소외받는 이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 끝없는 비움과 겸손…. 이 나라 민중의 벗이요, 아버지요, 후배 사제들에게 조용히 큰 가르침을 주시던 신부님을 애통함 속에 이제 보내드립니다. 더 없는 평화와 안식을 누리소서”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가난을 통해 인간으로 가려고 한 길, 그것이 정일우 신부의 삶                       

1986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서울의 달동네와 판자촌을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강제철거 과정은 폭력적이었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루아침에 생존의 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의 저항과 절규는 처절했다. 그때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 현장에서 함께 싸우며 살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예수회 소속의 미국인 존 빈센트 데일리 신부(1935∼2014). 철거민들과 함께 하늘을 지붕 삼아 한뎃잠을 잤던 이의 한국명은 정일우. 공식적으로는 1998년에 귀화했지만 이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인이었던 사람. 아니, 그 자신의 말에 기대면 끝내 ‘인간’이 되고자 했던 이. “죽기 전에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기도였다. 사실상 우리는 인간이 뭔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데.”

김동원 감독의 ‘내 친구 정일우’는 이방(異邦)의 한국 땅에서 평생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다 간 정일우 신부의 삶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다. 1986년 영화감독을 꿈꾸던 젊은이는 한 외국인 신부로부터 영상 촬영 요청을 받고 하루치 일로 상계동을 찾는다. 그 하루는 3년으로 연장되며 철거민들의 투쟁과 강제 이주 과정 전체를 기록하게 된다. 이 기록은 두 시간짜리 테이프 50개로 남았고, 그것을 편집한 영상이 한국 독립다큐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 있는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이다.

“그때 제가 30년 뒤 정일우 신부의 일생을 다룬 다큐를 만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큐 속 내레이터 중에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한 김동원 감독의 말은 어떤 만남이 한 사람의 일생에 줄 수 있는 긴 파장을 감동적으로 요약한다.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건너와 예수회 재단의 서강대에서 철학 교수로, 사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정일우 신부는 1973년 돌연 교수직을 버리고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간다. 제자들이 반(反)유신독재 투쟁 과정에서 잡혀가면 시내 한복판에서 1인 시위를 하며 항의하고, 그 자신 경찰서에 끌려가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제자들의 존경과 신망도 두터웠다. 한 제자는 말한다. “신부님은 발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온몸으로 듣는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목격한 가난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조금은 이상한 한국어 용법이기도 한, 이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가는 길, 그게 이후 그의 삶이었던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 인상적인 것은 그가 그 삶 안에서 자유롭고 즐겁고 편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청계천 쪽방에서 사과궤짝 하나 놓고 살 때의 이야기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놀아요. 어슬렁거리며.”
                                        
그냥 말해버려도 될 것 같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는 가난 안에서 춤추고 술 마시고 놀았다. 그가 평생 따른 예수라는 모델도 이 사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공동체는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한 용광로입니다.” 그가 동반자 제정구 선생과 함께 만든 ‘복음자리’ 공동체 시절을 회고하며 어떤 이는 말한다. “온전히 행복한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살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상계동에서 농성 텐트마저 침탈당했을 때 그의 강론은 이상한 역설에 도달한다. “더 가난해졌으니까 잘된 겁니다. 가난뱅이만이 희망입니다.”

감독은 아파트 숲으로 변한 상계동을 비추며 자문한다. “이제 가난은 더 무섭고, 더 부끄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낯선 단어가 되었습니다.”

가난을 통해 인간으로 가려고 한 길, 그것이 정일우 신부의 삶이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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