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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부산·경남 3대 名刹…禪刹대본산 부산 범어사
화엄종 10刹 중 하나…화엄사찰로 출발했으나 선종사찰로 변모
기사입력: 2018/05/10 [08:4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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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5일에는 부산 범어사(梵魚寺)를 찾았다. 연휴 첫날이어서 그런지 서울에서 오전 7시쯤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고속도로는 밀리기 시작했다. 범어사 성지순례의 길이라 이 또한 구도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청주 인근의 한 옛 낚시터 호수에 내려 방생법회를 가졌다. 잘 알다시피 불교의 방생은 잡은 물고기, 새, 짐승 등의 생물을 놓아주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불교도들이 살생이나 육식을 금하여 자비를 실천하도록 하자는 뜻에서 행한다. 이에 관한 취지나 인연은〈범망경 梵網經〉·〈금광명경 金光明經〉 등에 전해져 있다. 방생법회를 끝낸 후 다시 출발해 법어사로 향해 달려갔으나 저녁 5시 무렵에야 도착했다. 평소에 2배 이상 걸려서 도착했다.   

금정산(金井山) 범어사로 가는 산길은 구불구불하지만 좁지 않은 도로가 일방통행 길로 정비돼 있어, 긴장과 속력을 줄이고 한가롭게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설사 길을 잘못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바퀴 바쁘게 돌아나가야 하는 것이 속이 상한 사람이라도 일단 금정산의 울창한 숲 그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절대로 성을 내거나 속력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유난스레 복잡한 부산의 도심을 빠져나와 만끽하는 녹색의 공간이기 때문에 갖는 이심전심이 아닐까. 이렇듯 금정산은 부산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이며 또한 절실한 존재이다. 그런 금정산에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집 범어사가 있다.

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범어사는 창건 이후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몇 차례의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부산·경남 3대 사찰로 꼽히고 화엄종(華嚴宗) 10찰(刹) 중의 하나이다.     
▲ 낙조가 되면 금빛으로 변한다는 금샘(金井)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의 꼭대기에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는, 금빛을 띤 우물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가 그 물 안에서 놀았다고 한다. 이에 산 이름을 '금빛 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산(金井山)으로 짓고 그곳에 사찰을 세워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 라는 뜻의 범어사(梵魚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화엄종 10찰 중 하나인 부산 금정산 범어사           

금정총림 범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사적이나 고적기에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문무왕 때 창건하여 흥덕왕 때 중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창건 당시에는 문무왕의 명으로 대규모 불사를 하여 요사 360방, 토지가 360결, 소속된 노비가 100여호로서 국가의 대명찰(大名刹)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 5년(1613년)에 묘전현감스님, 해민스님 등이 법당과 요사 등을 중건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대웅전과 일주문은 그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된 등나무 군생지를 볼 수 있다. 또한 금정산의 산기슭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산지가람 양식을 취하는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호인 범어사 일주문에서 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5호인 당간지주와 제16호인 범어사 석등, 보물 제250호인 범어사 3층석탑, 보물 제 419-3호 삼국유사, 보물 제 434호인 대웅전이 소재하고 있다. 단,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9호인 오층석탑은 부산대학교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범어삼기, 금정팔경이라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경치들을 가지고 있으며 산내에는 11개의 암자가 있다. 전통적으로 음력 3월 보름에는 3일간 실시하는 보살계산일과 춘추로 모시는 조사스님들의 추모제와 단오날의 고당제가 있다. 현재 범어사에서는 사찰에서 수행자들의 일상과 수행의 일부를 경험하는 사찰문화체험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를 진행하고 있다. 범어사 템플스테이의 주제는 '참선'이며, '참선'은 수행자가 자기의 본래 면목인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절은 백년 노송들에 둘러싸여 있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오랜 역사와 함께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특히, 일제 강점기 때는 만해 한용운이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함께 독립 운동을 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쓸 태극기를 범어사 암자에서 만들기도 했다.

범어사의 창건설화     

법어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에 《삼국유사》의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산(金井山)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창건사적(創建事蹟)》에는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다.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흥덕왕 10년(835) 동쪽 해안에 왜구가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나타나 위협하였다. 그때 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대사로 하여금 금정산에 가 기도토록 하면 왜구가 물러날 것이다'라는 진언을 하는 연고로 그대로 했더니 과연 왜구가 물러났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범어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702년에 입적한 의상대사가 130여 년이나 뒤인 835년에 다시 나타나 절을 지을 수 있을까? 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범어사가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본다면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인 문무왕 18년(678)에 창건돼 흥덕왕 10년(835)에 더 크게 지어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범어사의 역사로 전하는 것은 범어사가 임진왜란을 맞아 잿더미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 것이 선조 35년(1602).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타버리는 까닭에 광해군 5년(1613)에 또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만나는 범어사는 이 이후로 다시 고쳐짓기를 되풀이하면서 오늘에 이른 모습이다.

창건 유래에서도 얼핏 짐작되지만, 범어사는 창건 이후로도 부산으로 침입해온 왜구를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범어사를 사령부로 삼아 승병활동을 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에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만해 한용운과 함께 󰡐범어사학림의거󰡑라는 독립만세운동을 했던 일은 꽤 유명하다. 전국에서 쓸 태극기를 모두 이곳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범어사창건사적》에 보면 당시 범어사의 가람(伽藍) 배치는 미륵전 · 대장전(大藏殿) · 비로전(毘盧殿) · 천주신전(天主神殿) · 유성전(流星殿) · 종루(鍾樓) · 강전(講殿) · 식당 · 목욕원 ·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서고 360 요사(寮舍)가 양쪽 계곡에 꽉 찼으며, 사원에 딸린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奴婢)가 100여 호에 이르는 대명찰(大名刹)이라 하였는데, 이 많은 것이 창건 당시 한꺼번에 갖추어졌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상당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또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여러 고승들의 협력으로 중창하여 법당 ·요전(寮殿),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집기(什器)를 갖추었다.    

◆범어사 일주문

한 줄로 늘어선 기둥 위에 지붕을 올린 이름 그대로의 일주문(一柱門)이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튼실한 주춧돌 위에 짧은 기둥, 그리고 화려한 다포가 무거운 지붕도 가볍고 안정되게 받치고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일주문을 대표하는 데 손색이 없다.

범어사 내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여느 일주문과는 달리 생김새부터 독특하다. 우선 어른 둘이 팔을 벌려 마주잡아야 할 만큼 굵은 돌기둥 넷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서고 그 위에 다시 짧은 나무기둥을 얹었다. 그 위에 창방과 평방 그리고 공포를 짜올린 뒤 맞배지붕을 덮은 간략한 모습이다. 전통 건물에서는 흔히 주춧돌이 낮고 그 위에 놓이는 나무기둥이 길었던 것에 비해 주춧돌이 길어지고 나무기둥이 짧아진 것이라 하면 그 기이한 형태의 발상을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범어사 일주문의 기둥은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길어진 주춧돌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그저 얹었을 뿐 둘을 연결하기 위한 별다른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의젓함을 잃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건축술이 아닐 수 없다.

일주문이 처음 건립된 것은 광해군 6년(1614)이며, 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개조한 뒤 정조 5년(1781)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일주문의 돌기둥은 1718년에 세워진 그대로인 셈이다. 어칸에 󰡐曺溪門‘(조계문)이란 편액이, 그리고 좌우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와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이란 편액을 두어서 일주문의 이름과 사찰의 이름 및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화엄사찰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선종사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더라도 범어사는 화엄사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가람배치의 기본 정신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천왕문과 불이문․보제루․대웅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단으로 높이를 높여가고 있는데, 이는 화엄십찰 가운데 큰절인 해인사․화엄사․부석사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가람의 방식이다. 현실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수많은 계단을 거쳐야 불국의 주인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범어사 정식 출입문으로 '조계문'이라고도 하고,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는 '삼해탈문'이라고도 불린다. 보물 제1461호로 지정됐다.     

◆범어사 당간지주

당간이란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 당을 걸기 위해 세운 깃대를 말한다. 범어사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는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간석과 기단부는 없어지고 지주만이 남아 있으며 지주에는 문양이 조각되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준다. 지주의 좌우 기둥은 모두 가로 50cm, 세로 87cm, 높이 4.5m 되는 거대한 돌로 되어 있고, 두 기둥의 간격은 79cm이다.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5호.

범어사에서 처음 만나는 석조물로 다소 무뚝뚝하지만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범어사의 일주문이 있다.

이쪽저쪽 계곡을 살펴보면 중간지점에서 노송과 어울린 돌기둥과 커다란 돌구시를 발견하게 된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돌기둥 두 개는 높이가 4.5m나 되는데, 절집을 알리기 위해 내거는 기, 곧 '당(幢) 또는 당번(幢幡')을 매다는 장대, 곧 '당간'을 세울 목적으로 세운 당간지주이다.

기본적으로 사각의 돌기둥인 당간지주는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좁아지고 꼭대기 부분이 약간 둥글게 마무리되었으나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다. 다만 꼭대기 안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홈을 파낸 자국이 있을 뿐,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당간지주 아래쪽에는 길이 5m 폭 2m나 됨직한 길다란 타원형의 배같이 생긴 매우 큰 돌구시가 놓여 있다. 그 용도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통쾌한 기분이 든다. 둘 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범어사 불이문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소박한 일주문에 비해 불이문(不二門)은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정면 어칸은 통로가 되게 꾸며졌다.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불이문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세 칸 모두 문을 달았다. 기둥 위 공포와 공포 사이를 장식한 화반이 눈길을 끈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하단 구역은 여기서 마무리되고, 정면으로 보제루가 가로막고 나선다. 가파른 경사 위에 높직한 계단을 올라 닿게 되는데 이름으로는 누각이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매우 큰 팔작지붕집이다.

보제루를 통과하는 게 아니라 옆으로 돌아들어야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보제루와 오른쪽의 종루 사이로 보제루를 돌아들면 하단 구역에서 수직 상승해 이동해오던 분위기와 달리 너른 마당이 공간감 있게 확대된다.
     
중단 구역이면서 대웅전 앞마당이 되는 셈이다. 대웅전은 이 마당에 보제루와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높직한 축대 위에 올라서서 경내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이 마당을 중심으로 중단 구역이 펼쳐지는데 대웅전을 바라본 상태에서 왼쪽이 심검당, 오른쪽이 차례로 미륵전과 비로전이다. 이 건물들 뒤쪽으로도 많은 건물이 있는데,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선원 구역이다.     

◆범어사 미륵전과 비로전     

미륵전은 창건 당시에는 2층의 건물로, 주불전으로 모셔질 만큼 중요한 불전이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인 현재의 건물은 1889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목조미륵불상을 모시고 있다.     

미륵전과 나란히 서 있는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다. 창건 당시 미륵전 서쪽에 3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하며, 숙종 9년(1683)과 경종 원년(1721)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는 1721년 이후로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을 터이다.  

◆ 범어사 삼층석탑

창건 당시 함께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삼층석탑이다. 상하 기단에 큼지막한 안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단 영역의 마당에는 미륵전 앞쪽에 삼층석탑이, 심검당 앞쪽에 석등이 놓여 있다. 삼층석탑은 높지 않은 상하 이층의 기단 그리고 그 위에 역시 그만그만한 탑신 3층을 올려 4m 정도로 쌓은 작은 규모의 석탑이다. 상하 기단에 버팀기둥이나 귀기둥을 장식하지 않은 채 안상을 조각한 것이 매우 이채롭다. 안상은 하층기단에는 각 면에 세 개씩,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큼지막하게 하나씩을 조각했다.

탑신부의 몸돌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이 귀기둥으로 장식된 평범한 모습이다. 2, 3층 몸돌이 1층 몸돌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균형감이 깨져 있다.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경쾌하나, 지붕돌받침은 4단이다. 얼핏 기단이 3층인가 하는 오해가 생길 만큼 상하 기단을 받치고 있는 높직한 석단은 일제강점기에 탑을 보수하면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는데 뒤집어져 있는 상태이고 그 위에 보주가 놓여 있다. 창건 이후 흥덕왕 때 세운 석탑으로 추정되며, 현재 보물 제250호로 지정돼 있다.         

◆범어사 대웅전

삼층석탑과 석등 사이로 넓고 높직하여 권위적으로 느껴지는 계단을 오르면 이제 범어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있는 상단 영역이다. 종축을 따라 수직적인 느낌이 강조되었던 하단 구역, 종축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마당 주위를 법당들이 에워싸고 있어 공간감이 느껴지던 중단 구역에 비해 상단 구역은 갑작스러울 만치 횡적으로 변모하는 드라마를 펼친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서부터 일로향각․관음전․대웅전․지장전․산령각․팔상독성나한삼전 등이 일직선은 아니지만 상단 영역에 一자형으로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건물은 대웅전이다.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에 건립되고 숙종 39년(1713)에 중건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올려놓고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을 얹고 있다. 돌기둥 같은 높직한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올린 앞면 귀기둥의 모습이 일주문의 기둥을 세웠던 방식과 같은 맥락이다.

범어사에서 가장 중심되는 건물로 넓고 높은 계단으로 인하여 더욱 권위적이고 장대해 보인다. 중단 영역과 대웅전을 연결하는 계단은 본래 한 칸이었으나 후에 증축하여 세 칸을 만들었다. 계 단 가운데 소맷돌 아랫부분에 一자 눈썹에 귀가 앞으로 쏠려 마치 투구를 쓴 것같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사자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의 기단과 계단 역시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듯, 고졸하면서도 멋스러운 장식이 세월을 견디고 있다.

기단면석 곳곳에 장식된 꽃하며 정면 가운데 소맷돌에 가지 굽은 꽃을 장식한 모습이 통도사 대웅전을 떠올리게 한다. 울산 청송사터 부도밭에 남아 있던 부재들에도 그런 모습이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쪽 영남지방 건축의 한 특색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범어사 보제루    

보제루는 불이문(不二門)에서 30여 단의 높은 석계를 올라 도달하는 중단 구역의 첫째 건물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제(普濟)’의 뜻에 부합되게 이 건물에서는 예불(禮佛)과 법요식(法要式)이 거행된다. 이러한 행사는 종종 건물 바깥의 중정으로도 연장되므로 상단이나 하단과는 다른 성격의 공간일 필요가 있다. 약 6 7미터의 고저차로 상 하단과 적절한 공간적 분절을 이루고 누하주(樓下柱)를 통하는 대신 보제루의 좌우로 우회 진입토록 하여 중정에서의 내밀함을 더하도록 하였다. 일부 사찰처럼 누각 밑을 직접 통과하게 되는 이름 그대로의 누각의 아니라 정면에 석계를 배치하고 돌아들도록 한 것이다.언제부터 지금의 자리에 보제루가 서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적기>에는 숙종 15년(1699)에 자수(自修) 스님의 주관 하에 조헌(祖軒) 회영(懷英) 스님들이 편수가 되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순조 13년(1813)에 신정(信定) 스님이 주관하고 만잠(萬岑) 관식(寬式) 스님과 민간공장(民間工匠)인 김성대(金成大) 등이 도목수(都木手)가 되어 중수하였으며 다시 1827년에도 중건한 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건물은 1813년 또는 1827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실린 사진도 이때 건립된 건물로 판단되는데 형태는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으로 사찰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익공(二翼工)식의 공포를 가구하여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수리 전에는 중전 쪽으로 온통 개방하고 불이문 쪽으로는 판벽 사이로 쌍여닫이의 판장문을 달았었다. 최근에 수리하면서 큰 막돌 덤벙 주초 위의 1.5미터 석주를 받치고 그 높이만큼 징수리 벽을 석판으로 막아서 중정 쪽에만 네 짝 미세기창을 달았다. 다만 수리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익공식 공포의 형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주두 위로 초익공과 이익공을 첩놓고 1출목을 짧게 내어서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과 행공 첨자에는 파련 형상의 단청 외에 별도의 초각은 하지 않았다.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복화반(覆花盤) 1구씩을 얹고 나머지 부분에는 회벽 마감 위에 벽화를 그려 두었다.

최근의 수리로 예전과 비교하여 고졸한 분위기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누각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은 보존하고 있다. 석계쪽으로는 범어사 현판이 중전쪽으로는 보제루와 금강계단(金剛戒壇)의 현판이 붙어있다.다른 사찰에서는 보제루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지만 범어사의 보제루는 정면에 석계단을 배치하여 건물 옆으로 통과하도록 하여 다른 사찰과는 다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보제루의 오른쪽 벽면에는 목우도(牧牛圖)가 그려져 있다. 목우도는 송의 보명(普明)이 창안한 선화(禪畵)인데 소를 길들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소는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상징한다. 즉 검은 소에서 흰 소로 나아가서 마지막 열 번째는 비어있는 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오염된 성품을 닦아 청정한 성품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보제루 역시 양쪽 귀기둥이 대웅전이나 일주문과 다르지 않다.

◆범어사 배치평면도

일주문에서부터 천왕문과 불이문이 일직선상에 놓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주문 - 천왕문 - 불이문이 만드는 진입축은 각 구간이 약간씩 꺾여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길은 더욱 깊어지는 효과가 생겨난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불이문, 보제루로 오르면서 각각의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그 효과가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천왕문에서부터 보제루에 이르기까지는 양옆에 낮은 담이 쌓여 있다. 이 담이 없었더라면 이렇듯 고요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세계로 몰입하는 듯 집중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일주문 - 천왕문 - 불이문을 거쳐 보제루에 이르는 공간은 진입할수록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진다. 상승감이 강조되는 것이다. 결코 길지 않은 범어사의 진입 공간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이유이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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