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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기독교, 박해 증가 속에서도 폭발적 성장
美오픈도어즈(Open Doors), 현지 가정교회 지도자 사연 공개
기사입력: 2019/04/10 [11:0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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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도어즈(Open Doors), 현지 가정교회 지도자 사연 공개  

 

성경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같이 기독교는 박해에 직면했을 때 확장되었고, 박해받는 이란 기독교 역시 폭발적 성장을 보이고 있다고 미국 오픈도어즈(Open Doors)가 밝혔다.

 

오픈도어즈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이란 가정교회 지도자 출신의 Y목사의 사연을 전했다. 현지 사역자인 Y목사는 오픈도어즈팀을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로 초청했다. 그는 이곳에서 매주 200여 명씩 예배를 드린다고 말했다. 보통 거실 규모의 공간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이용해 예배를 드리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랐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란을 떠나게 됐다. 그는 좋은 삶을 살았고, 세탁소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계속된 압박을 받은 끝에 현재 수천 명의 난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Y목사는 두 살 반된 아들을 둔 아버지로 이혼을 경험했다. 그는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를 슬프게 했다고 말했다. Y목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실제적인 우울증을 겪었다.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자랐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랑이 없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야했다. 무슬림으로 자랐으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이슬람으로부터 멀어졌다. 10대일 때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친한 친구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새로운 신앙을 전해주었다. 그는 내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마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안 깊은 곳에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내 우울증이 낫기 위해서는 항상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평안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면에서부터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정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도들은 그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수용해 준 반면, 바깥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거부하셨고, 직장에서도 나를 거부했다. 나를 무슬림이라고 언급한 공문서에는 서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박해가 점점 심해지면서 그는 지하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를 이끌었다. 그는 어느 한 날 교회로 가고 있는데 정부의 연락을 받았다. 이후 항상 누군가로부터 미행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휴대폰도 도청을 당했다. 이란에서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긴장이 높아지면서, 교인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일 년 동안 2~3명의 소규모로 흩어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25명의 신도들이 모여 있을 때, 보안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두려움에 질려 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를 지켜보기 힘들었다.”

 

결국 Y목사와 교인들은 교도소에 수감됐다. 처음엔 독방에 수감돼 있다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마치 도서관의 책들처럼 붙어서 자야했고, 화장실 사용도 여의치 않았다.

▲ 예배드리고 있는 이란 여성신도들의 모습. /사진= 한국오픈도어선교회

 

교도소 내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Y목사의 폐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는 종종 교도소에서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일어나면 여전히 수감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건과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한 가지 여전한 것이 있었다. 이들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심지어 전도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했다고 말했다.

 

미국 오픈도어즈는 교회는 교도소 안에서 죽지 않았다. Y와 교인들을 통해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수감, 연이은 압박과 추방에도 불구하고, 이란 내 교회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교연구단체인 오퍼레이션 월드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은 전세계에서 기독교 인구가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국가이다. 1979년 기독교인들은 약 500명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50만명으로 증가했다. 지하교인의 수는 약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1990년 이란 기독교 지도자들이 설립된 엘람 미니스트리즈는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온 이후 13세기보다 지난 20년 동안 기독교인이 된 이란인의 수가 더 많다고 밝혔다.

 

미국오픈도어즈는 박해의 강도가 강화되고 더욱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Y목사와 같은 사람들은 박해 앞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앙은 논리적인 논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Y목사는 나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없으면, 생명도 희망도 없다. 예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우리들 중 누구도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이란 기독교의 역사

 

이란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파르티아 시대(BC 250~AD 226)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제2장에 오순절 성령체험을 하면서 사람들이 방언(기독교 용어로는 성령을 체험하고 다른 말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할 때 처음에 언급되는 세 지역이 바로 이란에 있는 바대(파르티아), 메대(하메단 인근 지역), 엘람(후제스탄 지역)이다. 초기 기독교 기록을 보면 예수의 12제자 중에 도마가 파르티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며 시몬과 다대오는 이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역시 파르티아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아람어로 쓰인 초대 교회 관련 문헌에 의하면 3세기초 무렵에 이란에 350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그 교회 중에 까라 켈리사(Qara-Kelisa, 검은 교회)라는 교회는 중간에 형태가 조금 변했지만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이 교회는 다대오 순교기념 교회로 더 유명하다. 파르티아 시대의 왕들은 종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고, 이 시기에 이란에 교회들의 부흥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에서 핍박 받던 기독교인들이 파르티아 지역으로 피난을 왔으며 파르티아 왕에 의해 보호 받기도 했다.

 

가장 큰 기독교공동체는 현재 이라크 지역인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디아베네(Adiabene: 우리나라의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는 이라크의 아르빌 인근)에 있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의 왕성한 복음전도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란의 지배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였던 카르티르(Kartir)가 남긴 문서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크테쉬폰), 아디아베네 지역 그리고 후제스탄 지역이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지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산조 페르시아 초기까지 아무런 박해 없이 자유롭게 종교생활을 한 결과이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바흐람 2세가 왕위에 등극하면서 기독교는 큰 박해에 직면하게 된다. 박해의 배후에는 당시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가 확장하는 데 가장 큰 위협세력을 기독교로 인식하고 이들에 대한 핍박을 강도 높게 진행해 나간다. 이 시기에 순교한 사람 중에는 바흐람 2세의 후처인 칸디다(Candida)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순교가 극히 일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조직적이고 국가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4세기초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 종교로 공인하고 자신을 기독교 공동체(물론 이란의 기독교 공동체도 포함된다)의 영적 수장으로 선언한다. 이로 인해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두 왕을 섬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이란의 왕을 섬기지만 영적인 영역에서는 로마의 왕을 섬기게 되었다. 당시 로마의 확장 정책으로 인해 위협을 받던 사산조의 통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이 로마와 내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박해를 시작한다.

 

서기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했던 아르메니아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특히 야즈드게르드 2세 시기에는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에 대한 조로아스터교로의 강제적 개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아르메니아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를 따르던 사산조의 국가적인 핍박과 사제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했다. 당시의 뛰어난 페르시아 신학자 중에 아프라하트(Aphrahat)가 있었다. 그는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 논증)이라고 더 잘 알려진 '23개조'라는 신학적 유산을 남길 정도로 신학에 해박했고 당시 신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은 야즈드게르드 1세가 집권하면서 완화되었다. 그는 공적인 예배와 교회 건축을 인정했다. 410년에는 그의 후원 아래 셀레우시아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크테쉬폰의 주교였던 마르 아이작(Mar Issac)의 주관으로 진행된 공의회에서는 지방 공동체의 규율을 정하고 이란의 성직회를 조직하였다. 초대 동방 총주교로 마르 아이작이 임명되었다. 또한 비잔틴 황제의 특사로 사산조에 온 마루사(Marutha) 주교는 페르시아 교회의 재조직과 기독교 전파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야즈드게르드 1세 통치 말기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다시 일어났는데 그것은 지역 주교였던 압다스(Abdas)의 선동으로 기독교인들이 수사의 조로아스터교 불의 제단을 훼파한 사건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압다스 주교는 사형을 당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수많은 교회들이 파괴되었다. 야즈드게르드 1세의 계승자인 바흐람 5세 때에도 핍박은 계속되었다.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같은 민족이었던 이들의 동족 간 살육은 비참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조로아스터교의 박해에 못이겨 로마의 영토로 도망갔으며 바흐람 5세는 그들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패하고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이 평화조약에 비잔틴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란 내의 기독교 예배의 자유를 넣었고 전쟁이 끝난 직후 이란의 교회들은 자체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이란인들은 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시리아어로 쓰인 많은 기독교 저작물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조로아스터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터져 나와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게 된다. 호스로우 1, 호르모즈 4, 호스로우 2세 같은 사산조 말기의 통치자들은 기독교를 지지해주고 예배의 자유도 허락해 주었다. 호스로우 2세 같은 경우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이 기독교인 쉬린(Shirin)으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 네자미(Nezami)에 의해 '호스로우와 쉬린'이라는 시로 만들어져 페르시아인들 사이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러나 호스로우 2세는 집권 후반부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비잔틴과의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가 실제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십자가를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호스로우 2세가 한 예루살렘에서의 잔학 행위와 십자가 탈취로 인해 로마의 교회들은 황제 헤라클리우스를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하여 페르시아와 다시 전쟁을 하도록 부추겼고 결국 십자가를 되돌려 받았다. 또한 호스로우 2세 때는 페르시아에서 네스토리안 교회의 교리들을 지지하는 많은 저작물들이 만들어졌다. 5~6세기 동안 네스토리안 교회는 아라비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인도, 중앙아시아까지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시켜 갔다.

 

크테쉬폰에 있던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는 비잔틴에 있던 교황과 맞먹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북서부 이란에는 수많은 수도원들이 새로이 세워졌다. 그러나 네스토리안 교회는 이란에서 국가적 교회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다수가 믿는 기독교였지만 다른 파()들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안 교회, 갈데아 교회 그리고 아시리아 교회와는 많은 교리적 차이를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이러한 알력과 갈등은 이란 내에서 기독교의 몰락을 가져 왔다.

 

내부적 권력 다툼과 갈등으로 인해 힘을 잃은 기독교는 결국 이슬람이 쳐들어오면서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 크테쉬폰은 아랍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되고 주교청도 바그다드로 762년에 이전하게 된다.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기독교인들도 조로아스터교인과 유대인처럼 인두세를 바쳐야 했으며 무슬림 이웃들과 구분되어 살아야 했고 나라의 일을 하는 공무원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예술이나 기술을 이용한 직업을 많이 가졌으며 특히 보석 세공업에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게 되었다.

 

압바시아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른 종교를 믿던 소수파들의 지위가 조금씩 향상되었다. 외국어에 능했던 이들은 9세기에 크게 일어났던 국가적 번역 사업에 큰 공헌을 했으며 일부는 궁정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지위는 무엇보다 무슬림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다. 640년에 성지 예루살렘이 무슬림들에게 정복되면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그리고 무슬림들 사이에 끊이지 않는 갈등이 시작됐다. 1095년부터 1270년까지 계속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서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과 한패로 오인되어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투르크족이 이란에 침입했을 때에도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이란 내의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과 내통한다고 의심하고 많은 고통을 가했다. 이런 오랜 핍박에도 기독교 공동체는 바그다드와 니셔푸르(Nishapur) 같은 대도시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상대적으로 이란 동부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는 통치자들의 보호로 그나마 안전을 유지했다. 또한 1258년에 몽골이 이란을 침입하면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몽골의 황제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자신들의 이슬람에 대한 독실함을 소수종교들에 대한 핍박으로 표현하였다.

 

티무르의 침입으로부터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왕까지 이란의 기독교 역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603년 이란 북서부의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 주교가 압바스 왕에게 오스만튀르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탄원하였고 압바스 왕은 당시 수도인 에스파한의 자얀데 강 남부에 있던 졸파 지역에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많은 아르메니안들과 그루지아인들이 이란의 중부 지역으로 흩어졌다. 물론 압바스 왕이 이러한 정책을 취한 목적은 단순히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는 데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이용하여 유럽과의 무역의 물꼬를 트고 여러 부분에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이들을 육성하여 경제를 회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란의 네스토리안 교회는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단념하고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가톨릭으로 병합되었고 이들은 후에 칼데인 교회로 혹은 그냥 가톨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안 교리들이 아시리안 교회에 미친 영향은 아직도 남아있다. 17세기 초에 다시금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란에 들어온다. 이들은 대부분 압바스 왕의 궁정을 통해 왔으며 에스파한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다. 이들 선교사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비뇽에서 성자로 불린 로데 신부이다.

 

두 번째 다시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19세기 중엽이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던 타브리즈, 에스파한, 우르미예과 살마스에 미션스쿨을 세웠다. 학교 외에도 병원과 고아원 등을 세웠는데, 이 기관들은 종종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어지고 운영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수도인 테헤란까지 확장하여 학교와 병원, 교회 등을 건축했다. 1811년에는 헨리 마틴(Henry Martin)이라는 선교사가 쉬라즈(Shiraz)에서 신약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마친다. 곧 이어 글렌(Glen) 박사가 구약도 번역을 마친다. 개신교의 선교 사역은 1834~1871년에 성공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52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이란의 동부와 서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다. 1910년까지 이들은 62개의 학교와 4개의 병원을 세웠다.

 

또한 러시아에서 온 선교사들도 이전에 네스토리아 교인이었던 사람들을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소수종파들처럼 입헌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슬람 국회가 아니라 헌법에 의해 운영되는 입헌 국회를 만들었지만, 팔레비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에 구성된 새로운 국회에서 소수종교를 믿는 종족들이 자신들의 종교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현재 토착 기독교인들은 아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안들 뿐이다. 그밖에도 아주 적은 수의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인들이 존재한다. 아르메니안들과 아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의 국회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법에 따라 결혼과 이혼, 상속 등을 집행한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는 무슬림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같이 지킨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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